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53
“하하, 이제야 제대로 한잔 마시는군!” 브릭타가 병 하나를 뽑아 들고 마개를 열었다.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향긋한 와인의 향기가 퍼졌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향을 맡고 감탄을 터트렸다. 요정의 숲은 완벽한 생장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긴 수명 탓에 엘프는 무척이나 인내심이 좋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수십 년씩 숙성된 와인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러다녔다. 물론 와인이라는 것이 마냥 오래 묵었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엘프의 와인은 깊이가 남달랐다.
“엘프의 술은 맛있죠.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닙니까? 다들 몸도 정상이 아니면서.” 델피노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이레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이번이 아니면 한동안 마시기 힘들 거야.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엘프의 술은 정령의 샘에서 물을 길어와 요정의 숲에서 자란 과일과 곡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악마가 쳐들어와 요정의 숲을 온통 뒤집어 놓았으니 앞으로 몇 년간은 예전의 맛을 끌어내기가 어려울 터였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저장해둔 술도 모두 사라질 테니 제대로 된 엘프의 술을 맛보려면 또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수명이 긴 엘프에게는 잠깐이겠지만 다른 종족에게는 꽤 긴 세월이다. 그때는 델피노 역시 나이를 제법 먹었을 거다.
“이런! 그렇다면 술잔을 멈출 수가 없지!” 드워프들이 껄껄 웃더니 술병을 비우는 속도를 높였다. 엘프의 술이 그리 도수가 낮은 편이 아님에도 쭉쭉 넘어갔다. 그렇게 흥이 오르자 드워프 몇이 즉석에서 만든 타악기를 두드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인들이 그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엘프가 정령을 불러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가들은 차분히 와인을 음미하는 것 같았으나, 꼬리 끝부분이 박자에 맞춰 씰룩거렸다. 그렇게 하룻밤을 흥겹게 보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 되어 소리를 높였다. 슬픔을 잊어버리고 즐거움에 흠뻑 젖었다.
“우리는 그대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축제가 끝나고, 시아린 이븐우드는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며 그리 말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세계수의 힘을 감당해야만 했기에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으나, 애써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녀가 아니면 이 말을 전달할 자가 달리 없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세계수의 마지막 가지가 시드는 날까지 이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세계수의 무녀는 개인이 아니라 세계수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였다.
그녀의 말은 곧 세계수의 의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엘프라는 종족이 그녀의 입을 빌려 약속한 것이다.
드워프는 엘프와 맺은 오래된 협약을 재확인했고, 수인 연맹은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 나가 왕국은 자신들의 신이 육신을 얻게 되었다.
무척이나 큰 대가를 지불했지만, 얻은 것이 적지도 않았다. 모두 만족하며 돌아섰다.
가장 먼저 수인들이 떠났고, 뒤를 이어 강철 모루의 드워프가 움직였다. 나가들 역시 자신들의 왕국으로 향했다.
수는 훌쩍 줄어있었으나, 발걸음은 더욱 힘찼다. 동료를 잃은 슬픔은 승리의 영광으로 지웠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수인과 드워프, 나가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반이 망토를 둘렀다. 다들 떠났으니 이제 일행의 차례였다.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운명을 바꾸었으니 나의 도박은 성공한 셈이구나.” 아이반을 바라보며 말하는 시아린 이븐우드. 그 이질적인 말투에서 아이반은 세계수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쎄, 잘 모르겠소. 한 번은 막았으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지.”
“한 번이면 되었다. 정해진 운명에 균열이 생겼으니 그것을 잘 이용해야지.”
“그렇다면야.”
“대악마는 패퇴하고, 뱀신 모르나는 육신을 얻었다. 나는 파괴되지 않았고, 검은 세계수가 탄생할 미래는 사라졌구나.” 세계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구슬이 둥실둥실 떠올라 아이반에게 전해졌다. 그것을 무심코 받아든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리 쉽게 받을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대악마의 핵이잖소?”
“하나는 계약대로 뱀신 모르나에게 주었고, 다른 하나가 그것이다. 정화를 마쳤으니 위험하지는 않다.” 정화한 대악마의 핵은 신격이 새롭게 육신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보물이었다. 세계수는 이번에 크게 약해졌으니 흡수하는 것이 맞을 텐데, 이걸 내미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는 엘프를 구원하였으니 자격이 있다. 그대가 대악마를 직접 응징하였으니 이것은 응당 그대의 손에 가야만 할 것이다.” 우웅- 세계수가 가공한 대악마의 핵에서 터무니없는 수준의 기운이 느껴졌다. 실로 무진장의 마력, 아득한 격의 산물. 아이반은 홀린 듯이 그것을 쥐다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이건 내가 가질 물건이 아닌 듯하오.”
“그대의 것이다. 그대에게 이것이 필요할 테니 받아두어라.
” 세계수가 직접 대악마의 핵을 아이반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몸에 스며들었다.
가닥가닥 끊어졌던 마력 회로가 되살아나고 신성의 그릇이 한층 넓어졌다. 아주 미약한 수준으로 쌓아올렸던 격이 조금 더 높아졌다.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전투의 상처가 깨끗이 사라지고 이전보다 더욱 강대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이반, 아스가르드의 전사.” 세계수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신들이 왜 그대를 선택한 것인지 고민하라. 신들의 화신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오?” 아이반이 그리 물었으나 세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반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아스가르드 신들에게 선언할 뿐이었다.
“최초의 요정들이 남긴 의지이자 세상의 관측자로서 나는 그대들의 뜻을 지지한다. 이 땅은 새로운 신을 맞이할 것이다.
” 세계수의 선언에 세상이 뒤흔들렸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이반은 무언가 거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휘이잉! 치지직! 화르륵! 아스가르드 신들의 기운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아이반은 그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디 그대의 뜻을 이루라. 나는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그리 말을 뱉은 세계수는 존재감을 지우고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세계수의 무녀 시아린 이븐우드가 무척이나 지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대의 고난을 우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수의 의지입니다.
” 더는 버틸 힘이 없는지 시아린 이븐우드의 몸이 흐려졌다. 정령계로 넘어가 잠을 자며 회복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이반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리했군. 수명이 많이 줄었겠어.’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세계수의 무녀를 계속하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세계수가 힘을 쓸 때마다 그녀에게 부담이 밀려왔으니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대악마가 요정의 숲을 침공한 이후 몇 주 동안이나 세계수의 권능을 버티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시아린 이븐우드가 사라진 방향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의 동생,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길을 열겠습니다.”
“남부 제국 마리난. 아무래도 그쪽 사정이 궁금하오.”
“요정의 숲이 안내할 것입니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다.
경의를 담아 영웅을 배웅했다. 아이반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은 그것을 보다가 마주 경례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얼마 걷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숲의 모습이 바뀌었다. 요정의 숲을 벗어나 마리난 제국의 어느 숲으로 넘어온 것이다.
전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마리난 제국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숲으로 넘어왔다. 길고 높은 성벽이 똑바로 보였다.
일행이 성문을 향해 걸어가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틀림없이 사나운 이빨을 보고 그러는 것이겠지.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무기를 들어 올리는 병사들에게 아이반이 소리쳤다.
“나는 아이반이오! 제국을 위해 함께 싸웠으니 적이 아니오!” 이제는 마리난 제국에서도 아이반의 이름은 제법 유명했다. 대악마의 목을 따기 위해 남부 대도시 스트라븐에 침투했던 강자들은 그의 존재를 똑똑히 기억했으니까. 그러면 곧 누군가 달려 나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성문을 열어주겠지 싶었는데, 어째 성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오히려 경계심을 높이고 전투 준비를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뭐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성벽 너머를 꿰뚫어 보았다.
“병사들이 몰려드는데, 기사도 달려오고. 도저히 환영하는 모습이 아니군.” 마리난 제국의 수도로 온다면 크게 환영하며 보상을 주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가고 창칼이 몰려드는 걸까? 스윽 아이반이 슬그머니 앞발을 내밀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손바닥 크기의 어두운 용의 발톱을 한 손에 쥐고 굴렸다.
언제라도 크기를 키워서 휘두를 수 있게 준비했다.
“멈춰라! 저들은 적이 아니다!” 그때 누군가 달려와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마리난 제국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었다. 그가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못 본 사이에 잃어버린 팔을 되찾았는지 그는 두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부상을 회복했군. 축하하오. 악마의 마력을 몰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뭐, 그렇지.” 브라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못하오? 악마들이 날뛰는 것은 줄었을 텐데.”
“···많이 줄었소. 서서히 영역을 회복하는 중이었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시오?” 브라움은 한참이고 일행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으로.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것이오?”
“숲을 넘어서 왔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있었지. 아주 빌어먹을 일이.” 그는 성벽에 걸린 깃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국이 둘이 되었소.”
남부 제국 마리난의 정치적 상황은 악마가 날뛰기 전에도 썩 좋지 못했다. 내부 권력 다툼이나 승계 문제가 상당히 치열하게 엮여있었기 때문이다. 설명하고자 하면 무척이나 길었고, 솔직히 별 관심도 없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이반 역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제국이 갈라졌다고?’ 악마에게 영토의 삼 분의 일이 불타 사라졌는데 내부 분열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 갈라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유가 넘치는군. 둘로 찢어지고도 버틸 수 있으리라 여긴 거요?”
아이반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의 말투에는 무척이나 진한 실망감과 혐오감이 담겨있었다.
“···언제나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지. 앞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쉽게 여기기 마련이오.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었소.”
제국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씁쓸하게 답하자 아이반은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보았다. 그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하긴, 마리난 제국이 둘이 되든지 셋이 되든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군.”
아이반은 감정을 지우고 딱딱하게 말했다. 괜히 이런 일에 엮여서 귀찮아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얻을 것만 얻고 빠질 생각이다. 악마 대갈통을 부수는 것은 즐겁게 할 수 있으나, 인간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쪽에 서서 죄 없는 병사의 목숨을 거두고 싶지는 않았다. 씨부럴, 알아서 하라지.
“마리난 제국은 우리에게 보상을 약속했소.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소?”
“물론이오. 제국의 약속은 그리 값싸지 않소.”
비록 제국이 둘로 나뉘었다고는 해도 보상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마리난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세력이라면 더욱. 브라움이 손짓하자 병사들은 자세를 풀었다.
성문이 열리고 일행을 손님으로 맞이했다. ‘싸움이 꽤 격렬했나 보군.’ 성문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화살이 박혔던 구멍과 불길에 그을렸던 자국, 부서져서 새롭게 보수한 모습까지. 지우려 해도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아이반의 머릿속에 그날의 풍경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피의 동맹과 싸우고, 악마와 언데드에게 영토가 불타고, 이제는 나라가 둘로 쪼개졌으니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가득했다. 일행은 귀빈을 맞이하는 숙소로 안내되었다.
보통 때라면 타국의 사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곳이었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사방에 가득한 감시의 눈길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적어도 지금 수도를 장악한 세력은 일행을 크게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그럴만한 상황이긴 했다.
물론 기분은 무척이나 더러웠다.
“세계수를 지키고 돌아왔더니 웬 나라 하나가 작살났군. 아주 허탈한 기분이야.”
아이반이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서 그리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레인이 피우던 연초라도 입에 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성이 너무 높아서 약발이 받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답답한 표정의 아이반만큼이나 델피노 역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나라가 둘로 쪼개지다니. 지금 수도를 차지한 세력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수도를 차지한 것인지, 아니면 무사히 방어하고 쫓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명분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이럴 줄 알았으면 조용히 신전에 들러 사정을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영빈관으로 들어온 순간 운신의 폭이 무척이나 줄어버렸다.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해도 감시하는 자들이 금방 눈치를 챌 테니까. 일행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과 접촉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그러게 말이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아예 없지는 않군.”
아이반은 힐끗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위협을 물리치면서 고행자의 길을 접었으니 이제 그녀도 세계수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감시자라도 세계수 네트워크를 감시할 방법은 없으니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엘프는 무척이나 폐쇄적인 종족이었으나, 그렇기에 숲을 나간 고행자들이 정보망을 튼튼히 만들어놓았다.
요정의 숲을 구원한 고행자 엘프들이 세계수 네트워크와 연결된 상태로 돌아왔으니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주 내밀한 이야기까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레인은 근처에 있는 엘프에게 전해 들은 소식을 늘어놓았다.
“쿠데타의 중심은 둘째 황자. 지금 수도를 장악한 세력이야.”
“성공했군.”
“절반은. 첫째가 탈출했으니까.”
원래 나이가 많고 건강이 불안하던 황제는 제국의 절반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성황청에서 파견된 고위 사제가 신성력을 퍼붓고 귀한 약재를 물처럼 써서 겨우 숨은 붙들었으나 사실상 수명이 다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첫째가 거의 황위를 계승한 셈이었는데, 둘째 황자가 그것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했다.
명분은 세 가지였다. 아직 황제가 후계자를 공식 지명하지 않았다는 것, 일 황자가 병석에 누운 황제의 명을 사칭했다는 것, 일 황자의 행실이 방탕하고 무능하여 지금과 같은 국난을 이겨낼 재목이 아니라는 것. 능력이 넘치고 야심이 가득한 둘째는 수도를 지키는 강자들이 죄다 전장으로 빠져나간 틈을 노려 정권을 장악했다.
첫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동쪽으로 달아났다고 했다.
“서부와 북부는 원래 둘째를 지지했고, 일 황자는 남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았어.”
“한쪽은 멀쩡한 곳이고, 다른 쪽은 완전히 엉망이 된 곳이군.”
남부는 악마에게 무너지고, 북동부는 피의 동맹에 영토를 빼앗겼다. 첫째 황자의 지지기반이 크게 흔들린 셈이다.
“하지만 동부는 여전히 제국 최고의 곡창지대고, 피의 동맹과 전쟁 중이었기에 병사들도 많이 있지. 제국이 두 개로 나뉠 수밖에 없었어.”
둘째 황자가 정권을 잡았다고 모든 이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 욕심을 부렸다고 서부와 북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만 군대는 지금 당장 악마와 언데드, 이종족 반란 세력과 싸우는 것만으로 버거웠고, 대부분의 영주는 당장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급급했다.
제국 기사단은 황실의 계승권 다툼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는 정통으로 관망했고, 성황청은 비난 성명을 낼 뿐 직접 끼어들 수가 없었다.
“개판이군, 개판이야.”
쯧쯧 혀를 찬 아이반은 다시금 결심했다. 이 빌어먹을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얻을 것만 얻고 빠져나가겠다고. 다음 날 일행은 황성으로 초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