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8
“이정도면 괜찮겠군.”
아이반이 결계를 꼼꼼히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레인은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뱀신 모르나는 결코 선한 신격이 아니야. 위대한 어버이들이 세계수에서 배제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렇게 쉽게 육신을 돌려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
“대악마의 핵을 가져오기가 어찌 쉽다는 말이오?”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닌 걸 알잖아.”
일곱 요정이 끊어낸 욕망과 어둠이 뱀신 모르나의 근원이었다. 그녀가 새로이 육신을 만들어 나타난다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세계수의 적을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악마의 핵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게 세계수의 적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라면 곤란했다. 그런 이레인의 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 거요. 최악의 상황보다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이레인이 눈빛으로 되묻자 아이반이 차분히 설명했다.
“뱀신 모르나는 비록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신이지만 세계수를 노리거나 엘프를 공격할 마음은 없소. 그녀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분노했지만, 동시에 일곱 요정의 일부이기에 엘프와 세계수를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그건 섣부른 판단이야. 필멸자가 신격의 정신을 어떻게 다 파악하겠어?”
“옳은 지적이군. 그러면 다른 이유는 어떻소?”
원래 정해진 미래에서 세계수는 파멸을 맞이한다. 수많은 엘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불타고 쓰러져 사라진다. 그러나 그다음은 어떨까? 세계수가 불타고 요정의 숲에서 쫓겨난 엘프가 할 일은? 그 질문에 이레인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새로이 세계수를 심고 가꾸겠지. 이 땅 어딘가에.”
이미 세계수가 스스로 멸망을 예언했는데 엘프가 그동안 멍청히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멸망의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그리고 세계수가 불타고 난 다음의 일도 준비했다. 이 대륙 곳곳에 위치한 비경에는 소수의 엘프가 파견되어 있고, 최악의 경우 그곳으로 세계수를 새롭게 심을 예정이었다. 비록 수많은 엘프가 죽어서 아주 약하고 초라한 묘목이겠지만, 그렇게 시간을 들여 가꾸다 보면 언젠가 세계수가 부활할 테니까. 엘프의 집합의식이 종족신으로 승화된 것이 세계수였다. 엘프만 남아있다면 세계수의 씨앗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그럴 것이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겠지.”
엘프가 세계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을 때는 감정의 흔들림이 지극히 작았다. 개인의 감정이 아무리 격렬하다고 해도 세계수 네트워크에 옅게 퍼지면 대단치 않으니까. 그러나 반면에 세계수 네트워크에서 떨어진 엘프는 무척이나 감정적으로 변했다. 여럿이 나눠서 감당하던 감정의 흐름을 홀로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수는 엘프에게 가족이자 친구, 연인이자 본인이었다. 세계수와 강제로 떨어지는 상실감은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보다 격렬했다. 만약 세계수가 무너진다면 감정이 폭발한 엘프들은 미쳐 날뛰게 된다. 세계수의 재건과 종족의 보존이라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자기 파멸을 감수하고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세계수가 파멸하고 살아남은 엘프 중에서 적어도 오분의 일이 그렇게 변한다. 그 들끓는 분노와 폭력적인 복수심이 너무나 대단하기에 새로 만든 세계수 네트워크에 받아들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칫하면 정신 연결을 통해 모든 엘프가 그 폭력적인 감정에 물들 테니까.
“복수심에 불타는 엘프 광전사들은 자신들을 어둠에 물든 요정, 다크 엘프라 지칭하고 따로 세계수를 만들 것이오. 그리고 그 세계수의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뱀신 모르나라고?”
“일곱 요정이 남긴 숨겨진 후계자, 이 땅에 남은 위대한 신격이자 초월자. 새로운 세계수로 꽤 그럴듯하지 않소?”
뱀신 모르나는 검은 세계수가 된다. 그게 원래의 역사였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그녀가 육신을 되찾고 뱀신의 신격을 공고히 하는 것이 엘프들에게는 더욱 좋을 거요.”
“···그렇군.”
이야기를 끝낸 아이반은 결계를 해체하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끼리릭!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역사가 변하는 소리다.
오백의 나가 전사가 무장을 갖추고 길을 나섰다. 수가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하나하나가 숙련된 전사이자 사냥꾼이었고, 주술사였다. 나가는 모두가 뱀신 모르나의 신격을 나눠 가진 자들이니 오백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전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자는 뱀무녀 안데리나였다. 나가 왕국의 공주이자 후계자, 뱀신 모르나의 곁에서 그녀를 모시는 성녀. 뱀무녀가 따라왔다는 말은 뱀신 모르나가 그녀의 눈을 통해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신이 함께하니 나가 전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대수림 깊은 곳에서 살던 나가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의미가 있었다. 대수림의 다른 종족들이 그들을 크게 경계하는 듯했으나 나가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무시했다.
“재수 없는 놈들이야.”
쓰린 이빨 부족의 족장 가론이 흘깃 나가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강자를 숭상하는 그조차 나가에게는 진저리를 쳤다. 같은 대수림 출신이지만 나가와 수인 연맹이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가가 무척이나 뻣뻣한 자세인 이유가 컸다. 신격을 가까이에서 모시다 못해 아예 자신들의 몸에 품고 있는 나가는 선민사상이 아주 강했다. 스스로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웬만한 종족은 발아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가 왕국이 생각하는 수인 연맹은 미개한 짐승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수인 연맹이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나가들에게는 그저 천하게만 보였다. 당장 아이반과 이레인, 델피노만 하더라도 뱀신 모르나의 손님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거다. 뱀신 모르나의 전사인 사나운 이빨은 예외겠지만.
“이렇게 많은 병력을 지원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은혜는 세계수의 이름으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레인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수인 연맹이 무려 일만의 야수전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키릴이었다. 대수림 수인 연맹을 만든 대족장의 친구이자 그에게 최초로 복속한 족장, 침묵하는 분노 키릴.
“···평화를 위한 싸움, 그것이 대수림의 뜻이다.”
키릴은 대수림 수인 연맹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딱히 힘을 뽐내지는 않았으나 덩치가 크고 근육이 가득해서 절로 위압감을 풍겼다. 곰 수인인 그는 인간의 형상으로도 키가 2m를 훌쩍 넘겼는데, 만약 곰의 모습으로 변한다면 아마 사나운 이빨보다도 덩치가 크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자그마한 책을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자그마한 책이라는 것은 그의 덩치에 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크기가 작다는 뜻이었다. 이레인의 손바닥으로 거뜬히 숨기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포켓북이라 불러야하겠지. 그 커다란 덩치로 조그마한 책을 넘기며 읽는 꼴이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으나, 책 내용에 크게 심취한 듯 때때로 그것을 꺼내 펼쳐서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집어넣고는 했다.
“시집입니다. 로만 왕국의 방랑 기사가 사랑과 자연에 대해 읊은 것이죠. 저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키릴이 무엇을 읽는지 궁금해진 델피노가 곁에서 힐끔 살펴보고는 아이반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키릴은 제법 문학 감수성이 풍부한 자인 것 같았다.
“놀랍군. 대수림에서도 시집을 구해서 읽을 정도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땅에서 한 권의 시집도 읽은 적이 없소.”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삶이 계속되었으니 어쩌겠냐만 아이반은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펜 대신 무기를 들고, 잉크 대신 피를 묻히는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그도 한때는 나름 문학청년이었거늘. 야간 경계 근무를 하면 떨어지는 잎과 흔들리는 바람에도 시상이 떠오르곤 했다. 대개 씨부럴 전역 언제냐, 집에 빨리 가고 싶다로 끝나는 낙서였지만. 옛 기억은 이미 많이 흐려졌는데, 때때로 이런 쓸데없는 기억만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를 괴롭혔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알았는데. ‘더러운 악마 새끼들.’ 괜히 투지가 불타올랐다. 속에 쌓인 울분을 받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어쨌든 아이반은 그들을 데리고 서둘러 대수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리 약속되어있던 장소로 향했다. 나가족 최정예 전사들이 오백, 대수림 수인 연맹의 야수전사와 주술사가 일만이었다. 거기에 얼어붙은 대지의 프로스트 엘프와 그들을 돕고 있던 요정군단, 세상을 떠돌며 임무를 수행하던 고행자 엘프들이 일만이었다. 예상치 못한 원군이 또 있었다.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드워프 중갑병 삼천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다.
“설마 이리 달려올 줄은 몰랐소.”
아이반이 깜짝 놀라서 그리 말하자 왕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어깨에 턱 걸치고는 껄껄 웃었다.
“엘프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함께한 오랜 동맹이다. 저번에는 왕국의 사정으로 돕지 못하였으나, 어찌 두 번 외면할 수 있겠나?”
그러면서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또한, 나의 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달려와야지.”
탁!
“고맙소.”
아이반이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했다. 일반인이라면 왕자 브릭타의 억센 손아귀에 눌려 손이 으스러질 정도였으나, 아이반은 그것이 그저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그나저나 파라스가 보이지 않는데, 그는······.”
대개 씨부럴 전역 언제냐, 집에 빨리 가고 싶다로 끝나는 낙서였지만. 옛 기억은 이미 많이 흐려졌는데, 때때로 이런 쓸데없는 기억만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를 괴롭혔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알았는데. ‘더러운 악마 새끼들.’ 괜히 투지가 불타올랐다. 속에 쌓인 울분을 받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어쨌든 아이반은 그들을 데리고 서둘러 대수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리 약속되어있던 장소로 향했다. 나가족 최정예 전사들이 오백, 대수림 수인 연맹의 야수전사와 주술사가 일만이었다. 거기에 얼어붙은 대지의 프로스트 엘프와 그들을 돕고 있던 요정군단, 세상을 떠돌며 임무를 수행하던 고행자 엘프들이 일만이었다. 예상치 못한 원군이 또 있었다.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드워프 중갑병 삼천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다.
“설마 이리 달려올 줄은 몰랐소.”
아이반이 깜짝 놀라서 그리 말하자 왕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어깨에 턱 걸치고는 껄껄 웃었다.
“엘프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함께한 오랜 동맹이다. 저번에는 왕국의 사정으로 돕지 못하였으나, 어찌 두 번 외면할 수 있겠나?”
그러면서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또한, 나의 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달려와야지.”
탁!
“고맙소.”
아이반이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했다. 일반인이라면 왕자 브릭타의 억센 손아귀에 눌려 손이 으스러질 정도였으나, 아이반은 그것이 그저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그나저나 파라스가 보이지 않는데, 그는······.”
혹시 사망한 것은 아닐까 말끝을 흐리는 브릭타에게 델피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는 난쟁이를 만나고 그의 기술을 배우겠다며 남았습니다.”
“뭐? 허, 그토록 찾아 헤매더니 결국 찾았군! 난쟁이가 정말 있었다니······.”
브릭타도 난쟁이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비록 노르드의 전설이라고는 해도 신들조차 감탄했다는 대장장이의 이야기를 모를 리가 있겠나. 그러나 그는 이 땅에 난쟁이가 있으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모두와 같이. 파라스의 기행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그저 대를 이어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난쟁이를 찾았다니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긴, 우리는 대악마와 싸우러 가는데 난쟁이로 놀라긴 좀 그렇군.”
그렇게 모일 사람이 다 모이고 나니 나가, 수인, 엘프, 드워프가 합쳐서 모두 이만삼천오백. 하나하나가 평범한 인간 병사 몇 명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이는 숫자보다도 훨씬 대단한 군세였다. 능히 일국을 도모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세계수와 대악마의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라면 전황을 바꾸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이반은 서둘러 요정의 숲으로 넘어가고자 했으나, 브릭타가 그를 붙잡았다. 한마디 하라는 것이다.
“나보고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대륙의 평화와 엘프의 구원을 위해 모였으나, 이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자네뿐이야! 연설은 사기를 높이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란 말이지!”
아이반은 원시 거인을 상대로 맞서 싸웠고, 불타는 산에서 부활한 드래곤을 무찔렀다. 공으로 따지자면 그보다 더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가 진심으로 감탄한 자는 아이반만이 유일했다. 나가 왕국의 뱀무녀 안데리나, 수인 연맹의 침묵하는 분노 키릴, 드워프 왕국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 요정군단의 지휘관 필레인 그레이우드, 프로스트 엘프의 수장 발티무어 이리딘. 하나같이 쟁쟁한 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만삼천오백의 군세. 단상이 없었기에 아이반의 눈에는 전체 모습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많다고만 느꼈다. 아이반은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래서 그것을 긁어내듯 소리쳤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기를 올리라고 했더니 떨어뜨릴 생각인가. 브릭타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아이반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알아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사랑하고, 노력한다! 죽음은 우리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삶을 더럽힐 수도 없다!”
제각각 감정을 품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하면서 아이반이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우리는 죽음에 지지 않는다. 오늘은, 더욱 아니다.”
그러고 아이반이 돌아서니 병사들의 함성이 들렸다. 그게 연설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짧게 끝내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브릭타가 씨익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이반은 괜히 민망해서 그를 외면하며 말했다.
“제기랄, 연설 두 번 했다가는 적에게 죽기 전에 쪽팔려 죽을 것 같군. 이제 바로 출발하겠소.”
아이반이 징표를 꺼내 들었다. 일곱 요정이 남긴 사념체이기에 요정의 숲에 당당히 오갈 수 있는 자, 뱀신 모르나가 건네준 통행권. 나뭇잎을 물고 있는 뱀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다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면서 똬리를 틀더니 점차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뱀이 최대로 커졌을 때, 이만삼천오백의 군세를 품고 빛을 뿜었다. 화아아- 강한 빛이 한차례 휩쓸고 난 뒤, 그 모두는 전혀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시사철 훈훈한 바람이 불고, 은은한 꽃향기와 그 위로 자유롭게 노니는 정령들이 가득한 곳. 그런 요정의 숲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시커멓게 변한 토양과 비쩍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정령들이었다.
“여기가 요정의 숲이라고? 너무 처참한데······.”
브릭타가 그리 중얼거릴 때 엘프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머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저 멀리 세계수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나 푸르던 세계수의 가지가 노랗게 말라 있었다. 병이 든 것처럼 여기저기 시들고 부러졌다.
“세계수가 저리 크게 손상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아직 꺾이거나 불타지는 않았소. 그렇다면 상황이 아주 최악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델피노와 아이반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은 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표정은 더없이 무표정했다. 아이반의 영안에 그녀가 세계수와 이어져 있음이 보였다. 오랜 세월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고 고행자로 살아가던 이레인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해. 근처에 적이 있어.”
이레인의 말은 더없이 이성적이었다. 오랜만에 요정의 숲으로 돌아와 본 풍경이 이 모양이니 충격적이겠지만 슬픔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온갖 정보가 전해지는 중이었다.
“늦었소. 적이 빠르군.”
스걱! 아이반이 창을 아래로 내리찍으니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던 투명한 눈알이 그대로 찢겨 사라졌다. 어떻게 움직이든 무조건 명중하는 궁니르의 힘이었다. 사사삿! 메마른 숲의 낙엽이 잘게 부서졌다. 푸석한 바람이 불고 바닥을 쿵쿵 울리는 충격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수인들은 그 예민한 후각으로 썩은 내를 맡았다. 대지의 후손인 드워프는 바닥의 진동을 통해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자가 이끄는 수많은 군세가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죽음에 지지 않는다!”
쿵!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러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저 앞에 거대한 흙거인이 땅에서 솟아나 주먹을 휘둘렀다. 쾅! 어둠의 장막이 찢어지고 수십 미터를 훌쩍 넘기는 크기의 뼈거인이 흙거인의 주먹을 막았다. 그 충격파에 휩쓸린 나무가 몇이나 바닥에 누웠으나 사나운 이빨은 오히려 그것을 뚫고 앞으로 달려갔다.
“뱀신께서 지켜보신다!”
용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전쟁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