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51
강을 가르고 산을 부술 기세였다. 그러나 그 강력한 힘이 대악마의 손짓에 가로막혔다. 쿵! 손가락 하나로 흙거인의 공격을 막은 대악마가 브릭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 너의 절망은 어떤 모습이냐? 흙거인이 그대로 형태를 잃어버리고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은 마치 불타는 산이 무너지고 강철 모루가 사라지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런 절망이 스며들었다. 드워프 중갑병들이 깊은 절망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왕자 브릭타가 대악마를 비웃으며 달려들었다.
“너는 나의 절망이 되지 못한다!”
힘의 망치 갈라로자는 소유주의 정신을 보호했다. 왕자 브릭타는 가장 깊은 절망이 보여주는 지독한 절망에 흔들리지 않고 녀석의 머리통을 노리고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쾅! 가장 깊은 절망은 그 공격조차 쉽게 막아냈다. 그러나 무너지는 흙거인의 모습에 겹쳐지던 파괴된 강철 모루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피눈물을 흘리던 드워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깟 흙더미가 쏟아지는 모습에 왕국의 멸망을 투영하다니,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대악마 가장 깊은 절망의 능력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조차 깊은 절망이 되어 마음을 갉아먹는 것이다.
“뱀신께 영광이 있으라! 그분의 식사 준비를 하여라!”
뱀무녀 안데리나의 외침을 들은 나가 전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찬송을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나가 전사들은 모두 훌륭한 주술사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뱀신 모르나의 신격을 나눠 받은 화신이자 사제이기도 했다.
그들이 일제히 입을 맞춰 뱀신을 부르짖으니 의식 저편에서 바라보고 있던 뱀신 모르나가 깨어났다. 우웅- 뱀무녀 안데리나의 눈빛이 변했다.
날카로우면서도 더없이 매혹적이고, 요염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뱀의 눈동자는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뱀신 모르나가 뱀무녀 안데리나의 몸에 강림하자 대악마들이 일제히 그녀를 보았다. 새롭게 나타난 신격의 등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천상의 신격이 자신의 사제에게 힘을 내려주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이었다. 하물며 그것을 대륙이 아니라 요정의 숲에서 볼 줄은 몰랐으리라. – 뱀신 모르나, 네가 어떻게? 가장 깊은 절망의 물음에 뱀신 모르나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 땅에 네놈들을 싫어하는 자가 어디 하나둘일까?”
– 세계수를 타락시킬 뱀이 세계수와 손을 잡았단 말이냐?
“나는 원하는 것을 취하러 왔노라. 세계수는 나의 관심 밖에 있다.”
– 대체 무엇이 너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뱀신 모르나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비릿하고 촉촉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너희의 몸을 찢어 나의 육신으로 삼겠다.”
그 말에 대악마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 감히 요정이 남긴 찌꺼기 따위가 나를 모욕하다니!
“흥, 마계의 폐기물보다는 낫지.”
뱀신 모르나가 손을 휘두르자 거대한 뱀이 소환되었다. 시 서펜트, 바다는커녕 물이 없음에도 거대한 바다뱀은 전장을 자유롭게 뛰놀았다. 캬아아악! 비록 드래곤에 비하면 크게 영락한 용족의 후예였으나, 뱀신 모르나가 수천 년을 넘게 키워온 그녀의 신수였다. 능히 악마를 씹어 삼킬 수 있었다.
“어디 너의 절망이 나에게 닿는지 보자꾸나.”
가장 깊은 절망의 마차를 이끄는 악마들이 시 서펜트의 입에서 으깨진다. 그 모습을 본 대악마가 뱀신 모르나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 반쪽짜리 신격 따위가! 가장 깊은 절망이 아끼던 절망의 군세가 녀석의 품에서 쏟아진다. 한때는 위대했으나, 대악마의 손아귀에서 장난감으로 전락한 영웅들이었다.
이제는 신념도 없이 미래나 희망도 없이 그저 자신의 주인, 가장 깊은 절망이 원하는 대로 무기를 휘두를 뿐인 인형이었지만 그들이 쌓은 힘만은 진실이었다. 스걱! 키에에엑! 시 서펜트의 몸에 길게 상처가 났다.
피가 사방으로 흐르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장난감이 된 옛 영웅들은 용종의 목숨을 끊기 위해 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영웅적이었으나, 예전과 같은 영광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념을 잃은 전사라 살육 기계일 뿐이다.”
침묵하는 분노 키릴이 온몸을 짐승의 형태로 바꾸며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좋았던 그의 몸이 두 배 이상 커지며 곰의 형상에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그는 옛 영웅들의 머리를 터트리고 팔다리를 찢었다. 대악마의 손에서 장난감처럼 다뤄지던 위대한 영웅들을 해방했다.
– 죽음은 누구나 찾아오는 법이지. 그때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권능을 사용했다.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찢어져 죽어버린 옛 영웅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드워프 중장병의 심장을 찌르고, 야수전사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이 또 언데드가 되어 움직였다.
“우리의 숲에 움직이는 시체의 자리는 없다.”
뱀신 모르나와 마찬가지로 시아린 이븐우드에게 강림한 세계수가 단호히 외치며 힘을 뿌렸다. 우드득! 바닥에서 나무가 솟아올라 그대로 언데드의 몸을 휘감았다.
시체를 영양분으로 삼아 순식간에 성장해 거목이 되었다. 사방에 가득한 언데드만큼이나 많은 나무가 생겼다.
전쟁의 여파로 사라진 숲이 단번에 차올랐다. – 헛된 일이로다.
스스슥! 순식간에 생겨난 숲이 시들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말라붙고 쓰러졌다.
언데드들이 죽어버린 나무를 부수고 다시금 밀려왔다. 생명이 피었다가 죽음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아이반은 그 초월적인 싸움의 틈에서 이를 악물었다. 초월자와 신격의 전투는 관념의 영역이었다.
그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자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소수의 영웅급 강자를 제외하면 대악마와 신격의 싸움에 일방적으로 휘말릴 뿐이었다.
수많은 엘프와 드워프, 수인과 나가가 목숨을 잃었다. 대악마들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가 열심히 싸우고 있으면서도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각각 엘프와 나가에게 근원이 있기에 그들이 죽을수록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의 힘도 약해졌다.
반대로 대악마의 힘은 강해졌다. 대악마를 제외하고도 악마는 많았다.
언데드는 넘쳐흘렀다. 상황은 무척이나 암울했다. ‘수가 부족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아이반의 가슴속에 잠들어있던 힘이 꿈틀거렸다.
아스가르드 신격의 힘이 솟아오르고 그의 정신이 아득히 먼 곳으로 향했다. 황금 방패로 뒤덮인 천장, 창대로 만들어진 대들보, 황금의 나무가 서 있으며, 그 앞에 수많은 전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할라, 에인헤랴르. 주신 오딘이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모았던 최강의 전사들. 그들이 물었다. –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 아이반은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인헤랴르가 나서려 할 때마다 그들을 붙잡던 주신 오딘이 이번에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 그래, 한 번쯤 손발을 맞춰볼 필요가 있겠지. 주신 오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에인헤랴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전장이 우리를 원하는구나! 아이반은 눈을 떴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에 탈력감이 느껴졌다. 반면에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 듯 뜨거운 기운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몸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아이반을 지켜보고 있던 발키리가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전사들을 반겼다. 에인헤랴르,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싸웠던 신의 전사들이 이 땅에 나타났다.
– 아스가르드를 위해! 우리의 신을 위해!
뿌우우우- 낮고 굵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계의 종말이 왔음을 알리는 헤임달의 뿔피리 걀라르호른만큼은 아니었지만, 신들의 전사가 왔음을 전장에 알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새로운 전사 집단에 악마들은 물론 엘프와 수인, 드워프들까지 움찔 놀랐다. 요정의 숲은 폐쇄되어있기에 또다시 누군가 찾아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성황청의 사제들이 소환하는 전투 천사와 달리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기에 설마 아이반이 소환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이반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신의 힘에서 오는 충만함과 끝없이 빠져나가는 기운에서 오는 탈력감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격렬한 기운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반이 비틀거리고 있으니 근처에 있던 거인 좀비가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것을 신들의 전사가 가로막았다.
쾅! 거인 좀비의 주먹을 방패로 막은 신의 전사가 사납게 웃었다. 위에서 내리찍는 묵직한 충격, 자신보다 커다란 적. 익숙한 상대였다.
아스가르드의 주된 적은 거인이었으니까. – 신들이 이 전장을 보고 계신다! 에인헤랴르는 자연스럽게 싸움을 시작했다. 도끼로 거인 좀비의 발목을 찍어 쓰러뜨리고 창으로 녀석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악마와 언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 이 땅에 소환된 에인헤랴르는 아홉 명이었다. 적과 아군을 합쳐서 수십만이 충돌하는 전장에서는 한 줌도 되지 않을 적은 숫자였으나, 극도로 단련된 전투기술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지로 전투의 흐름을 바꾸었다.
– 이 전투를 우리의 신들에게 바친다! 에인헤랴르는 빠르게 악마와 언데드를 베어 피를 뿌리고, 그것을 제물로 삼아서 동료들을 이 땅으로 이끌었다. 발할라에서 준비하고 있던 전사들이 차례로 건너왔다.
최초에 아홉에 불과하던 에인헤랴르는 어느새 두 배, 세 배로 불어나 있었다. 아홉이 아흔아홉이 되었고, 거기서 또 열 배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나타난 것이 구백구십구 명의 전사, 일천에서 하나가 부족한 수가 살해당한 자들의 전당에서 소환되었다. 그만큼 아이반의 몸을 뒤흔드는 힘의 흐름이 거칠어졌다.
당장이라도 온몸을 찢어버리고 터질 것 같았으나 아이반은 이를 악물고 그 힘을 제어하려 애썼다. 우웅- 아이반이 그동안 아끼고 아껴왔던 스킬 포인트가 격으로 승화하며 그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그 막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과정을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기술과 힘을 불어넣는 초월적인 기운이 아이반에게 스며들었다. 아련히 스치는 깨달음이 폭력적인 힘의 흐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짊어지기 버거웠다. 그러나 이대로 짓눌려 사라질 수는 없었다.
아이반은 어두운 용의 발톱을 지팡이로 삼아 일어섰다.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딘, 토르, 로키, 티르, 헤임달, 프레이, 그 외 수많은 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신들의 화신. 제대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들이 지금은 한층 선명하게 다가왔다. 여전히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웅- 아이반의 몸에 쏟아지는 아스가르드 신들의 힘과 권능 사이로 그 스스로 가진 힘과 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미약하고 미약한 것이었으나, 또 무시할 수는 없는 힘이었다.
필멸자를 벗어나려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신성, 신의 힘과 권능. 완성까지는 아직도 멀고 멀었다. 대부분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간에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겠지. 그러나 이 순간, 아이반이 한층 성장했음은 분명했다.
피의 검 브리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널린 힘을 빨아들이고 또 뱉어내느라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바닥에 박아 넣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대악마를 노리고 창을 휘둘렀다.
캉! 궁니르의 권능을 머금고 휘둘러진 창은 또다시 녀석의 방어막에 막혔다. 그러나 이전보다 강해졌기 때문인지 죽음의 인도자는 세계수와 싸우다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 어리석은 자가···! 화아아- 죽음의 인도자를 중심으로 시커먼 어둠이 바닥을 타고 퍼졌다.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긴 저주의 손길이 바닥에서 솟아나 아이반을 붙잡았다.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번개가 솟아나 그 저주받은 손길을 태워버렸다. 죽음으로 이끄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했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 푸른 번개를 발에 휘감은 아이반은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거리를 좁혀 대악마에게 다가갔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주변에 흩뿌리고 있는 지독한 죽음의 기운 때문에 웬만한 전사들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고 언데드가 되어버리지만 아이반은 몸속에서 들끓는 힘을 내뿜어 그것을 밀어냈다.
“대악마의 목을 노려라!”
아이반은 그리 소리를 지르며 창을 움직였다. 기묘한 궤적으로 움직여 녀석을 찔렀다.
파삭! 겉에 두르고 있던 마력 방어가 깨지고 그 틈으로 창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한 뼘의 공간을 좁히지 못하고 아이반이 뒤로 튕겨 나갔다. 생명력을 불태우는 저주가 아이반의 몸에 스며들었다.
치이익! 로키의 불꽃이 삿된 힘을 태워버렸다. 세계수가 도움을 주었기에 흘러나간 생명력마저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사이 에인헤랴르 역시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 적의 심장으로 승리를 장식하라! 에인헤랴르는 저주를 방패로 막고 도끼를 던져 죽음의 인도자를 공격했다.
멀리서 창을 던지고 가까이서 검을 휘둘렀다. 죽음의 인도자는 그 모든 공격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사악한 권능을 내뿜었다.
녀석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에 당하지 않기 위해 뒤로 한껏 물러난 야수전사들마저 순식간에 언데드로 변하는 와중에 에인헤랴르는 껄껄 웃으면서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죽음의 인도자가 흩뿌리는 죽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에인헤랴르는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발키리의 손에 선택되어 오딘의 권능으로 불사의 축복을 얻은 자들이었다.
전사자들의 전당, 발할라에서 매일같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싸우는 것을 천국으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영광을 빛나게 만드는 장식품일 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에인헤랴르는 주신 오딘이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만든 궁극의 전사 집단이었다. 비록 라그나로크에 패배하고 이 땅으로 쫓겨난 비루한 신세라고 한들 대악마의 권능에 쉽게 쓰러질 자들이 아니었다.
–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분노한 죽음의 인도자가 손을 내뻗자 능히 고위악마와 비견되는 강력한 언데드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에인헤랴르를 덮쳤다. 무거운 검이 에인헤랴르의 방패를 부수고, 날카로운 화살이 목을 꿰뚫었다.
때로 사악한 흑마법이 그들의 몸을 붙잡고, 얼리거나 불태웠다. 찢어지고, 꿰뚫리고, 짓눌렸으며, 불타고, 얼어붙었다.
에인헤랴르가 하나씩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났다. 찢어지고 꿰뚫린 상처가 사라지고, 불타고 얼어붙은 몸이 멀쩡해졌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지키던 불사의 전사들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하하하! 실로 하찮은 죽음이구나! 까놓고 말하면 이들 또한 오딘의 권능으로 태어난 언데드나 다름없었다.
죽은 자는 또다시 죽지 못하고, 언데드가 또다시 언데드가 될 수는 없었다. 에인헤랴르가 실질적으로 대악마를 잡아 죽일 만큼 강하지는 않았으나, 죽음의 오라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 다른 자들과 달리 끊임없이 덤벼들어서 녀석을 붙잡고 늘어질 수가 있었다.
그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아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대악마를 막아서고, 세계수가 녀석을 상대하기 쉽게 틈을 만들었다. – 너희의 끝 또한 죽음으로 이루어지리라! 그저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걸로 부족해 결국 에인헤랴르를 직접 찢어발겨 발할라로 돌려보내던 죽음의 인도자를 감싸듯 두꺼운 나무들이 솟아올랐다.
녀석의 힘을 억누르고 그대로 봉인하려는 세계수의 권능이었다. 으드득! 사방에서 억누르던 나무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죽음의 인도자가 세계수의 권능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순간이나마 녀석을 억누른 것은 틀림없었다. 아직은 미약했으나 승리가 보였다.
물론 그것이 못마땅한 죽음의 인도자는 생명의 모래시계를 뒤집어 거대한 마법진을 펼쳤다. 온통 하늘을 가리는 어두운 기운. 이미 밤이었으나 한 점의 별빛과 달빛마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시커먼 구름이 밀려왔다.
– 죽음의 세례를 받아라! 죽음의 인도자의 외침과 함께 시커먼 구름에서 비가 떨어졌다. 그러나 평범한 비가 아니었다. 죽음의 기운이 응축된 사악한 사령마법의 결정체였다.
“으아아악!”
빗방울을 맞은 야수전사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빗방울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살이 썩어들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야수전사는 순식간에 언데드가 되어 다시 일어났다.
엘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세계수 네트워크에서 뜯겨 나와 죽음의 인도자를 섬기는 언데드가 되었다.
죽음의 빗방울은 두꺼운 갑옷과 방패를 뚫고 드워프 중갑병에게도 스며들었다. 완벽히 밀폐된 것이 아니기에 죽음의 빗방울이 살에 닿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스스슥!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계수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아군을 감싸고 죽음의 비구름을 몰아냈다.
나름 빠르게 대처했으나, 일순간 전선이 무너질 만큼 피해가 심각했다. 아군은 더욱 움츠리고 적은 더욱 날뛰었다.
– 절망은 항상 너희의 곁에 있노라. 가장 깊은 절망이 절망을 선언했다.
아군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을 끌어내어 정신을 파괴했다. 수많은 자들이 전투 의욕을 잃고 무기를 내렸다.
악마의 채찍이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언데드의 이빨이 물어뜯어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대가리가 깨져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대지의 기운을 증폭해 가장 깊은 절망이 강요하는 절망을 밀어내고 아군의 정신을 보호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절망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가장 깊은 절망이 옆으로 목을 꺾었다. 두어 발자국쯤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녀석은 그 상태에서 눈동자를 돌려 브릭타를 빤히 보았다.
녀석은 엘프의 절망을 반영해 언데드가 되어버린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회백색 눈동자에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는 영혼을 위협하는 섬뜩함을 느끼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절망의 손톱이 그의 정신과 영혼을 할퀴고 지나갔다. 소유주의 정신을 보호하는 힘의 망치 갈라로자가 없었다면 지금 공격으로 크게 흔들렸으리라.
– 귀찮은 녀석이로군. 가장 깊은 절망이 손을 휘두르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절망이 현실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역겨운 촉수를 가진 이름 모를 괴물이 바닥에서 나타나고 하늘에서는 유성우가 떨어졌다.
사람 덩치만 한 벌레들이 날뛰고 살갗이 온통 뒤집어진 거인이 쇠사슬을 들고 일어났다. 정제되지 않은 공포의 상상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것만 같았다.
때로 맛있는 고기가 빠르게 썩어버리거나, 호화로운 욕조가 부서지거나, 산처럼 쌓여있는 오이, 따뜻하게 익은 파인애플이 나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절망의 모습도 보였다.
“강요된 절망은 저질스러운 망상이로다.”
뱀무녀 안데리나의 몸을 빌려 나타난 뱀신 모르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뱀신의 마안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진 절망을 하찮다고 평가하고 현실에서 쫓아냈다.
가장 깊은 절망이 풀어놓은 절망의 모습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흩어졌다. 그러나 그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아군은 극도로 혼란스러워했다. 대악마의 권능은 평범한 싸움으로 이겨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뱀신 모르나는 힐끗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로서는 다른 종족이 죽거나 다치는 것이 크게 와닿지 않았으나 나가 전사들이 크게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면으로 나설수록 신격을 나눠 가진 나가들이 느끼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가진 힘과 격으로 밀릴 것은 전혀 없었으나 온전히 자신의 육신과 신격을 가지고 마계에서 넘어온 대악마들과 어쨌든 근원을 여럿이 나눠 가진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의 차이였다.
‘무리를 좀 해야 하나?’ 그때 그녀의 전사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사나운 이빨이 소리치며 용의 마력을 내뿜었다.
“그런 절망은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절망을 보았는지 모르겠으나, 그 절망이 사나운 이빨의 전의를 불태우게 만든 모양이었다.
“과연 나의 전사로다.”
뱀신 모르나는 자신의 전사에게 힘을 더했다. 능히 대악마를 해하게 할 만큼의 신력을 내려주었다. 쾅!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가장 깊은 절망을 공격할 때, 아이반 역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치지직! ‘···묠니르!’
초월자라 하면 세상의 법칙을 넘어선 자들이었다. 신격이라 하면 하나의 세계에 자신의 법칙을 새겨 넣은 자들이었다.
필멸자와 초월자의 차이는 힘의 크기나 불멸성이 아니었다. 세계의 법칙에 얽매인다면 필멸자였고, 단 하나라도 벗어난다면 초월자였다.
그 차이는 아주 작고도 거대했다. 필멸자를 하찮게 만들고 초월자를 위대하게 만들 만큼. 아이반은 감히 대악마의 앞을 가로막을 만큼 성장했으나, 그들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대악마는 곧 마계의 신격이었고, 이질적인 법칙으로 보호되는 그들을 상대하기엔 아이반의 격이 부족했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대악마를 둘러싼 이질적인 법칙을 뚫고 녀석에게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결국 필멸자가 신격을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격의 차이를 메울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다른 신격의 격을 빌리거나. 어느 쪽이든 보통의 필멸자로서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에게는 방법이 없지 않았다.
‘···묠니르!’ 아이반이 속으로 강하기 외치자 저 멀리서 움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의 검 브리카를 통해 연결된 공간 너머에서 위대한 망치가 들썩거렸다.
마경에 숨은 난쟁이 포르니, 그 옛날 난쟁이의 왕 흐레이드마르의 아들 레긴이 새롭게 만든 파괴의 망치였다. 아스가르드의 천둥신이 아니라 아이반을 위해 준비된 난쟁이의 선물이었다.
감히 천둥신의 무기를 따라 만들어진 파괴의 망치는 오만하게 주인 될 자격을 물었다. 아이반은 피와 죽음, 용기와 싸움으로 그에 대답했다.
궁니르의 권능을 스스로 깨우치고, 발할라의 에인헤랴르를 소환하고, 대악마와 맞서 싸워서 자신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아이반은 파괴의 망치에게 되물었다.
자신의 무기가 될 자격이 있는가? 감히 나의 손에 쥐어져 대악마의 두개골을 부술 자신이 있는가? 천둥신의 권능을 온전히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묠니르!’ 대답을 재촉하는 아이반의 외침에 파괴의 망치가 답했다. 당연하지. 스스슥- 물결치듯 공간이 일렁인다.
난쟁이의 위대한 권능이 멀리 떨어진 차원을 잇고 통로를 만들었다. 허가되지 않은 존재의 앞을 가로막는 차원의 압력을 뚫어버리며 파괴의 망치가 나타났다.
묠니르(Mj?lnir), 뜻은 박살 내는 것.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통틀어 한 손가락에 꼽히는 최강의 무기, 천둥신 토르의 망치. 아이반은 손을 뻗어 묠니르를 쥐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된 파괴의 상징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묠니르는 묵직했다. 또한, 더없이 가벼웠다. 자신을 위한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이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