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4
“요정계를 잡아먹으면 악마들이 다른 세계를 침공하기가 더욱 쉬워질 테니까.”
이레인의 얼굴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감정이란 감정이 다 빠져버린 딱딱한 얼굴이었다.아주 낯선 표정은 아니었다. 서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기에 오히려 개인의 감정은 옅어지고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엘프의 표정이었다.물론 지금 이레인은 오히려 감정이 너무 격렬하기에 억지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아이반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은 알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야.”
결코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요정의 숲은 대륙 모든 숲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떠도는 부유 차원이니까. 확실히 악마들에게는 탐나는 곳이겠지.”
지금은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 어디쯤에 있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마계와 요정의 숲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위치를 조정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엄밀히 따지면 요정의 숲은 이계지만 물질계와 소통이 자유로워. 힘의 손실도 거의 없고. 마계와 물질계 사이에 징검다리로 사용하면 악마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겠어. 힘들게 차원 방벽을 뒤흔들고 제물을 바쳐서 길을 열지 않아도 오갈 수가 있으니.”
말을 내뱉던 이레인의 얼굴이 끝내 일그러졌다. 계속해서 평온을 가장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원래 세계수와 떨어져 혼자가 된 엘프는 평범한 인간보다도 감정의 폭이 훨씬 컸다. 다른 일도 아니고 종족의 안위와 관련된 일인데 어찌 멀쩡하겠나.
“정말로 요정의 숲이 악마의 손에 넘어간다면 큰일이야. 대악마가 몇이나 넘어오고 어쩌면 마왕이 등장할지도 모르지. 마계의 악마들이 끝없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군.”
마법사와 사제들은 그리 말하며 걱정했으나 기사들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지금 이렇게 붙잡혀있는 사이에 대악마가 제국을 유린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중에 마계와 연결되고 말고 하기 전에 이미 제국이 멸망했을 수도 있는데.미래의 일이야 어쨌든 당장은 시간을 벌었다. 이곳에 묶여있는 전력을 생각하면 상황이 극도로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최악은 면한 셈이었다.물론 그것은 단지 남부 제국 마리난 입장에서의 일이었다. 인류 전체, 대륙 전체, 물질계와 기타 세계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극도로 심각했다.
“세계수가 정말 위험하다면 당신이 이미 알아차렸을 거요. 대악마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요정의 숲에서 엘프들과 세계수를 압도할 수는 없겠지.”
아이반이 이레인을 바라보며 그리 위로했으나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대신 이레인은 그동안 전투 중에는 자제하던 곰방대를 입에 물고 연초를 꽉꽉 채워 불을 붙였다.후우-독한 연기가 그녀의 폐를 찌르자 좀 괜찮아진 모양이다. 적정 용량을 넘어서 몸을 망치는 행위였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델피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제를 돌렸다.
“흠흠, 어쨌든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말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공간을 확인하던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한숨을 내뱉었다.
“글쎄, 쉽지 않겠어. 아주 무식하게 두꺼운 결계로 막힌 것은 둘째치고 이계로 만들어서 밖으로 쏘아 보냈으니 이것을 역산해서 되돌리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겠어.”
수많은 죽음으로 세워진 네크로폴리스가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들을 붙잡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수많은 강자가 이곳에 있다고 해도 단번에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냥 핵을 부수고 공간을 찢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그랬다가는 오히려 공간의 틈을 떠도는 차원 미아가 되어버릴걸. 녀석들이 제법 머리를 썼어.”
백색 마탑은 이런 분석에 가장 정통한 마법 학파였다. 그곳의 수장이 그리 말하니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역산한다면, 얼마나 걸리겠소?”
“정석대로 간다면 몇 달, 이곳에 마법사가 모두 달려든다면 몇 주 정도. 재수가 좋으면 단번에 풀려나는 거고, 재수가 더러우면 끝까지 잡혀있는 거고.”
도대체 어디로 날려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기에 방향을 잡지 못했다. 대충 방향만이라도 알 수 있도록 기점이 되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차원 좌표를 분석하고 물질계의 절대 좌표를 표시하는 마도구는 제법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죄다 먹통이야. 하긴 악마가 그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사제들이 신성력을 받아오는 천상계의 차원 좌표를 계산해서 그것을 통해 물질계의 위치를 대략 확인하고 조금씩 범위를 좁히겠다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하면 시간을 조금 더 줄일 수는 있겠어. 다행히 성황청 아홉 교단이 모두 있으니 제법 정확한 좌표를 구할 수가 있거든.”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삼각측량과 비슷했다. 실제로는 아주 더럽게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겠지만.
“알았으면 저쪽에 가 있게. 지금부터 머리를 써야 하니까.”
아이반 역시 마법사로서 경지가 결코 낮지 않았으나, 아이반이 익힌 마법은 이런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원초적이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그래서 주변에 가끔 등장하는 언데드를 쓰러뜨리기 위해 떠나려다 말고 문득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피의 검 브리카, 난쟁이가 만든 검.
“그러고 보니 포르니가 피의 검과 자신이 머물던 동굴을 연결했소. 이것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는 어디서든 사용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했소.”
“뭐? 다른 마도구도 다 먹통이 되었어. 이미 물질계를 벗어나 차원 좌표가 크게 흐트러졌으니 그것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말을 하던 오비도가 피의 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난쟁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난쟁이의 물건이라면 뭔가 다를지도 몰랐다.
“일단 가져와. 난쟁이가 직접 공간을 연결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건네자 오비도가 크게 환호하며 소리쳤다. 포르니와 이어진 통로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가장 복잡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과정이 확 줄었다. 이러면 몇 주, 몇 달씩이나 이곳에 잡혀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길어도 삼일이면 충분해. 그동안 우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전투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하니까.”
마법사란 마법사는 죄다 그 일에 참여하고 기사들이 그들을 둘러싸 방어벽을 만들었다. 성기사와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그동안 일행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남은 괴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레인이 도저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더는 고위 악마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몇몇 사령술사가 남아있었다. 빌어먹을 리치도 처리하지 못했고.거의 대부분이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남았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가장 강한 자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쉬이익!라인하르츠 공작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갔으나 그의 창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몬스터를 꿰뚫었다. 극도로 정제된 마력으로 창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기예였다. 웬만한 강자도 실전에서는 쓰지 않았고.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그리 마력과 의지력에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아이반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처럼 자유롭지는 못했다. 거기에서부터 라인하르츠 공작과 격차가 벌어졌다.
“잔재주다. 진짜 강한 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지.”
창수는 직접 창을 쥐고 있을 때가 가장 강하다고 했다. 손으로 쥐지 않고도 창을 휘두르는 것은 결국 그러지 못할 때를 대비한 술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손에서 창이 떠났을 때가 가장 강하오.”
묠니르를 날리든, 궁니르를 던지든 아이반의 기술은 결국 무기를 손에 쥐지 않았을 때가 가장 강했다. 그것은 그가 순수하게 전사의 역량을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이반이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으나, 세계 최강급 전사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면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창수는 끝까지 창을 쥐고 있어야 한다. 손이 아니라면 마음으로라도.”
우웅-순간 라인하르츠 공작의 기세가 변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괴물들을 꿰뚫던 그의 창도 변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움직임이 마치 장난이라는 것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창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었다.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아이반은 알았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손을 떠났을 때 가장 강하다고? 그렇다면 그 창은 네가 아니라 다른 자가 휘두르는 것이다. 아직은 닿지 못하는 힘을 휘두르고 있는 게지.”
그 말에 아이반은 뜨끔했다.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아이반 자신은 부인하고 있었으나 본질을 따지자면 그는 아스가르드의 화신이었다. 수많은 신의 힘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신의 전사. 그게 나쁜 일은 아니었으나 아이반 스스로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력한다고 했으나 결국 그의 힘은 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 또한 너의 능력이다. 창이 되지 말고 창수가 되어라. 결국 무기는 휘두르는 자의 몫이니.”
“귀한 말씀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이리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오?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그 말에 라인하르츠 공작이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자가 보이는데 어찌 손을 내밀지 않을까? 한때는 그 모두가 경쟁자라 생각했으나, 이곳에 닿으니 결국 동지였음을 알았을 뿐이다.”
아이반이 그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사악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제는 고위 악마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리치.
“···질긴 악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지.”
아이반이 창을 들었다. 녀석을 숫돌로 삼아 자신의 창을 갈고 닦기를 원했다.그와 같은 길을 조금 더 앞에서 걷고 있는 선배가 그것을 지켜보았다.
리치를 처리한 아이반은 본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백 번을 휘두르는 것보다 한 번 깊이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았다. 아이반은 예전 카락취가 명상을 하고 있던 자세를 떠올리며 엇비슷하게 흉내를 냈다. 내면으로 파고들어 자신이 붙잡은 힘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했다. 그는 조금의 마력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날카롭고 묵직하고 부드러운 기세가 형태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때로 아주 싸늘한 바람이 되어 얼음을 만들었고, 때로 아주 뜨거운 불길이 되어 후끈 달아올랐다. 마력이나 신성력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강한 의지에 세상이 물들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이제 필멸자를 벗어나 초월자로 향해가는 길에 섰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비록 아직은 너무나 미약한 수준이라고는 해도. 그걸 지켜보던 라인하르츠 공작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기특한 후배로군.”
수십 명, 수백 명에게 조언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는 많지 않았다. 잠깐의 지도로 이렇게나 성장하는 것을 보았으니 그도 제법 흡족했다.
여전히 세계는 위태롭고, 상황은 무척이나 위험했으나 그 속에서 이런 인연을 만났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 녀석이라면 나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 듣기로 아이반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 나이였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경지에 이미 도달했다.
이제 단순히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쌓인다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리란 보장은 없었으나, 괜히 기대가 되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의 외모는 중년으로 보였으나, 사실 실제 그가 살아온 세월은 평범한 인간이 두 번을 살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인간으로서 수명은 이미 끝에 달했다. 이대로라면 몇 년을 더 버티지는 못하리라.
라인하르츠 공작은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창을 휘두르며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겠지만, 어느 쪽이든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이대로 필멸자로 생을 마감하거나, 초월자가 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거나. 결과가 어떠하든 지금과는 같지 않을 터였다.
‘이 녀석이 나와 제대로 창을 섞을 때가 다가올지도 모르겠군.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좋을 텐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라인하르츠 공작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닐 텐데. 라인하르츠 공작은 아이반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창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아이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명상을 시작했다.
“아이반, 일어나십시오!”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있던 아이반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턱없이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고뇌하던 모든 상념이 마치 모래성처럼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진리에 닿을 것처럼 보였으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자신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아이반이 델피노를 바라보자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좌표를 찾았습니다. 이제 물질계로 돌아가는 문을 연답니다.”
아이반은 무려 삼 일이나 눈을 감고 명상을 계속했다. 그가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으나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이 외차원에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아이반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을 수는 없었다. 그런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또 미친 듯이 싸우겠군. 어쩌면 포위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누군가 그리 중얼거렸지만,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었다. 기사들 입장에서 최악은 이미 제국이 무너져서 멸망한 것이었다.
이곳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자들이었다. 그 빈자리를 노리고 적들이 공격을 시작했다면 과연 버틸 수가 있을까? 다행인 점이라면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요정의 숲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으나, 당장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몇몇 기사들이 남몰래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레인은 알았으나,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물론 피우고 있는 연초가 조금 더 독해지지 않았다면 무기를 뽑아 들고 싸웠을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오! 모두 준비하시오!”
어느 마법사 하나가 그리 외치고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 개의 마탑과 제국 마법사단이 총동원되어 새긴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다가 점차 범위를 넓혔다.
감각이 아주 예민한 자들은 그 막대한 마력이 복잡하게 움직이는 것에 속이 울렁일 정도였다. 이계로 날려 보낸 공간을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그건 역사에 남을 만한 대마법이었다. 우웅- 일렁이던 공간이 순간적으로 크게 요동쳤다.
그와 함께 퍼지는 마력 파동에 몇몇은 내상을 입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돌아왔소! 주변을 확인하시오!”
그 말에 기사들이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온통 이질적인 검은색이던 하늘이 익숙한 어둠으로 바뀌어 있었다. 반짝이는 별빛과 달빛,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섞인 풀 냄새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실패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델피노가 그리 감탄하자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실패할 거라면 시도하지도 않았어. 우리를 어찌 보고.”
그의 두 눈이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그 현자의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멀고 먼 곳까지 확인한 오비도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적이 없는데?”
몇몇 언데드가 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그건 적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정말로 악마들이 싹 빠져나간 모양이다.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이 으드득 목을 풀면서 대꾸했다.
“원래라면 몇 주는 붙잡혀 있었어야 했소. 그때까지 계속 포위하느니 공격을 시작하는 편이 낫겠지. 전선이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군.”
설령 대악마가 요정의 숲을 공격하고 있다고는 해도 모든 전력이 그리로 향하지는 않았을 거다. 사방으로 퍼져있는 언데드만 해도 막대한 숫자인데 제대로 막아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작전 실패는 좀 뼈아프군.’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삼 분의 일이나 살아남을까 걱정했는데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목표였던 대악마가 없었으니까. 미래를 생각하면 여기서 반드시 죽음의 인도자를 없앴어야만 했다.
과연 다음 기회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강자가 모여서 단번에 치고 들어갈 기회란 흔치 않았는데. 앞으로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기란 어려웠다. 지금처럼 강자들이 전선을 비우고 모이기란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배신자들 때문에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그게 타이런은 속이 쓰렸다.
“우선 복귀하도록 하지.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는 서쪽에 있소. 적어도 사흘은 움직여야 하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대 유적은 모두 공간 이동을 한 후에 파괴되었다.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려면 또 서둘러야만 했다.
작전을 시작하고 거의 일주일 만에 복귀했다. 그동안 전선은 또 한참이나 밀려있었다.
남부가 다 잡아먹힌 것은 물론이고, 동부와 중부, 서부도 훌쩍 밀려났다. 다행히 곡창지대에서 수확을 모두 끝내고 식량을 후방으로 이송할 수는 있었으나, 뒤늦게 들이닥친 악마와 언데드 군단이 농지를 죄다 짓밟고 불태웠다고 했다.
지금껏 가꾸었던 것이 모두 사라졌으니 설령 땅을 되찾는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농담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굶지는 않겠어.” 이미 죽은 사람이 많아서 줄어든 수확량으로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농담을 내뱉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뼛속까지 시렸다.
“비록 전선이 밀리긴 했지만, 적들이 아주 대단치는 않소. 흑마법사 몇몇이나 악마 몇, 아주 많은 수의 언데드가 전부지. 마리난 제국은 다시 밀어붙일 수가 있을 거요.” 제국에 탄압받은 이종족이 단체로 악마와 손을 잡아서 날뛰는 것은 물론 아주 심각한 일이었으나, 그건 이들이 알아서 하겠지. 자리를 비웠던 강자들이 돌아왔으니 마냥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대악마만 아니면 라인하르츠 공작이 다 쑤셔버릴 것 같기도 했고.
“상황이 안정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이쯤에서 빠져야겠소. 죽음의 인도자가 요정의 숲을 노리고 있다면, 그쪽을 막아야만 하오.” 그 말에 오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야지.” 마탑도, 제국도 엘프를 도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종족과 그리 친하지 않다는 것은 둘째치고, 제국의 상황이 개판이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