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52
“묠니르.”
아이반이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부르자 파괴의 망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 멀리 천상에서부터 천둥신의 권능이 쏟아지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원래라면 묠니르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 팔이 타버렸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서 잠깐 소환한 것만으로 버겁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더없이 편안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묠니르의 감촉이 그저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우웅- 메긴기요르드(megingj?rð), 힘의 허리띠가 울부짖었다.
야른그레이프(Jarngreipr), 무쇠 장갑이 감싸 안았다. 난쟁이 포르니가 직접 수리하고, 새롭게 만들어준 천둥신의 장비가 묠니르와 공명하듯 떨렸다.
그럴수록 묠니르가 품은 천둥신의 권능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두운 밤하늘이 다시금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죽음의 빗방울을 뿌리던 먹구름과 모습은 비슷했으나, 품고 있는 기운은 전혀 달랐다. 천둥신이 이 땅에 새롭게 자신의 신물이 나타난 것을 축복하며 권능을 사용했다.
새로운 묠니르의 주인을 인정하듯 자신의 망치를 들어 올렸다. 먹구름을 휘감고 천둥이 울려 퍼진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어둠을 훤히 밝혔다. 치지직! 쾅! 천둥신의 망치질에 호응하듯 아이반이 묠니르를 들어 올렸다.
먹구름을 뚫고 떨어져 내리는 번개가 그의 묠니르에 닿아 몇 배로 증폭되었다. 전장을 가르고 나타난 천둥신의 위엄에 대악마가 그를 노려보았다.
단순히 사제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강렬한 신성의 증명에 깜짝 놀라서 아이반을 제거하려 했다. – 이계의 뇌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로다.
끼야아아악!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에게 묶인 악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이반에게 달려들었다. 원념 가득한 악령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공기가 썩고 땅이 죽어갔다.
한 모금의 숨결만으로 수천, 수만을 능히 살해할 지독한 독기였다. 바닥에서 무수히 많은 망자가 나타나 아이반의 팔다리를 붙잡고 그를 어두운 죽음의 저편으로 끌어내렸다.
피우웅! 이레인이 날린 화살이 악령과 망자를 꿰뚫었다. 팔라시온의 활, 고대 요정의 신기로 쏘아 보낸 화살은 그대로 바닥에 박혀 신성한 나무로 변해 솟아올랐다.
우웅- 신성한 나무들을 통해 세계수의 힘이 뿜어졌다. 썩어버린 공기를 정화하고, 죽어버린 땅을 되살렸다.
사악한 죽음의 마력이 가까이 다가올 수 없도록 벽을 세웠다. – 발버둥을 칠수록 절망은 빠르게 다가오는 법이지. 가장 깊은 절망이 만들어낸 절망의 찌꺼기가 세계수의 방어를 뚫고 아이반에게 향했다.
온갖 기묘한 절망의 결과물이 현실을 할퀴며 날아왔다.
“너의 절망은 우리에게 닿지 못한다!”
쿵!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두르자 땅이 솟구치고 거대한 성벽이 나타나 절망의 찌꺼기를 막았다. 그리고 사나운 이빨이 빠르게 달려가 가장 깊은 절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리의 여신이 너를 먹이로 정하였다!”
화르륵! 사나운 이빨의 온몸이 타올랐다. 화염 드래곤의 심장이 마력을 미칠 듯이 뿜어내어 용의 불꽃이 크게 피어올랐다.
육신이 조금 더 커졌다. 근육이 증가하고 가죽이 더욱 질겨졌다.
화염 드래곤의 심장과 그를 가호하는 뱀신 모르나의 권능이 사나운 이빨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스걱! 가장 깊은 절망을 스치고 검이 지나갔다.
대악마의 몸을 찢고 핏물이 흘러내리다가 용의 불꽃에 타올라 사라졌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절망은 몸을 뒤틀고 한껏 뒤로 물러났다.
녀석은 상처 입은 육신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냈다. 탁! 바닥을 뒹구는 팔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뱀신 모르나가 말을 내뱉었다.
“아쉽구나. 대악마에게도 나의 독이 스며드는지 궁금했는데.”
어차피 가장 깊은 절망의 모습은 그를 바라보는 자들의 절망을 구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뱀신 모르나의 독기는 그런 헛된 형상을 뚫고 본신을 노릴 만큼 매서웠다. 죽음의 인도자의 공격은 세계수에게 막혔다.
가장 깊은 절망도 뱀신 모르나와 사나운 이빨, 왕자 브릭타에게 방해를 받았다. 이제 아이반을 막을 수 있는 적은 없었다.
– 토르를 위하여! – 천둥신을 위하여! 묠니르가 한껏 천둥신의 권능을 머금으니 에인헤랴르의 몸에서 토르의 번개가 솟구쳤다. 아이반이 천둥신의 힘을 끌어낼 때마다 에인헤랴르 역시 신의 가호를 받아 강해졌다.
쾅! 에인헤랴르가 무기를 휘두르자 천둥신의 번개가 뻗어져 나갔다. 사악한 언데드의 몸을 불태우고 악마의 몸을 지졌다.
천에서 하나가 모자란, 구백구십구 명의 전사들이 천둥신의 전사가 되어 적을 밀어붙였다. 에인헤랴르가 신의 힘을 휘두르자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조차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신의 기운이 깃든 것이었다.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준비하던 전사들은 노련하게 녀석의 앞을 막았다.
본인을 희생하며 하나씩 상처를 새겨 넣었다. – 죽음이 이 땅에 있도다! 죽음의 인도자가 생명의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러자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에인헤랴르 수십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에인헤랴르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던 술식이 파괴되고 그들의 영혼이 다시 발할라로 돌아간다. 그렇게 사라지는 짧은 순간에도 에인헤랴르는 죽음의 인도자에게 도끼를 던지고, 창을 내질렀다. 사슬로 녀석의 몸을 묶으려 애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주 짧은 틈,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에 아이반은 쥐고 있던 묠니르를 집어 던졌다.
“토르!”
대악마의 뚝배기를 깨고 싶으면 얼른 힘을 더하라는 아이반의 외침에 천둥신이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가는 묠니르에 친히 자신의 망치를 얹어서 전해주었다.
치지직! 쾅! 에인헤랴르가 모두 발할라로 돌아가고, 대신 천둥신의 힘을 잔뜩 머금은 묠니르가 대악마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나타난 마력 장벽이 막아섰지만, 묠니르는 가볍게 부수면서 뚫고 지나갔다.
마력 방어막을 유리처럼 깨부수고, 공간 왜곡을 통째로 짓누르면서 대악마의 육신을 두드렸다. – 으윽! 비로소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뒤로 밀려났다.
비틀거리며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의미 있는 피해를 주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쾅! 다시금 묠니르가 공간을 꿰뚫고 날아갔다.
수많은 거인의 골통을 깨부순 파괴의 망치가 아이반의 손에서 뻗어 나와 대악마를 공격했다. 대악마가 휘청거렸다.
녀석이 두르고 있던 죽음의 안개가 사라지고 생명의 모래시계 역시 크게 흔들렸다. 묠니르가 머금은 천둥신의 힘이 아이반과 죽음의 인도자 사이에 있던 격의 차이를 상쇄했다.
이제 아이반의 공격은 그저 성가신 것이 아니라 위협적이었다. 쾅! 아이반이 묠니르를 집어 던질 때마다 대악마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녀석이 받는 충격보다 아이반이 느끼는 충격이 더욱 컸다.
계속된 전투, 에인헤랴르의 소환, 묠니르까지. 단기간에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신의 힘도 이제는 말라붙어 한 줌에 불과했다.
델피노의 신성력이 쏟아지고, 세계수가 지원한다고 한들 바닥을 보이는 마력과 신력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울컥! 속이 뒤집어져서 핏물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다시 묠니르를 던졌다.
시야가 흐릿하고 손발이 떨렸다. 온통 핏물이 가득해 후각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저 뜨거운 묠니르를 쥐는 순간에야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아이반이 그렇게 대악마에 집중하는 사이, 흐려진 감각 너머에서 또 다른 악마들이 그를 노렸다.
뒤에서 그의 목을 잘라내기 위해 누군가의 척추로 만들어진 채찍을 휘둘렀다. 그것을 필레인 그레이우드, 요정군단의 지휘관이 막아섰다.
“영웅의 길을 막지 마라.”
전투의 흥분 따위는 없다는 듯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검을 휘둘렀다. 적어도 수백 년. 인간의 삶으로는 까마득한 세월을 쌓아 올린 검이 최적의 루트를 따라 움직였다.
피의 동맹 최강의 검객 카락취처럼 초월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랜 노력으로 완성된 검은 빈틈 하나 없이 완벽했다. 스걱! 뼈 채찍이 가닥가닥 끊어진다.
그것을 휘두르던 악마 역시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그 후로도 몇몇이 더 아이반을 노렸으나,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충실히 그를 지켰다.
– 너희가 감히 죽음에 닿으려 하느냐! 파삭! 죽음의 인도자가 쥐고 있던 생명의 모래시계가 부서져 내렸다. 그 속에 가득 들어있던 모래알이 안개처럼 앞으로 뻗어져 나왔다.
죽음.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의 모습.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검을 휘두르다말고 멈칫 물러났다. 그를 공격하는 언데드가 무척이나 자신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살은 모두 썩어버렸고, 옷은 낡아서 원형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검을 쥐고 있는 자세, 발의 움직임, 시선의 방향까지도 같았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어 뼈만 남는다면, 그리하여 언데드가 되어 부활한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이건 필레인 그레이우드였다. 그러했을지도 모를 미래의 가능성이었다.
파멸적인 죽음의 결과였다. 챙! 완벽히 똑같은 자세로 상대를 밀어낸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흘깃 주변을 보았다.
자신의 파멸적인 미래와 대면한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살아있는 자는 모두 자신의 죽음과 싸워야만 했다.
비록 상대가 완벽히 자신과 같지는 않았으나, 이미 전투에 지친 아군은 자신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누가 격을 이룬 자의 죽음을 논할 수 있을까? 죽음을 다룬다 하여 과한 욕심을 부렸군.”
아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잔뜩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던 아이반이 아니었다.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고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그는 과연 아이반인가?’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그런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세계수가 답변을 내려주었다.
– 과연 아스가르드의 화신이로다. 그 말에 아이반, 그의 몸을 빌린 천둥신이 사납게 웃었다.
“나의 망치를 휘둘러 이 땅에 징표를 새긴다. 이는 불타버린 세계의 의지이니, 세상이여 기억하라.”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을 대표해 천둥신이 망치를 휘둘렀다. 하나의 신계가 가진 막대한 신력이 묠니르를 타고 뿜어졌다. 하늘이 갈라지고 어둠이 사라졌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아이반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목이 매캐하게 답답하고 호흡이 편치 않았다.
모래라도 잔뜩 씹은 것처럼 입안이 까끌까끌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깨질 듯 두통이 심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력 회로가 완전히 뒤틀리고, 내장이 상해서 엉망이었다. 코끝에서 피 냄새만 가득한 것을 보니 후각을 포함해서 오감이 맛이 가버린 것 같기도 했다.
‘오감이 맛이 가면 회복하기 어려운데.’ 아이반이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델피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습니까?” 잔뜩 쉬어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피로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보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이반은 충격적이었다. 정말 감각이 정상이 아니었다.
“···싸움은?” 역시 잔뜩 가라앉아서 바람 소리에 가까운 미약한 목소리로 아이반이 물었다. 과연 말을 뱉은 것인지, 아니면 말을 뱉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스스로 헷갈릴 정도였지만 델피노는 용케도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대답해주었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는 뇌신의 망치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가장 깊은 절망은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가 힘을 합쳐 육신을 찢고 마계로 추방했습니다.” 죽음의 인도자가 사라지니 언데드 군단은 그대로 무너졌고, 남은 악마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정리되었다고 했다.
아군의 피해는 무척이나 심각하고, 세계수와 요정의 숲에 남은 상처는 쉽게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대악마 둘을 물리쳤다.
녀석들을 이 땅에서 추방하고 마계로 쫓아냈다. 그대로 소멸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그것은 애초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대악마는 마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신격이었고, 녀석들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직접 마계로 건너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거의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으니 예전의 힘을 되찾기까지는 수백 년도 모자랄 것이다. 어쩌면 수천 년이 걸릴 테고, 대악마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해 완전히 영락할지도 몰랐다.
그래, 이겼다. 비록 상처뿐인 승리라고 한들 그 영광이 훼손될 수는 없었다.
“···다행이군.” 아이반은 간신히 그 말을 내뱉고 또다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사흘을 누워 있다가 깨어난 지 겨우 몇 분, 또 이틀을 그렇게 잠들었다.
잠깐 깨어났다가 기절하기를 몇 번, 아이반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거의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엘프가 보물처럼 아끼던 귀중한 약들을 물처럼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괴물처럼 튼튼한 그의 몸을 생각하면 이번 전투에서 아이반이 얻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계속된 전투로 쌓인 피로, 에인헤랴르를 소환하며 생긴 반동은 물론이고 묠니르를 몇 번이나 휘두르며 얻은 충격이 작지 않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강신이었다.
천둥신 토르가 아이반의 몸을 빌려 나타난 것. 그건 솔직히 아이반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동의한 적도 없었고. 강대한 신격에게 몸을 빼앗기고 자아가 의식의 저편으로 밀려나 짓눌리는 경험은 무척이나 끔찍한 것이었다.
마력 회로가 그대로 타오르고 신성의 그릇이 터져나갈 듯이 버거웠다. 그나마도 이번에 아이반이 한층 격을 높이지 않았다면 진작 몸이 터지고 영혼이 찢어졌을 것이다.
아스가르드를 대표해 나타난 천둥신의 힘으로 전투가 단번에 정리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몸을 빼앗기고 자아가 억눌렸던 것은 그저 섬뜩하기만 했다. 아이반의 동의가 없음에도 천둥신이 몸을 차지했다.
한 번 그럴 수 있었다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겠지.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아스가르드의 화신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이반은 반길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하던 불안감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아스가르드 신들의 목적을 이제는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적어도 오딘과 토르는 이계의 신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던지고 진정으로 이 땅에 자리 잡으려 했다.
아이반은 그걸 위한 도구였다. 신들조차 도저히 바꿀 수 없었던 운명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특이점. 마침내 세계수가 스스로 예언한 파멸을 막아내었으니 그 유용성을 제대로 증명한 셈이었다.
“후우, 젠장.”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이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욕설로 마음을 달래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조금 비틀거렸으나 이내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아이반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이 이레인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부축이라도 해줄 모양이었으나, 아이반이 손을 내저으니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골골거리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소. 이번 싸움이 힘들기는 힘들었군.” 낯선 땅에서 갓 눈을 떴을 때, 육신은 아직 나약하고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었던 시절. 며칠씩 굶으면서 뒷골목 한쪽 구석에서 노숙하던 그때 이후로 이렇게나 나약해진 때가 없었다. 처음 몽둥이 하나 꺾어 들고 싸우러 나가서 고블린에게 개같이 얻어맞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지는 멀쩡했으나, 차라리 한두 개쯤 잘려 나가고 속이 편안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팔다리 재생하는 것보다 엉망이 된 마력 회로와 신성의 그릇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된 신성력과 영약이 훨씬 많았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넘어가도 멱살 붙잡고 이승으로 강제로 끌고 온다는 최고의 회복약 엘릭서를 마셔도 이 모양인 것을 보면 겉만 멀쩡했지, 그냥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살아남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이레인의 말에 아이반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수만 명이 가볍게 죽어 나간 최악의 전장이었다. 거기서 대악마와 싸우고도 살아남았으면 운이 좋은 셈이었다.
더 말을 얹어봐야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다. 이레인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재건 중인 요정의 숲의 모습이 보였다.
무너진 집을 새롭게 만들고, 불타고 부러진 나무를 회복시켰다. 악마의 사악한 기운에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고 떠나간 정령들을 불러왔다.
모든 이들이 정령을 부릴 수가 있는 엘프이기에 전장의 정리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런데도 흔적을 모두 지우지 못한 것을 보면 이번 전투가 그만큼 치열했다는 뜻이다. 아이반이 고개를 돌려 세계수를 보았다.
여기저기 꺾이고, 시들고, 불탔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처참한 모습일지언정 여전히 서 있었다.
삼 분의 일이 넘는 엘프가 죽거나 다쳤다.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영구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세계수는 버티고 있었고, 요정의 숲은 악마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엘프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대악마를 둘이나 패퇴시켰으니 세계의 운명이 조금이나마 어둠을 벗어난 셈이다.
“결국 해냈군. 운명을 비틀고 세계수를 지켰어.” 이레인은 새삼스럽게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제는 세계수와 연결되어 감정의 움직임이 크지 않을 텐데 선명히 기쁨을 드러냈다.
희생이 컸지만, 그건 감당할 수 있었다. 세계수가 무너졌으면 훨씬 더 커다란 피해가 발생했을 테니까. 치열하게 싸워서 영광스럽게 승리를 쟁취했다.
비로소 세계수가 파멸의 운명을 넘어 살아남았으니 더는 원하는 것이 없었다. 아이반은 여전히 미래가 걱정스러웠으나, 그녀를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당장의 승리를 즐기지 못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거, 안색이 좋군. 이제는 좀 살만한 모양이야!”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으나 다른 이들에 비하면 경미하다고 해도 좋았다. 대악마를 막아서고도 그러했으니 실로 대단했다.
“보름 동안 잠만 자다 보니 피곤해서 말이오. 이제는 일어나야지.”
“하하하! 배가 많이 고플 것 같은데, 맥주 한잔할까? 내 아공간 가방 속에는 안주도 제법 많다고. 잘 익은 사슴 뒷다리가 끝내주지.” 아이반은 혹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델피노가 나타나 그를 말렸다. 사경을 헤매다가 이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술을 마시겠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진 고기를 쌀과 섞어서 죽을 만들었습니다. 그거나 드시죠. 술은 생각하지도 말고.” 텁텁한 목을 씻어내려 줄 맥주가 간절했으나 아이반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배에 칼 좀 박힌 건 술을 마셔서 소독하면 된다는 무식한 노르드 전사식 사고방식을 따라 하고 있었다. 스스로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아이반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다.
아직 뜨끈뜨끈한 죽을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집어넣었다. 괴물처럼 튼튼한 몸을 가진 후 좋은 것이 하나 있다면 뜨거운 음식을 굳이 식히지 않고도 먹을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한 호흡에 그대로 폐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도 능히 버틸 수 있는 몸뚱어리였기에 뜨거운 음식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녹은 쇳물을 들이켜는 것도 아니고 음식이 뜨거워 봐야 얼마나 뜨겁겠나. 환자식이라고 일부러 간을 약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요리 솜씨가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싱거운데 그 와중에 쓴맛까지 올라오니 영 맛이 없었다. 그래도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몸에 힘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보름을 완전히 굶은 것도 아닌데.
“여기에 뭔가 섞었소? 반응이 너무 직접적인데.”
“엘프가 몇몇 약초를 섞어주었습니다. 보양식으로는 아주 제격이라더군요.” 엘프의 보양식이라면 실제로 마법약이나 다름없었다. 죽의 형상을 한 포션을 들이킨 셈이다.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한 그릇 더 드시죠. 아직 양이 많습니다.”
“먹을수록 입맛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괜찮을 것 같은데.”
“몸에 좋은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려주는 차보다는 훨씬 맛있······.” 말을 내뱉던 델피노는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사나운 이빨은 아직 수련 중입니다. 이번에 깨달은 것이 많은 모양이더군요.” 용의 심장에서 극도로 마력을 끌어내고 뱀신 모르나의 가호까지 듬뿍 받아 대악마 가장 깊은 절망을 몰아쳤던 사나운 이빨은 그 싸움에서 얻은 것을 정리하기 위해 폐관 수련을 시작했다.
그도 상처가 만만치 않았으나 리자드맨 특유의 재생력을 믿고 그대로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뱀신 모르나는?”
“약속대로 대악마의 핵을 하나 챙겼습니다. 세계수가 그것을 정화했고, 얼마 전 끝나서 가져갔지요. 아마 지금쯤 새롭게 육신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 그 때문인지 나가 전사들이 무척이나 흥분하면서 동시에 우울한 모습이라고 했다. 나가 종족에 퍼져있던 신성을 뱀신 모르나가 회수하고 있으니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나가 전사들이 한 곳에 모여 뱀신 모르나를 위한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의 영향으로 크게 쇠약해졌던 뱀무녀 안데리나 역시 몸을 추스르자마자 합류했다고. 자신의 영역에서 제단을 쌓고 뱀신 모르나를 위한 기도와 의식을 하는 것이 좀 껄끄럽기는 하지만 세계수는 그것을 용인한 듯했다.
어쨌거나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는 완전히 남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다른 신격의 영역에서 의식을 한다니, 대단하군.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나가의 자존심인가.’ 그러나 아이반은 곧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장소에서 희끄무레한 것들이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한 기운이었기에 도저히 몰라 볼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을 내뱉었다.
“어쩐지 내 머리 위에 없더라니.” 언제 나타난 것인지 발키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귀의해 발할라로 갈 생각이 없는지 영업을 뛰고 있는 것이다. 원래 전장에서 싸우다가 죽은 전사들은 첫 번째 영입 대상이었다.
그동안 방관하던 자세를 버리고 제대로 이 땅에 자리를 잡겠다더니 참으로 적극적인 자세였다.
“빌어먹을 오딘!”
전투가 끝나고 한 달이 흘렀다. 완전히 전투의 흔적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제법 평안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자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엘프가 가지고 있던 귀한 약들을 아낌없이 풀어 환자를 치료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죽을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것이며, 멀쩡한 사람은 이미 기력을 되찾았을 것이다. 지금껏 누워있는 자들은 하루 이틀이 더 흐른다고 호전될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몇 달은 요양을 해야겠지. 그렇다면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수인과 드워프, 나가는 복귀를 준비했다. 전투가 끝나고 당장 급한 환자들의 치료도 얼추 끝났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계수의 무녀 시아린 이븐우드는 그들이 떠나기 전, 세계수의 이름으로 축제를 선언했다.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드워프나 수인, 나가뿐만이 아니라 엘프를 위해서도. 슬픔을 씻고 승리를 축하했다. 기쁨으로 모두의 마음을 치유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으나, 그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니 축제로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싱그러운 과일과 맛있는 고기가 제공되었다. 술꾼이라면 누구나 한 방울이라도 맛보기를 원한다는 엘프의 술이 가득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