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6
아이반이 그리 인사하자 족장 가론이 아주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영웅이 나를 찾아왔군. 축제를 열어라!”
원시 거인이 부활해 영락한 후손들을 이끌고 북부 얼어붙은 대지를 공격하던 때, 그것을 막기 위해 엘프는 다른 세력에 도움을 요청했다. 뤼안 교단의 성전 기사단과 전투사제가 참전했고, 피의 동맹에서는 검귀 카락취와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이끄는 전투부대가, 대수림 수인 연맹에서는 야수전사들이 함께했다. 쓰린 이빨 부족의 족장 가론은 그때 대수림의 야수전사들을 이끌고 거인의 군세와 싸우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대수림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전사였으나, 맹세컨대 그런 신화적인 전투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온통 가리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대로 가장 작고 하찮은 고블린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며, 오크 주술사가 거인을 붙잡거나 세계수가 현실에 나타나 원시 거인을 그대로 짓눌러버리는 모습은 수많은 투쟁으로 가득한 전사의 삶을 전혀 새로운 색으로 덧칠하기에 충분했다. 그 놀라운 싸움에서 크게 활약한 아이반의 일행이 자신을 찾았다니 어딘가 뿌듯한 마음마저 생겼다. 위대한 영웅에게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반이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래, 대수림의 길 안내를 해달라고? 별것 아닌 일이군.”
가론은 대수림의 당도 높은 과일로 만든 술을 벌컥 마시고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의 호감으로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대수림 수인 연맹의 뜻이었다.
“대륙에 있는 엘프들이 곧 대수림 근처에 모일 텐데, 부디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소. 이쪽도 꽤 다급한 상황이라.”
“거인과 싸운 이후로 요정의 숲이 문을 닫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곳을 악마가 노리고 있다는 것도.”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아이반이 멈칫하자 가론이 별것 아니라는 듯 턱을 긁적였다.
“지혜로운 자들이 어두운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았다. 비록 우리가 숲에 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모르지는 않아.”
대수림의 이름난 주술사들이 모여서 미래를 엿보았다. 물론 확정된 미래를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수많은 갈래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일부만 흘깃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기엔 충분했다. 그 잠깐의 미래를 엿본 대가로 주술사들이 모두 자리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으나, 덕분에 행동의 방향을 정할 수가 있었다. 대수림은 지금껏 숨죽이고 있었으나, 그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제든 힘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도. 수인 연맹은 믿음직한 파트너로 엘프를 선택했다. 그들이라면 적어도 먼저 배신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에 있는 인간의 나라가 악마에게 불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 포악한 인간의 나라에 탄압받던 우리의 동족들이 슬프게도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도.”
“애석한 일이오.”
“간악한 인간의 나라를 돕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대악마가 나타난 것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니까.”
숲 한쪽 구석에 불이 붙으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바라보고만 있다가는 어느새 자신의 주변이 불타고 있을 거다.
“우리가 그대들을 돕겠다.”
족장 가론이, 나아가 대수림 수인 연맹이 그리 확언하자 일행의 표정이 크게 밝아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달리 조력을 얻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큰 힘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레인이 더없이 진중한 모습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자 족장 가론이 어색하게 웃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림은 전우의 어려움을 잊지 않는다. 엘프는 우리의 우방이 되었으니 그 우정은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다.”
대수림 수인 연맹이 본격적으로 세상의 흐름에 끼어들기를 선언하고 야수전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일행은 수인 연맹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대수림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대수림은 북에서 남으로, 냉대 기후 침엽수림에서부터 열대우림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수인 연맹이 대수림 대부분의 영역을 확보했다고는 해도 그 위험이 적지는 않았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수인 연맹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강력한 몬스터들이 많이 등장했고, 최대한 전투를 피하려고 했음에도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면서 움직여야만 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나무를 뚫고, 때로는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을 넘어서 대수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거대한 호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저곳이 바로 대수림을 먹여 살리는 숲의 바다입니다.”
과연 숲의 바다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대한 호수에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곳까지 일행을 안내한 곰 수인은 몹시 경계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의 나가들은 몹시 위험한 자들입니다. 다른 자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아요.”
곰 수인은 가론이 가려 뽑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가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을 정도면 나가들이 굉장히 흉험한 모양이었다. 물론,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뱀신 모르나의 허락이 있었으니 나가가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오.”
아이반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드래곤의 피와 가죽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죽은 소에 뿌리고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당신 차례요.”
사나운 이빨은 긴장이 되는지 선뜻 움직이지 못하다가 아이반이 한 번 더 재촉하자 무거운 걸음으로 나섰다. 스걱! 그는 델피노에게 뱀신 모르나의 문양이 새겨진 뱀소환의 단검을 받아 자신의 손을 베고 피를 뿌렸다.
“뱀신께 전사의 피를 바치니, 이 피를 받고 길을 열어주시오!”
리자드맨 특유의 언어로 쉭쉭거리며 외친 사나운 이빨이 제물을 호수에 집어 던지자 고요하던 호수에 물보라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푸와악! 숲의 바다를 가르고 거대한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 서펜트, 달리 해룡이라 부르는 영락한 용종이 나타나 한입에 제물을 꿀꺽 삼키고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곰 수인이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고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을 막으면서 아이반이 소리쳤다.
“뱀신의 손님이니 길을 열어라!”
시 서펜트는 한동안 일행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호수로 사라졌다. 뱀신 모르나의 권속이자 그녀를 지키는 성수가 뱀신의 손님임을 인정하고 물러나자 새로운 자들이 호수를 가르며 나타났다. 상반신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나, 하반신은 뱀의 그것이라 전체 몸길이가 몹시 길어서 보는 것만으로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좌우로 물결치며 움직이는 굵은 뱀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질적이었으나 아이반은 의외로 아름다움을 먼저 느꼈다. 그들의 외형은 몹시 낯설었으나,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수려했기 때문이다. 상반신은 그 어떤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매력적인 미남, 미녀의 모습이었고, 하반신 역시 반짝반짝 빛나는 비늘이 징그럽다기보다는 보석처럼 느껴졌다.
“옛이야기에서 나가는 항상 포악하고 잔인하게만 그려졌는데 실제로는 이리도 아름답군요.”
델피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저들은 본질적으로 세이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족이라 항상 상대를 유혹하는 마력을 흘린다오.”
그런 아이반의 말을 받은 것은 나가였다. 제일 아름답고, 제일 화려한 여성의 모습을 한 나가.
“상대를 유혹하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온다는 것이 우리들의 비극이지요.”
“그래, 그게 나가들이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인이지. 뱀신 모르나가 그대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그 말에 나가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그저 호의만 담은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말조심하십시오. 뱀신께서는 그대들이 쉽게 언급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니.”
“그쪽이야말로 무례를 범하지 마시오. 우리는 뱀신의 손님이니.”
“그 또한 사실이군요. 용서를 빕니다.”
나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으나 그건 뱀신의 이름 아래 예의를 표했을 뿐이다. 지금은 숙이고 있으나 언제 적대적으로 돌아설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다른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걱정할 것 없소. 이들은 뱀신의 뜻을 따르니 그녀의 뜻을 반하여 공격할 리가 없소.”
그 말에 사나운 이빨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뱀신 모르나를 모시는 전사이기에 그녀의 성정을 제법 잘 아는 그에게는 그게 더 위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뱀신 모르나는 자신의 신도조차 아무렇지 않게 잡아먹을 수가 있는 신격이었다. 지독히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자. 그녀를 모시는 자신이야 이 몸을 뜯어간다 해도 기쁘게 바칠 테니 상관이 없으나 과연 다른 동료들은 괜찮을까? ‘그때는······.’ 생각에 잠긴 사나운 이빨의 모습을 눈치챈 아이반이 그의 등을 툭 찔렀다.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리고 아이반이 턱짓하자 나가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래를 불렀다. 인간의 발음과는 다른 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첨벙거리는 물밑에서부터 무언가 떠올랐다. 물로 만들어진 투명한 나룻배였다.
“이걸 타고 가는 겁니까?”
델피노가 힐끔 아이반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의 초대를 받으면 물의 배를 타고 그들의 왕국으로 갈 수 있소. 그런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겠지만.”
그 말에 나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지난 오백 년 안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군.”
아이반이 망설임 없이 배에 올라탔다. 조금 출렁이고 물컹한 느낌은 있었지만, 물로 만들어진 배는 생각보다 단단하게 몸을 받쳐주었다. 그를 따라 일행이 배에 올랐으나 곰 수인을 포함한 야수전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나가들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뱀신께서 허락한 것은 넷이 전부입니다.”
그 말에 이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아이반이 눈치를 주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여기서 기다려야만 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여기서 머물며 기다리겠습니다.”
곰 수인은 그러면서 흘깃 나가들을 보았다. 사실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나가였다. 그들이 아니라면 위험할 것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다른 몬스터들은 이곳 근처에도 오지 않으니까. 나가들은 못마땅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러도 괜찮다는 뜻이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나가들이 배를 둘러싸고 섰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스스슥! 물로 만들어진 배는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마치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배가 기울어지더니 점차 물속으로 향했다. 마침내 배가 완전히 물속에 잠겨 호수 아래로 들어가는 순간, 위아래가 바뀌더니 물 위로 솟구치듯 배가 떠올랐다. 푸아앗! 아이반은 나가 왕국의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있는 결계를 넘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호수 깊은 곳이 아니라 숨겨진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도 달랐다. 바깥이 이제 초겨울을 맞이해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면, 이곳은 다시 봄이 온 것처럼 무척이나 따뜻했다. 투명할 정도로 물이 맑은 호수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가 보였다.
“여기가 나가들의 왕국이라고?”
아이반을 포함해 이레인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까지 죄다 감탄하듯 입을 벌렸다. 햇빛이 호수에 닿아 반짝이는 것이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모두가 어둡고 음습하고 축축한 곳이라고 여겼던 나가들의 왕국은 대륙 그 어디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아름다운 곳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나가들의 도시, 뱀신의 제단을 떠올리고 있던 사나운 이빨은 특히나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 황폐하고 축축하던 곳은 정말로 세월의 흐름에 삼켜진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탁! 물로 된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그리고 아이반이 뭍에 한 발을 내디딘 순간, 초월적인 존재가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훈풍 속에서 서늘한 감각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이 뱀의 입속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뱀신 모르나가 기다린다.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초월자, 천상으로 떠나지 않은 신격이.
대수림에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면 숲의 바다에 나가 왕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나가 왕국의 존재를 아는 자 중에서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나가들은 특히 폐쇄적이며, 무척이나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영역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극히 꺼렸다.
나가의 초대를 받아 정식으로 왕국을 방문한 자들은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고, 무단으로 왕국에 침입한 자 중에서 살아 돌아간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던 나가 왕국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투명한 호수와 건물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 무척이나 조화로워 보였고, 계단이 전혀 없는 나가 특유의 건축양식은 아주 신선했다.
대륙 이곳저곳, 심지어 요정의 숲과 드워프의 왕국, 마경에 이르기까지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닌 일행들 눈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가들이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마음이 초조해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실시간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남부 제국 마리난은 영토의 절반을 날렸고, 요정의 숲은 대악마의 공격을 견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 편히 관광이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레인은 지금도 계속해서 세계수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응답이 없고, 때때로 머나먼 곳에서 둔통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게 요정의 숲이 공격받고 있다는 뜻임을 알기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레인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뻐끔 연기를 뱉어대는 사이, 아이반은 사나운 이빨을 보았다. 내색하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무척이나 심란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가 왕국에 가득한 뱀신 모르나의 존재감은 사나운 이빨이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신앙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뱀신의 전사가 아닌가.
리자드맨들이 그토록 불렀음에도 수백 년이나 답이 없던 뱀신 모르나를 이제 만나러 간다. 그게 무슨 기분일지 솔직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분께서 당신들을 찾으십니다.”
꽤 고급스러운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나가가 나타나 그리 말했다. 처음에 일행을 나가 왕국으로 안내했던 자였다. 처음 등장할 때도 범상치 않았으나 왕궁에서도 다른 나가들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귀한 신분인 것 같았다.
“뱀무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묻자 주변 나가들이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것까지 알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뱀무녀 안데리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사나운 이빨이 움찔 놀랐다.
“뱀무녀라고? 그대가?”
“그렇습니다. 뱀신께 축복을 받은 전사여.”
오랜 세월 뱀신 모르나의 응답을 받지 못한 리자드맨 사회에서는 이미 신앙의 많은 부분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려졌으나, 뱀무녀가 뱀신 모르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름도 모를 지방 신전의 일개 성기사가 갑자기 교단의 성녀를 만난 셈이다.
물론 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성녀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사나운 이빨도 일개 성기사로 격하될 자는 아니었고. 사나운 이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아이반이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뱀무녀가 길잡이라······.’ 제정일치 사회인 나가 왕국에서 뱀무녀는 신에게 선택을 받은 성녀이자 공주였다. 언제든 나가여왕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후계자. 나가 왕국의 서열 2위가 직접 나타나 맞이했으니 그들이 가진 감정이야 어쨌든 제법 대접을 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뱀신 모르나는 아닌 척하면서 일행을 꽤 반기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엘프를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싸늘하게 말하더니 언제쯤 도착하나 목을 쭉 빼고 기다린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뱀신 모르나는 무척이나 감정적인 신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초에 최초의 일곱 요정이 남긴 힘과 감정의 부스러기에서 탄생한 자였다.
세계수와 함께하지 못하고 배제된 것을 버림받았다고 여겼기에 세계수와 엘프를 미워했으나, 본질은 일곱 요정이었기에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그야말로 애증이었다.
함께하고 싶었으나 함께하지 못한, 그렇기에 미우면서도 그리운 것.
“이쪽으로 쭉 내려가시면 됩니다.”
나가의 왕궁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군데군데 금과 은으로 장식해 몹시 우아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나가들은 무척이나 폐쇄적인 종족이었지만 동시에 미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
스스로 치장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 능했다. 그런 아름다움을 다른 종족들은 볼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나가족 특유의 건축양식대로 천장이 무척이나 높고 계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계단 대신 완만하고 넓은 경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그들의 신체적 조건 때문이리라.
접견은 왕궁의 지하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은 뱀의 성소라 불리는, 나가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