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9
침묵하는 분노 키릴이 주먹을 휘둘러 좀비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가 앞서 달리자 야수전사들이 각자 동물의 모습을 이끌어내 뼈를 부수고 썩은 살점을 갈라버렸다.
대수림에서 단련된 야수전사들의 몸놀림은 무척이나 빠르고 강력했다. 바람처럼 적을 파고들어 그대로 목을 따고 넘어갔다.
드워프 중장병은 대열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큼지막한 살점 골렘과 듀라한이 방패를 후려쳤으나, 오히려 녀석들이 뒤로 밀려났다.
충격 반사, 드워프 군대의 제식 장비가 평범할 리가 없었다.
“시체 놈들에게 힘으로 밀릴 수는 없지!”
드워프는 키가 작아도 전신에 근육이 옹골차게 붙어있어서 힘이 좋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호하는 무기도 망치, 도끼, 할버드, 메이스 같은 중병기였다. 그것이 휘둘러질 때마다 언데드가 짓뭉개졌다.
방패로 막고, 중병기로 으깨버린다. 방식은 단순하지만, 이성이 없는 언데드를 상대하기에는 훨씬 편했다.
나가 전사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사이자 주술사였다. 그들은 스스로 축복을 걸고 언데드를 밀어냈다.
때때로 불길이 토해지고 번개가 내리쳤다. 날카로운 바람과 시린 냉기가 뿜어졌다.
언데드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빛이여, 이곳의 어둠을 비추소서!”
델피노가 그의 지팡이, 생명의 한 조각을 바닥에 박아 넣고 기도를 올렸다. 하늘이 열리고 신성한 빛이 내려와 언데드에게 내리쬐자 재가 되어 흩어졌다.
화아아- 저 멀리서 도마뱀을 닮은 악마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불꽃을 내뱉었다. 악마의 힘이 가득 담겨진 검붉은 화염이 델피노를 노리고 쏘아졌다.
피우웅! 그 화염을 꿰뚫은 것이 이레인의 화살이었다. 악마가 내뱉은 화염을 요격하듯 꿰뚫어 흩어버리고는 재차 쏘아진 화살이 역으로 녀석을 노렸다.
악마는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화살에 맺혀있던 정령의 힘이 폭발을 일으켜 녀석의 날개를 날려버리고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끊임없이 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이 마치 폭격처럼 쏟아졌다.
악마는 추락하는 사이 네 발의 화살을 더 맞고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요정군단, 프로스트 엘프는 일전에 실력을 보았으니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레인 곁에 있는 엘프들의 실력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여기저기 흉터가 가득한 장비를 입은 그들은 지극히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단순히 잘 훈련된 것 이상으로 실전 경험이 많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들이 고행자였다. 스스로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고 숲을 벗어나 종족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자들. 그들 대부분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서 성격이 비틀린 경우가 많았으나, 그런 상태에서도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자들이었다. 콰광! 언데드 무리가 빠르게 무너진다. 그러나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적을 노려보았다.
‘간을 보는군.’ 이리도 쉬웠다면 처음부터 요정의 숲이 위험할 리가 없었다. 이미 옛날 옛적에 악마를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았겠지. 세계수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요정의 숲이 이리 무너졌다는 말은 적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이들은 정찰대에 불과했다. 새롭게 나타난 자들이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 확인하기 위한 버림 말. 아무리 봐도 일만은 가볍게 넘겠는데, 이것을 가볍게 버릴 수 있다니. 아군의 활약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대로 끝인가? 아니면 잡아먹으려고 할까?’ 창을 휘둘러 죽음의 기사를 베어내고 아이반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어둠이 몰려온다. 적이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스스슥- 어두운 안개가 빠르게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평범한 안개가 아니라 악령들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끼이이에엑! 짐승의 신음 같은 비명이 들린다.
악령이 내뿜는 저주에 휘말린 안타까운 영혼들이 괴로워하는 소리도 들렸다. 악령의 커튼 너머로 더욱 강한 적들이 오고 있었다.
좀비 드레이크가 하늘을 날고 뼈만 남은 와이번이 날갯짓을 했다. 몇몇 죽음의 기사는 무척이나 섬뜩한 기세를 풍기는 것이 척 보기에도 달인의 경지였고, 온갖 역겨운 외형을 한 악마들 역시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악한 자들아! 무덤으로 돌아가라!”
수십 미터가 훌쩍 넘는 뼈 거인을 으깨버린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그러자 땅이 솟아오르며 마치 해일처럼 적진으로 밀려갔다. 파도에 삼켜지듯 땅이 적들을 덮쳤다.
수많은 적들이 그대로 매장되어 흙에 덮였다. 브릭타는 갈라로자의 권능으로 녀석들을 땅속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 짓눌러버렸다.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가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다시 시체가 되어 거대한 흙무덤에 갇혔다. 그러나 그 흙무덤을 뚫고 덤벼드는 놈들이 있었다.
아이반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죽음의 기사와 악마들, 물리력을 무시하는 악령의 군세. 끼야아아악! 귀를 찌르는 비명과 함께 땅에서 솟아나는 악령들을 바라보며 엘프들이 일제히 정령을 소환했다. 자신들의 땅을 이리 어지럽힌 적들을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항상 해맑던 정령들이 지금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악령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힘을 뿜어냈다.
요정의 숲은 정령계와 가까워서 정령의 힘도 한층 강했다. 순수한 정령의 힘이 악령들을 찍어 눌렀다.
악령의 저주와 정신 공격으로 괴로워하던 야수전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언데드의 몸을 찢어버렸다. – 하하하하! 죽음의 세례를 받아라! 온몸에 뼈로 된 갑옷을 입고 지옥불로 타오르는 악마가 그리 외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드워프 중장병들이 방패를 세웠으나, 충격 반사는커녕 원소 저항마저 무시하고 그들의 몸을 불태웠다.
“으아악!”
드워프 중장병들이 한마디 비명과 함께 시커멓게 변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곧 지옥불 같은 안광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마의 마력으로 언데드로 변한 것이다.
화가 난 브릭타가 갈라로자를 휘둘러 녀석을 후려쳤다. 뼈 갑옷이 그대로 부서지고 지옥불이 터져나가며 녀석이 사라졌다. 그러나 곧 다른 곳에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지옥불의 영혼······. 쾅! 또다시 녀석의 몸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브릭타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래, 지옥불이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
지옥불 악마가 기함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갈라로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는 새로 합류한 악마들까지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이반 역시 바쁘게 움직이며 적을 쓰러뜨렸다. 저주의 냉기를 흩뿌리며 다가오는 악령의 목을 틀어쥐고 로키의 불꽃으로 불태우고, 궁니르의 권능을 머금은 창을 휘둘러 멀리서 화살을 쏘아내고 있는 뼈다귀 궁수들의 사령핵을 파괴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썩은 살점 골렘을 꿰뚫고, 거인 좀비의 다리를 베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앞을 막아서는 듀라한을 쪼개고 죽음의 기사를 맞이했다.
“···어딘가 익숙한데.”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죽음의 기사를 보았다. 묘하게 익숙한 기세였다.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탁! 아이반이 가볍게 내지른 창이 죽음의 기사의 검에 가로막혔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성이 없는 대다수의 언데드와 달리 죽음의 기사는 비록 영혼이 어둠에 물들어 제정신이 아닐지언정 한 가닥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생전에 몸에 새겨진 검술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이다. 아이반은 창을 비틀어 검을 흘려내고 재차 휘둘렀다.
죽음의 기사가 그에 대응하려 검을 움직였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창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드시 명중하는 궁니르의 권능. 방향에 상관없이 공간을 넘어 덮치는 공격을 막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걱! 죽음의 기사가 뒤집어쓰고 있던 투구가 벗겨졌다. 목을 날리려고 했는데 창이 닿는 순간 반응해서 피한 모양이다.
반쯤 잘린 목에서 썩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쪼개진 투구 너머로 얼굴이 보였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지만 아이반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움베르토 코넬, 마리난 제국 남부 마경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 도시 코넬의 주인. 그가 요새 도시 코넬을 지키다 죽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깊은 인연은 아니었으나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아이반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쓰레기 같은 악마 놈, 개 같은 사령술사.”
하여간 시체를 주물럭거리면서 무기로 써먹는 녀석들은 상종할 가치가 없었다. 인륜과 도덕, 정의와는 살면서 스쳐본 적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아마 저 녀석들은 자기 동생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복수를 다짐하는 친구에게 네 동생 죽었는데 내가 좀 쓰면 안 되겠냐고 물어볼 인성 터진 놈들이었다. 그러니 악마겠지. 그러니 악마를 따르는 놈들이겠지. 꽈악! 아이반은 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다. 다시금 휘둘러진 창이 움베르토 코넬을 베어냈다.
한때 그런 이름이었던 죽음의 기사가 쓰러졌다. 퉤! 씁쓸한 마음을 한가득 모아서 바닥에 뱉어냈다.
그 더러운 기분을 뱉어내고 차분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적을 쓰러뜨린다.
아군을 보호하고 악마의 목을 벤다. 어느새 아이반은 브릭타 옆에 도착했다.
브릭타는 막 세 번째 악마의 두개골을 으깨버린 상태였다. 자신이 지옥불의 영혼이라 죽지 않는다던 악마 녀석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계속된 망치질로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자식들이 우리를 얕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언제까지 이딴 녀석들을 내보낼 생각이지?”
브릭타가 갈라로자를 어깨에 걸치고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대악마가 아니라면 아군을 막을 수가 없으리라 여겼다.
“글쎄, 어쩌면 힘을 빼보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 점차 공세가 강해지고 있으니 헛된 일도 아니고.”
이런 공세가 계속되면 아군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체력 싸움으로 가면 언데드를 이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질질 끌 것 같지는 않은데······.’ 이들은 설마 대도시 스트라븐을 네크로폴리스로 만들어 십만의 언데드를 쥐어짜서 통째로 함정으로 만들었음에도 빠져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완전히 폐쇄되어있는 요정의 숲에 이만삼천오백의 병력이 새롭게 나타날 줄은 더욱 몰랐을 것이다. 제국 마리난의 전력을 붙잡아두겠다는 방책은 실패했다.
요정의 숲을 집어삼킬 계획도 흐트러졌다. 그렇다면 이제 대악마가 무엇을 선택할까? 그때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온몸이 털이 위로 솟고 긴장감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언데드와 악마를 베어내고 있던 아군들이 움찔 몸을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저 멀리 죽음의 악마가 보인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듯 섬뜩한 어둠이 이곳을 바라보았다.
– 필멸자야, 죽음을 거부하지 말라. 사사삿! 천지를 울리는 정신파에 담긴 말에 야수전사들의 눈이 풀리고 스스로 목을 조였다.
드워프 중갑병이 방패와 무기를 집어 던지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죽음이 다가온다.
위대한 죽음의 명령에 스스로 안겨들었다.
“모두 정신 차려라!”
쿵!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로 땅을 후려치자 대지의 기운이 가득 담긴 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내뱉는 말에 담긴 힘을 흩어버리자 스스로 가슴을 가르고 머리를 내려 찧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죽음의 인도자, 이번에는 이길 수가 있을까?’ 아이반이 마른 침을 삼키며 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몸을 움츠렸다가 단번에 튕겨 나가려 했을 때, 이레인이 다가와 그를 붙잡았다.
“지금은 아니야.”
“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아이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저 멀리서 세계수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숲처럼 상쾌한 초록색 기운이 번지고 죽음의 인도자를 밀어낸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죽음으로 바꿀 듯 거세게 타오르던 죽음의 인도자의 기운이 초록색 기운이 만든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죽음의 인도자는 가만히 세계수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대악마가 사라지자 언데드와 악마들도 후퇴를 시작했다. 첫 번째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세계수의 힘이 대악마를 몰아내고, 아이반은 지원군을 이끌고 엘프와 합류할 수가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군.’ 아이반이 느끼기에 요정의 숲은 원래도 활기가 가득한 곳은 아니었다. 물론 숲은 아름다웠으나 엘프의 특성이 그러했다. 그들은 세계수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굳이 입을 열어서 소통할 필요가 없었기에 백만이 살아도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또한 겉으로 보이는 감정은 옅고 이성이 강해서 기계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서늘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으나 그들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나 우울하여 당당히 걷고 있던 야수전사들조차 주변을 살피게 했다.
“전쟁이 이토록 무섭군.”
요정의 숲에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껏 개방되어 있던 곳에 성벽이 세워졌다. 깊은 해자가 생기고 함정이 만들어졌다. 도시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던 숲은 벌채되고, 시들고, 꺾이고, 불타서 사라졌다. 검은 재가 발에 밟혔다. 썩은 핏물과 살점, 시취가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도 격렬하게 싸웠음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성벽 보수작업을 하던 엘프들이 힐끔 그들을 보았다. 요정의 숲에 이리도 다양한 종족이 방문한 경우는 이전에 없었으리라.
“···아이반.”
이레인이 낮게 부르자 아이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레인의 얼굴은 엘프 특유의 무기질적인 표정이었으나, 그 속에서 짙은 근심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오랜만에 세계수와 이어졌기에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이질감이 느껴져.”
“이질감?”
“우리가 더는 예전과 같은 우리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반이 힐끗 뒤를 보니 그를 따라온 엘프 군단과 고행자들 역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프로스트 엘프야 원래 세계수에 의존하던 것이 좀 덜하기는 했으니까. 이레인의 말을 곱씹으면서 걷고 있는데, 엘레나 이븐우드가 나타나 그들을 반겼다. 세계수의 무녀, 시아린 이븐우드의 동생.
“가장 어려운 때에 도움을 이끌고 오셨군요.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얼굴은 변화가 전혀 없이 무표정했으나, 아이반은 엘레나 이븐우드의 눈빛 깊은 곳에서 옅은 놀라움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요정의 숲이 폐쇄되어 있는데 설마 그것을 무시하고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몰랐겠지. 다양한 종족들의 지원군을 이끌고 올 줄은 더욱 몰랐겠지.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엘프는 세계수를 통해 서로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지. 하지만 지금 당신을 보니 이제 그것이 완전하지 않은 모양이오.”
원래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레인과 프로스트 엘프, 요정군단, 고행자들이 요정의 숲으로 돌아와 세계수와 연결된 순간 그녀는 알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게 놀라워하는 것은 그 연결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이 살아나고 통합된 이성이 약해진 것을 보니 세계수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야 이레인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세계수 네트워크가 매끄럽지 못하군.”
“대악마의 짓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가 되는 것을 방해받고 있습니다.”
“정신파라도 내뿜어서 연결을 방해하는 것이오?”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공격입니다.”
대악마는 타락한 엘프의 영혼을 이용해 세계수 네트워크를 오염시키려 하고 있었다. 녀석은 엘프를 생포해서 사악한 마력으로 영혼을 물들이고, 정신 조작과 세뇌를 거쳐서 세계수 네트워크에 슬쩍 밀어 넣는다고 했다. 예전 북부 얼어붙은 땅에서 얼음 악령 웬디고로 엘프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세계수 네트워크를 뒤흔든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악마의 손길은 아주 은밀하면서도 치밀했습니다. 그들은 납치한 고행자의 영혼을 타락시켜 요정의 숲으로 가는 문을 열고 세계수를 공격했습니다.”
숲을 떠나 세계를 떠도는 고행자들이 죽고 다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부가 흑마법사와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줄은 몰랐다. 그저 임무 중 사망, 실종이라 여겼으나 악마에게 납치당해 영혼이 뒤틀린 것이라니. 고행자는 무척이나 고결한 정신을 가졌지만 동시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뎌야만 했다. 악마가 그 틈을 파고들어 정신을 주무른 모양이다. 물론 지독한 고문이 있었겠지.
“빛이여······.”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델피노가 무심코 성호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구마사제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구마사제는 온갖 고문에 대한 내성을 길렀지만, 가장 우수한 자조차 한순간에 타락시킬 수 있는 것이 악마의 간교함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정신을 가졌어도 잠깐의 방심과 흔들림으로 악마에게 타락할 수가 있었다. 델피노는 수많은 선배와 후배들이 그렇게 어둠에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이유로 현재 정신 연결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웠고, 우리가 나로 변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오염에 대비해 방화벽을 세운 것이 잘못은 아니었으나, 그리하면서 세계수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세계수는 엘프의 집합의식에서 탄생한 초월자이자 종족신이며, 엘프의 정신 연결이 완전하지 않으면 제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깊이 고민하던 아이반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상황이 좋지 않군.”
엘프가 그리 쉽게 타락할 리가 없었다. 세계수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았고, 그에 대한 대비가 없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은 요정의 숲, 세계수라는 신격이 머무는 성지였다. 그런 곳에 침입하고도 멀쩡하다는 말인가.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는 무척이나 강한 적이었다. 그는 분명히 초월자이며, 죽음을 다루는 마계의 신격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세계수와 대적할 수 있을까? 그것도 세계수의 앞마당에서. 세계수가 아무리 약점이 뚜렷하다고 해도 신격인데, 그리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을 텐데. 모두 어렴풋이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역시 대악마가 하나가 아니었어.”
마리난 제국의 남부를 다 휩쓸었다. 그동안 뿌린 피와 죽음이 얼마인가? 제물은 넘쳐났다. 이미 차원 방벽이 흔들린 상태이니 어렵지도 않겠지. 대도시 스트라븐, 네크로폴리스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까 그저 함정을 만들기 위해 네크로폴리스를 만든 것은 아니었단 소리다. 마리난 제국의 마법사들과 성황청의 사제들이 또 다른 대악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마 소환과 동시에 대륙에서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대악마의 기운이 겹친 상태에서 그대로 요정의 숲으로 넘어왔으니 그럴만했다.
“우려하던 일이군.”
왕자 브릭타가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악마로 끝날 사태가 아닌 모양이야.”
원래 악마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놈들이었다. 동급의 악마가 힘을 합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 상급의 악마가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대악마 둘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나? 당연히 그 위에 지시를 내리고 있는 놈이 있다는 소리겠지.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모시는 악마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체는 뻔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 물질계를 노리는 가장 위험한 대적.
“물질계를 침공하고 요정의 숲을 공격한 것이 죽음의 인도자가 세운 계획이 아니라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의지라는 뜻이다. 마침내 신화시대가 돌아왔구나! 가장 최악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