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3
그냥 생명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덤벼들던 놈들이 점차 머리를 쓰고 있었다. 내성이 가까워졌다고 사령술사가 직접 조종을 하는 모양이다.놈들은 철저히 소모전을 강요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아군을 괴롭혔다. 아주 약간의 체력을 빼앗을 수가 있다면, 조그마한 상처를 만들 수만 있다면 언데드가 얼마나 갈리든 신경 쓰지 않았다.대도시 스트라븐은 이미 죽음의 땅이 되었다.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고, 죽음을 맞이한 자들에게는 너무나 안락한 곳이었다.사령술사들이 굳이 그들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시체는 자연스럽게 좀비나 스켈레톤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수만이나 되는 언데드 무리가 사방에 가득하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기만 했다.
“단번에 길을 열어야만 해. 준비해주시오.”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의 말에 성황청 아홉 교단의 성직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 암흑으로 물든 땅을 정화해 달라고.치지직-죽음의 땅에서 흘러나오는 사기와 악마의 기운에 반발하듯 잠깐 스파크가 튀더니 동시에 아홉 개의 원이 머리 위에 솟아올랐다.천상계의 문이 열리고 아홉 신을 모시던 전투 천사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빛의 천사, 불의 천사, 대지의 천사, 물의 천사, 그 외에도 아홉 교단의 신을 상징하는 다양한 속성을 지닌 천사들이 등장하자 죽음의 땅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살아있는 자의 생명력을 빼앗고 저주를 내리던 지독한 사기가 사라지고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답답하던 호흡이 편해졌다.차르륵!투명하고 순수한 물로 이루어진 물의 천사가 채찍을 휘두르자 거세고 날카로운 물길이 뿜어져 언데드를 후려쳤다.빛의 천사가 날개를 펼치자 빛의 화살이 나타나 숨어있던 사령술사의 몸을 꿰뚫었다. 불의 천사가 검을 휘두르자 강력한 불길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바람의 천사가 손을 내리누르자 저 멀리서 사악한 마법을 날리고 있던 악마들이 땅에 처박혀 고깃덩이가 되었다.대지의 천사는 내성의 성벽을 부수고 길을 만들었다. 앞을 가로막던 튼튼하고 단단한 성벽이 땅으로 스며들고 그저 평지가 되었다.생명의 천사가 축복을 내리자 상처 입은 자들이 다시 일어섰다. 지친 자들이 활력을 되찾았다.
“이 싸움의 끝에 영광이 있으리라!”
기사 하나가 그리 소리를 지르며 내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밖으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두꺼운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고 심장을 터트렸다. 볼 것도 없이 즉사. 다른 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안을 노려보고 있는데 기묘한 갑각을 몸에 두른 푸른 피부의 악마가 걸어 나왔다.네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 거인족을 연상케 할 정도로 커다란 덩치에 빈틈없이 붙은 근육, 날카롭게 자라난 두 개의 뿔.그 외형을 본 사제가 경악하듯 소리쳤다.
“용기의 파괴자!”
외형만 보고도 이름을 알 정도라면 제법 유명한 놈이란 뜻이었다. 자고로 악마란 유명하면 할수록 강한 녀석이기에 바깥에서 짓눌린 이름 없는 잡졸들과는 달리 기세가 몹시 강렬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생명을 헌납하러 왔구나.오만하게 깔아보듯 중얼거리는 녀석 뒤로 악마 몇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보고도 사제들이 뭐라 이름을 외치는 것을 보니 다들 한가락 하는 놈들인 듯했다.수없이 많은 악마들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면 결코 얕볼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썩어가는 손아귀만은 못하군.”
아이반은 습관처럼 빙글 창을 돌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제법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없이 대악마에 가깝다던 썩어가는 손아귀와 비교하면 차이가 제법 났다.
‘손쉽게 이 땅을 유린하고 있었으니 저리 여유가 가득하지.’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천둥을 밟고 공간을 뛰어넘어 녀석의 심장을 노렸다.치지직! 쾅!직선 이동에 있어서만큼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기술이 천둥걸음이었다. 아이반은 그것을 평생 수련한 사범들보다 깊이 익혔으니 움직임을 따라갈 자가 많지 않았다.- 윽!용기의 파괴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반의 창이 심장에 닿기 전에 가까스로 쳐낼 수가 있었으나 강철보다 단단한 육신에 상처가 생겼다. 피부가 쩍 갈라지고 독기를 머금은 검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강인한 생명력과 회복력 덕에 상처는 바로 사라졌으나 고위 악마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산산이 부숴주마!용기의 파괴자의 네 손이 움직였다. 공간을 후려친 파동이 지독한 파괴력을 머금고 앞으로 쏘아졌다.기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려 방패로 막았으나, 의미가 없다는 듯 그대로 우그러뜨리며 육신을 뭉개버렸다.거인만큼이나 커다란 덩치에서 오는 파워가 실로 대단했다. 용기의 파괴자, 그 이름에 걸맞았다.그러나 녀석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 순간, 네 개의 팔 중의 하나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팔 하나가 웬만한 성인의 키 보다 커서 그 상황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쿵!팔이 잘린 어깨를 붙잡고 뒤로 물러나는 녀석의 앞에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띄워 올렸다.거인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라니, 실수했지. 쉬익!프레이의 무기, 스스로 움직여 거인을 베는 검이 피의 검에 깃들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용기의 파괴자는 잘린 팔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자신의 목을 노리는 섬뜩한 기운에 허리를 뒤틀었다. 커다란 자에게 더욱 위협적인 기운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주르륵!벌써 두 번째. 이리도 쉽게 상처 입을 육체가 아니었으나 또다시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하찮고 미개한 자들이 나에게 덤벼들다니!”
용기의 파괴자는 그렇게 분노를 터트리면서도 지극히 냉정히 판단했다.
‘과연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노리고 덤벼든 자들. 어쩌면 막을 수가 없겠어.’
마계에서 수많은 악마를 아래로 꿇리고 고위 악마가 된 것이 그저 강력한 육체의 힘만 있어서는 아니었다.용기의 파괴자가 아주 뛰어난 지혜나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눈치는 무척이나 빨랐다.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영리했다.그는 자신의 목을 노린 아이반에게 반격하기보다는 다른 기사와 성기사, 사제들을 노렸다. 비교적 개인 전투력이 떨어지는 자들의 목숨을 끊어놓기로 결심했다.쾅!용기의 파괴자가 휘두른 주먹에 땅이 갈라지고 공기가 밀려났다. 일순간 진공 상태가 되었다가 돌풍이 몰아쳤다. 그 강대한 힘이 기사들을 후려쳤다.
“컥!”
기사와 성기사들이 벽을 쌓아 충격파를 막았다. 사제들이 내린 축복이 그들을 감싸고 보호막이 몇 겹이나 만들어졌다. 그래도 감당하지 못해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마리난 제국 서부 기사단, 성황청의 성전기사단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곳에 있어도 인정받을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러나 지상에 강림한 고위 악마의 힘이 그만큼 강했다.스걱!고위 악마, 용기의 파괴자는 아이반과의 싸움을 피하려고 했으나 마냥 멀쩡하지는 못했다.이미 잘려 나간 팔 하나에 더해서 반대쪽에 있던 팔도 하나가 잘려 나갔다. 끝까지 따라붙으면서 틈을 노린 아이반의 공격 때문이었다.네 개의 팔이 두 개가 되었다. 고위 악마의 재생력은 잃어버린 팔을 능히 재생할 정도였으나, 상처 부위를 지지고 있는 신력 때문에 그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팔이 두 개가 되니 이제야 좀 괜찮아 보이는군.”
아이반은 재차 녀석을 공격하려다가 한 걸음 물러나며 창을 휘둘렀다. 멀리서 그를 노리고 날아오던 저주의 마탄이 어두운 용의 발톱에 찢겨 사라졌다.오오오-족히 수천이 넘는 망령을 두르고 하늘에 떠 있는 리치가 보였다. 계속해서 음모를 꾸미던 바로 그 녀석이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스스로 사령핵을 뽑아서 죽음의 인도자에게 바치더니 대악마의 가호를 받아서 더욱 큰 힘을 얻은 모양이다.- 또 네놈이로군. 이번에야말로 너의 목숨을 끊어주마.리치의 음울한 목소리를 듣고 아이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할 소리를. 이미 몇 번이나 뒈졌어야 할 놈이 운 좋게 빠져나가고서는.”
하긴 이미 뒈진 놈이었지.아이반은 뒷말을 삼키면서 창을 집어던졌다. 빠르게 쏘아진 어두운 용의 발톱은 인식하기 힘든 속도로 리치의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녀석은 공간을 뒤틀어 창을 흘려보냈다.휘익!리치의 앞에 생긴 조그마한 게이트로 사라진 창이 아이반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아이반은 자연스럽게 한 바퀴를 돌면서 창을 낚아채고 주변에 있던 언데드 하나를 후려쳐 파괴했다.그리고 그사이 뤼안 교단의 사제들이 소환한 물의 천사가 날카로운 물줄기로 리치를 공격했다.쉬이익!물의 천사가 휘두르는 물의 채찍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성수나 다름없었다. 언데드에게는 무척이나 치명적인 공격인 셈이다.그러나 물의 채찍이 리치에게 닿기 전에 시커먼 보호막이 나타나 물의 천사의 공격을 밀어냈다.쾅!리치는 이미 평범한 전투 천사 하나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반이 보기에 녀석은 거의 고위 악마와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거짓된 신의 노예들아! 진정한 죽음을 배알하라!리치가 소리치며 마력을 흩뿌렸다. 그러자 죽음의 땅으로 변한 대도시 스트라븐 곳곳이 요동치며 뼈로 만들어진 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우웅-일순간 전투 천사들의 모습이 흐려졌다. 강력한 죽음의 마력에 신성력의 흐름이 흔들린 것이다. 사제들이 재빨리 힘을 더해서 그들을 붙잡았으나,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신성력이 소모되는 것은 틀림없었다.구마사제 하나가 신음처럼 소리를 질렀다.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들의 도시다!”
수많은 자의 목숨을 빼앗아 만든 사악한 도시였다. 네크로맨서들이 죽음으로 만든 그들만의 성지였다. 스트라븐에 가득한 언데드가 더욱 흉포해지고 강해졌다.두두두두-수백의 시체가 뭉쳐서 하나의 거대한 살점 골렘을 만들었다. 수천의 백골이 모여서 거대한 괴수의 형상을 이루었다. 크르르르르르-수천이 넘는 인간의 뼈를 재료로 탄생한 스켈레톤 드래곤이 위협적인 울음을 내뱉었다. 그 속에 담긴 지독한 살의와 저주의 기운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시체만 충분하다면 하나의 네크로맨서가 능히 일만을 상대할 수가 있었다. 죽은 자들의 도시가 완성되었으니 제국 마리난이 상대라도 두렵지 않았다.리치는 그 막대하고 강력한 죽음에 취해서 오만하게 소리를 질렀다.- 십만의 죽음으로 탄생한 죽은 자들의 도시에 감히 발을 들이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쾅!스켈레톤 드래곤이 허공에 떠올랐다. 전투 천사들이 녀석의 몸을 부수고 바닥으로 찍어 누르려 했으나 네크로폴리스의 사악한 마력을 등에 업은 녀석은 오히려 전투 천사의 몸을 찢어발기고 하늘로 날아올랐다.스으읍-숨을 쉴 필요도 없는 녀석이 숨을 들이켜 마시자 네크로폴리스에 가득하던 죽음의 마력이 녀석의 가슴으로 몰려들었다. 그 지독하게 사악한 기운에 모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아이반이 자세를 가다듬고 창을 던지려 했다. 그것을 방해하듯 용기의 파괴자가 끼어들었다.악마의 힘을 머금은 충격파가 중첩되어 아이반을 덮쳤다. 고위 악마의 공격을 무시하고 투창을 날릴 여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반이 자세를 풀고 녀석의 주먹을 받아쳤다.쿵!사나운 이빨과 이레인 역시 각자 다른 악마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서부 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은 주변에서 덮쳐오는 언데드를 밀어내고 아군을 지키는 중이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성지 선포를···!”
어느 사제가 소리치자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이 미간을 찌푸리며 딱 잘랐다.
“그럴 수는 없소! 당신들이 여기서 힘을 빼면 대악마는 어떻게 하려고?”
그사이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마법을 구성한 적색 마탑의 주인 리카르도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시체는 재가 되어라!”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에 떠올랐다. 온 사방에 죽음의 마력이 가득해 마법을 짜내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스트라븐 어디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마법진이라니, 실로 대단했다.역시 적색 마탑의 주인, 리카르도였다. 마리난 제국 최강의 전투 마법사.스스슥!거대한 마법진을 찢고 화염들이 떨어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중견 마법사가 온 힘으로 뿜어낸 화염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것이 수십, 수백 개나 쏟아지고 있으니 실로 파괴적인 마법이다.
‘저런 것을 자기 머리 위에다가 쏟아붓는다고?’
열심히 언데드와 싸우고 있던 기사들이 무심코 입을 벌렸다. 언데드나 악마와 싸우다 죽는 게 아니라 이대로 불타서 죽는 건 아닐까 두려울 정도였다.물론 이대로 도시가 불타는 것을 볼 수 없던 리치와 흑마법사들이 죽음의 마력을 움직였다. 검붉은 방어막이 온통 도시를 뒤덮으며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 세례를 막아냈다.쾅! 콰과광!거대한 폭음과 함께 열기가 바닥까지 밀려왔다. 불꽃 세례는 저 멀리 하늘에서 막혔으나 이곳까지 피부가 후끈후끈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평범한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폐가 손상되었을 정도였다.후우우-스켈레톤 드래곤이 고개를 틀었다. 가슴 깊이 모으던 죽음의 마력을 하늘을 향해 날려 보냈다. 끝없이 화염을 토해내던 거대한 마법진이 그대로 찢어졌다.이번에는 반대로 차갑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실제적인 온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사기와 저주의 기운이 영혼까지 파고들어서 추울 정도로 시리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씨부럴! 이거 흑마법사가 방어막을 펼쳐서 살아남은 거 아니오? 방금 다 죽을 뻔한 것 같은데?”
아이반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렇게 소리치자 리카르도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살아남았잖아? 저 뼈다귀 괴물이 죽음의 숨결을 내뱉었으면 크게 곤란했는데.”
그동안 제법 괜찮은 마법사만 만나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래 마법사는 끝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파고들기에 하나같이 독선적이고 괴팍한 놈들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판단하기가 극히 곤란한 자들이다.
‘미친놈! 이래서 마법사란 종자들은 가까이하는 것이 아닌데. 빌어먹을 주문쟁이.’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악마의 주먹을 막아냈다. 그러면서 그도 오래된 노르드의 언어로 주문을 내뱉었다.
“에인 스코푸드 갈드라(Ein sk?puðr galdra:마법노래들의 유일한 작곡자).”
아이반의 주변으로 몇 가지 다른 속성의 마법이 발현되어 악마를 찢고, 불태우고, 얼리고, 붙잡았다.
“으흠!”
용기의 파괴자는 자신을 공격하는 마법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기사 하나의 머리를 깨부쉈다. 그의 피와 생명력을 흡수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인간들은 강했다. 그러나 쉽게는 통과하지 못하리라.용기의 파괴자가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그의 가슴을 뚫고 창이 삐죽 솟아올랐다.
‘어느 틈에?’
녀석은 피를 뿜으면서도 깜짝 놀라서 아이반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다른 악마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을 공격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용기의 파괴자의 심장을 부수고 몸을 반으로 쪼개버린 기사가 무심한 듯 창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적갈색 머리칼을 곱게 빗어 뒤로 넘기고,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은 중년의 사내.기사라기보다는 신사에 가까운 자였다. 기사 특유에 단단하게 단련된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몸에 묻어있는 피와 살점, 창과 갑옷이 아니었다면 어디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차를 즐기는 중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기사보다는 문인에 가까워 보이는 이 남자가 남부 제국 마리난 최강의 기사, 라인하르츠 공작이었다.그는 자신의 창에 목숨을 잃은 용기의 파괴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내가 좀 늦었군. 우리 쪽 게이트는 조금 더 멀리 있었어.”
라인하르츠 공작의 뒤로 그를 따르는 황금 사자 기사단이 보였다. 제국 동부 기사단과 중앙 기사단, 자색 마탑, 제국 마법사단이 함께했다.쿵!여기저기 솟아있던 뼈로 만들어진 탑이 무너져 내렸다. 여기까지 퍼지는 신성력을 보니 성황청의 추가 병력이 활약하고 있는 듯했다.라인하르츠 공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켈레톤 드래곤이 여전히 사나운 기운을 내뿜으며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저 녀석부터 처리해야겠어.”
그가 손짓하자 제국 마법사단이 마법을 사용했다. 모든 것을 불태울 화염도 아니고, 뼛속까지 시린 냉기도 아니었다. 그저 발판. 저 높은 곳까지 이어진 계단.탁!라인하르츠 공작이 발판을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뒤 스켈레톤 드래곤이 뼛조각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비록 스켈레톤 드래곤이 실제 드래곤과 같은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수천이 넘는 유골을 몸체로 삼아 네크로폴리스의 사악한 마력을 머금은 괴물이었다.그런 놈을 가볍게 해치운 라인하르츠 공작의 힘에 모두가 전율했다. 별달리 힘을 쓴 것 같지도 않게 평온한 기색이라 더욱 놀라웠다.아이반은 그를 보고 예전에 만났던 카락취를 떠올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에 드높은 산의 높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현대를 살아가는 필멸자가 도달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아득한 경지였다.
“이게 마리난 제국 최강의 기사인가······.”
아이반은 그렇게 감탄을 터트리면서도 허탈하게 웃었다.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거늘 한 세력의 최강자 수준과 비교하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기 때문이다.까놓고 말해서 종합적인 수준, 레벨은 비슷한 정도까지 도달했으나 이리저리 문어발로 손을 뻗은 자와 하나의 길에 매진한 자의 차이였다.전사의 기량을 발전시키고, 마법사의 지혜를 갈고 닦고, 때로 레인저의 경험과 암살자의 기술을 익혔으며, 신들의 힘을 빌려 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라인하르츠 공작의 창 하나만 못했다.어쩌면 단 한 걸음, 종이 한 장의 차이.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을 걸어도 닿지 못할 거리.최강이 되고자 한 적은 없었으나 왠지 모를 실망감이 진하게 덮쳤다. 어딘가 씁쓸하기까지 했다.이건 초월자 앞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이반이 점차 노르드다운 전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저절로 황금색으로 변해 제국 최강의 사내를 바라보았다.라인하르츠 공작은 스켈레톤 드래곤을 해치우고 땅으로 내려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보았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고 담담하던 라인하르츠 공작의 얼굴에 순간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아이반은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카락취가 아이반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무척이나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라인하르츠 공작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묘목이로군.”
씨앗이라고 하기엔 이미 컸고, 거목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했다. 뿌리를 내렸으나 튼튼하지 못했고, 가지를 뻗었으나 시원하지 못했다.거기까지 생각하던 라인하르츠 공작은 창을 휘둘러 마력을 짓눌렀다. 음습한 저주의 기운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다가 갈기갈기 찢어져 흩어졌다.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라 해도 좋았다.여전히 주변에는 적이 넘쳐흘렀다. 십만의 죽음으로 완성된 네크로폴리스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용기의 파괴자는 사라졌으나 다른 악마들이 남아있었다. 결정적으로, 아직 그들은 대악마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10만의 언데드가 우글거리는 적의 소굴이었다. 멈추는 순간 잡아먹힌다. 이곳에 온 이상 끝까지 달려야만 했다.쾅!앞을 가로막는 악마와 언데드를 말 그대로 갈아버리면서 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이미 극도로 사악한 마력이 가득한 이계였다. 네크로폴리스의 핵이 되는 곳이라 사제들의 정화가 아니라면 단 한 걸음도 가볍게 걸을 수가 없었다.말 그대로 공기조차 죽여 버리는 죽음의 인도자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의 공기 한 모금, 마력 한 조각이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슥, 슥- 수많은 자들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발걸음 소리가 극히 낮았다. 모두가 스스로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주변을 경계했다.아름답고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을 스트라븐의 성은 거대한 괴물의 위장처럼 역겹고 끔찍한 곳으로 변해있었다.이름난 화가의 그림은 괴물의 살점과 같은 피막으로 덮였고, 천장에서 찬란하게 빛났을 샹들리에는 이따금 꿈틀거리는 촉수를 휘감고 있었다.한때 내부를 순찰했을 병사는 백골만 남아 산 자에 악의를 내뿜고, 밝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했을 하녀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저주했다.하나하나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무척이나 기분 나쁘고 섬뜩했다.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은 아니었다.
“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리 격렬하게 반항하더니 막상 그 벽을 뚫고 들어오니 조용하군. 이상한 일이야.”
악마들이 뭘 노리고 있는지 대체 짐작을 못 하겠다. 설마 대악마라는 녀석이 겁이라도 집어먹고 틀어박힌 걸까?이리저리 복잡하게 공간이 꼬여있었으나 이곳에 있는 마탑의 주인만 셋이었다. 그들은 이 뒤섞인 공간에서 죽음의 마력이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곳을 찾아 아군을 이끌었다.그 와중에 마주치는 놈들은 전부 송사리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잘하게 길을 막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대악마의 곁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그렇게 방어적일 리가 없는데······.’
아이반이 몹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금으로 도금된 커다란 문 너머에서 사악한 마력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 너머에 녀석이 있으리라.탁!기사 둘이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죽음의 인도자가 뼈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생명의 모래시계를 한 손에 쥐고, 시커먼 연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아득히 깊은 어둠. 죽음을 형상화한 것 같은 외형의 악마가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죽음을 피해 도망가던 자들이 찾아왔군.대악마의 말에 깃든 사악한 마력과 지독한 저주가 몸을 파고들었다. 비교적 경지가 낮은 자들은 그것만으로 약한 내상을 입었다.우웅-사제들이 신성력을 내뿜어 다친 자들을 치유하고 떨어진 체력을 회복시켰다. 대악마의 존재감에 밀려서 신성력이 원활하지는 않았으나, 성황청 아홉 교단에서 뽑은 최정예 성기사와 사제들은 악마의 방해를 뚫고 신의 힘을 이곳에 풀어놓았다.
“전투 준비!”
세 개의 마탑, 다섯 기사단, 아홉 교단의 성직자.그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악마를 상대로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자신에게 살의를 내뿜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죽음의 인도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좁았던 공간이 뒤틀리면서 광활하게 넓어졌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더욱 어두운 자가 자리에서 일었다.- 한낱 필멸자가 그리 몰려오면 나를 어찌할 수 있을 줄 아느냐?저 멀리서, 어두운 하늘에서, 발밑 그림자에서.언데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스켈레톤 드래곤을 능가하는 기운을 가진 놈들도 여럿 보였다.죽음의 인도자가 아득한 세월 동안 직접 모아온 놈들이었다. 한때 완력을 뽐내던 거인도 있었고, 마계에서 날뛰던 고위 악마도 있었으며, 가장 고귀한 성자와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기사도 있었다.한때 찬란히 빛났을 정신은 사라지고, 대악마의 장난감이 되어 진군을 시작했다.카아아악!머리가 아홉 개나 날린 히드라가 독기를 내뿜었다. 오래전에 목숨을 잃고 언데드가 되었음에도 독성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농축된 모양이다. 녀석의 근처에 다가간 기사들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변해 바닥에 쓰러졌다. 사제의 주문이 그들에게 쏟아졌으나 이미 숨이 끊어졌다. 웬만큼 단련되어 독성에 내성이 있는 기사들이 잠깐을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예전 아이반이 잡았던 머리 세 개짜리 히드라는 이 녀석에 비하면 정말로 돌연변이 뱀 새끼에 불과했다. 제대로 성장한 히드라는 실로 신화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쉬이익!녀석은 아홉 개의 머리를 움직여 일곱 기사를 깨물었다. 그렇게 아홉의 목숨이 사라지는 사이, 사나운 이빨의 검이 녀석들의 몸통을 찔렀다.화아아-용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히드라의 몸을 가르고 내장을 태웠다. 머리가 잘려도 순식간에 회복한다는 괴물이라도 용의 불꽃은 견디기 어려운지 빠르게 타올랐다. 어쩌면 언데드로 변하면서 불에 더욱 취약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그 너머에서 거인 좀비가 망치를 휘둘렀다. 성기사 하나가 피를 토하고 날아가는 사이 이레인이 날린 화살이 녀석의 눈을 파고들었다.쾅!화살이 폭발하면서 머리가 날아간 거인 좀비가 쓰러졌다. 아이반은 녀석을 밟고 좀비 드레이크의 가슴을 꿰뚫었다. 단번에 사령핵이 부서지며 녀석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까아아아아악!한 많은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지독한 저주를 담아 망령이 울부짖는 소리.
“빛이여!”
델피노의 외침에 성스러운 빛이 내려와 망령에게 내리쬔다. 피눈물을 흘리며 절망을 부르짖던 망령의 몸이 흐릿해졌다.스걱! 쿵! 차라락!검이 휘둘러지고 피가 튀었다. 망령과 악령이 산 자의 몸을 뺏으려하고 사제들이 그들을 몰아냈다. 일진일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또 사라졌다.-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라!죽음의 인도자가 그리 외치자 회백색 공간이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영역 내에 있었던 자들이 그대로 숨이 끊어져 바닥에 툭툭 쓰러졌다.신선한 시체에 망령이 자리 잡고, 새로운 언데드가 되어 방금까지 아군이었던 자들의 목을 물어뜯었다.
“감히 신성한 죽음을 농락하느냐!”
사제들이 불같이 화를 내며 신성력을 모았다. 이제 죽음의 인도자를 만났으니 더는 힘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껏 아끼고 있던 신성력을 마음껏 내뿜으며 기도를 올렸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이 땅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성황청 아홉 교단의 사제들이 각자 자신의 신을 불렀다. 그러자 대악마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하늘 위에서 빛이 내려왔다.스스슥-아홉 가지 속성을 머금은 신의 힘이 이 땅에 등장하자 어둠만이 가득하던 공간이 출렁거렸다. 아군의 목을 물어뜯던 언데드가 순식간에 정화되고 신성한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아홉 교단이 동시에 성지 선포를 선언하여 이곳에 만신전이 생겨났다. 감히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라 하여도 함부로 날뛸 수는 없으리라.그러나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는 그 강렬한 신성력의 홍수 속에서도 죽음의 기운을 내뿜었다.- 압사.푸슉!근처에 있던 기사 하나가 몸이 짓눌린 채 죽었다.- 질식사.언데드의 몸을 불태우던 마법사 하나가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피가 날 정도로 자신의 목을 긁어대던 그는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동사.한계까지 신성력을 내뿜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사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뱉는 입김이 점차 진해지고 손끝 발끝이 시려왔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손을 뻗었다.바로 옆에서 화염구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온몸이 시퍼렇게 변해서 얼어 죽었다.- 아사언데드의 몸을 쪼개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허기가 미칠 듯이 몰려왔다.벌써 몇 시간째 싸우는 중이었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힘들고 배가 고플 수도 있었지만 그게 너무 심각할 정도였다.그러던 기사는 자신의 팔뚝을 보았다. 실시간으로 근육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살이 사라지고 거죽만 힘없이 뼈에 붙어있었다.정신이 혼미해진다. 앞이 흐릿하고 자신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도 못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죽음의 인도자가 하는 말에 따라 아군이 하나씩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원인도, 과정도 없이 결과만 있는 불합리한 죽음이었다.- 세상 모든 죽음이 이곳에 있으니 나의 힘은 쇠하지 않는다.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의 오만한 선언에 성황청 아홉 교단이 만들어낸 만신전이 순간 흔들렸다. 네크로폴리스의 중심에서 대악마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만신전이 완벽하게 기능하지 못한 것이다.그때 라인하르츠 공작이 창을 휘둘렀다.캉!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만신전이 안정되었다. 이 버림받은 땅에도 신의 힘은 뻗어와 기적을 만들었다.치이익!언데드의 몸이 불타고 둔해졌다. 그 강한 놈들이 하나씩 정화되었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의 몸도 만신전에 구속되었다. 녀석이 죽음의 마력을 내뿜을 때마다 몇 명씩 피를 토하고 죽었으나, 그럼에도 녀석은 만신전을 벗어나지 못했다.스걱!언제 움직였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이 움직일 때마다 죽음의 인도자의 몸이 흔들렸다. 피를 뿜듯 사악한 마력을 토해냈다.죽음의 인도자가 비록 불멸자라고는 하나 이대로 몇 번 더 찌르고 베면 이 땅에 강림한 화신이 무너지고 마계로 쫓겨나리라.모두가 환호하고 있을 때, 그곳에 있던 여섯만이 표정이 굳었다.아이반, 이레인, 사나운 이빨, 델피노,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 라인하르츠 공작.마경에서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소환되던 모습을 보았던 자들과 지금 녀석의 몸을 찌르고 있는 자.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너무 쉽다.’
대악마답지 않았다. 진짜 죽음의 인도자라면 녀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아군의 절반 정도는 싸울 의지를 잃었을 것이다.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죽음이라는 자연현상. 아이반이 처음 죽음의 인도자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신의 시선에 익숙한 아이반마저 패배를 생각했고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니 몇 명쯤은 정신이 나가서 자해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녀석의 죽음의 마력에는 그런 힘도 있었으니.하물며 라인하르츠 공작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초월자인 죽음의 인도자를 이리도 쉽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가짜.그리 생각하는 순간 네크로폴리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십만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스스로 봉인하기 시작했다.우웅-하늘이 닫힌다. 외부와 연결되었던 길이 끊기고 안으로 들어온 자들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아 붙잡았다.
라인하르츠 공작의 창에 꿰뚫린 죽음의 인도자가 형태를 잃어버리고 사라진다. 조금 전까지 아군을 몰아붙이며 죽음을 선사하던 대악마가 쓰러졌으나 그것을 진정한 승리로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그들이 이곳까지 와서 힘겹게 쓰러뜨린 대악마는 가짜였고,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스트라븐은 그 막대한 죽음의 마력을 사용해 스스로를 봉인했다.이곳은 이계였다. 단순히 걸어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부 제국 마리난이 가진 전력의 절반이 이곳에 붙잡힌 것이다.쾅!거대한 덩치의 괴물 좀비를 으깨버린 아이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함정? 함정이라고?”
가짜 죽음의 인도자나 이 봉인이나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계획이 누출되고 그것을 이용해 악마가 제대로 속여먹은 셈이다.
“···배신자가 있군. 빌어먹을 놈들.”
중앙 기사단장이 으드득 이를 갈면서 분노를 뿜어내다가 그걸 억누르고 물었다.
“공격 계획이 누출된 것은 둘째 치고, 대악마의 위치를 잘못 잡은 거요? 왜 이곳에 녀석이 없지?”
그에 세 개의 마탑과 제국 마법사단, 성황청 아홉 교단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대악마는 스트라븐에 들어간 이후로 움직임이 없었소. 다른 곳으로 갔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소.”
대악마의 존재감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원 방벽이 크게 약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초월자를 바깥 세계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존재도 그러한데, 마계에서 넘어온 대악마라고 다르겠나.제국의 모든 마탑과 마법 연구소, 성황청과 아홉 교단의 신전이 몇 번이고 확인한 일이었다. 대악마는 스트라븐으로 들어간 이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 왜 녀석이 없지? 이 공간에 숨어있다는 뜻이오?”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와 사제들이 모여서 한참을 쑥덕거리다가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녀석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오. 제국 전역에서 녀석의 존재는 감지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요.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곳으로 녀석이 떠나버린 경우.”
“녀석이 움직이지 않았다면서 떠나버렸다는 건 또 무슨 말이오?”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는 말이오. 녀석이 마계에서 우리 세계로 넘어온 것처럼, 우리 세계에서 또 다른 곳으로 건너갔다는 뜻이겠지.”
“뭐? 또 다른 세계로 갔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오. 그럴만한 곳도 있고.”
그러면서 마법사와 사제들은 힐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이미 다양한 경로로 정보가 전해졌기에 그들은 그녀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