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57
각자 이레인과 델피노를 뒤에 태우고 눈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불어와 눈을 흩뿌려 적의 시야를 가렸다.
눈바람을 뚫고 달리던 늑대 기수들 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일행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을 날아가듯 달리던 슬레이프니르가 깜빡거린다. 더는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겠다는 듯 모습이 흐려졌다.
그 이상을 알아차린 아이반이 멈춰 세우자마자 슬레이프니르가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잠깐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녀석이 다시 아스가르드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탈것이 사라져 버리자 아이반과 이레인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미리 멈춰 두지 않았다면 아주 꼴사나운 모습이 될 뻔했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다가 갑자기 내팽개쳐지면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제법 당황스러웠을 거다.
그 자리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사나운 이빨과 델피노가 북풍의 정령마를 타고 달려왔다. 같이 출발했음에도 슬레이프니르의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북풍의 정령마가 속도로 밀린다니, 놀라운 일이야.”
이레인이 그리 중얼거리자 아이반이 오딘의 황금 팔찌, 드라우프니르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슬레이프니르는 본디 주신 오딘이 타고 다니는 노르드 신화에서 가장 빠른 탈것이오. 또한, 장난의 신 로키의 피를 이었으니 요툰과 신격의 후손인 셈이지. 물론 로키가 슬레이프니르를 자신의 자식이라 여기진 않았겠지만.”
당연히 아이반이 소환한 슬레이프니르는 본체가 아니었다. 그 모습과 능력을 일부 이어받은 분신에 불과 했다. 그나마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고.
아이반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예전보다 힘을 쓰기가 편하군.’
한번 발할라의 문을 열고 에인헤랴르를 소환한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아이반이 끌어올 수 있는 신의 권능이 훨씬 다양해지고, 본인이 가진 힘도 무척이나 깊어졌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발할라의 문을 연 것보다 세계수가 대악마의 핵을 전해준 것이 컸다. 아직 그것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아이반의 몸속에 신성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대악마의 핵은 원래 아이반의 수준에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수의 배려에 더해 아스가르드 신들의 권능으로 그것을 흡수했으니, 품고 있는 신성만 따지자면 이미 반신이나 다름없는 상태 였다.
이제 겨우 움튼 씨앗에 너무 많은 거름이 주어졌다.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거목이 될지, 이겨내지 못하고 썩어 사라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다가온다.”
사나운 이빨이 낮게 경고하자 아이반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우리가 제법 요란하게 달려왔으니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온 게지. 여기부터는 연합의 영역이니.”
고도로 훈련받은 레인저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기척을 줄이고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나, 일행의 날카로운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반 에시르손! 내 이름을 안다면 길을 열어 주시오.”
아이반과 델피노, 이레인, 사나운 이빨은 이미 대륙을 떨쳐 울리는 유명인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자들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행을 극도로 경계하던 레인저들은 결국 그들을 데려가기로 했다.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 었다.
레인저는 그들을 에스코트해서 요새로 안내했다.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주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전선에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을 대뜸 공격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몇 번의 신원 확인을 거치자 일행은 제법 귀하게 대우받았다.
지금은 병석에 누운 황제가 임명한 총사령관이 직접 그들을 반겨 주기 까지 했다.
“어서 오시오. 영웅이 이리 찾아왔군.”
마리난 제국 동부의 대영주 마르티스 후작은 일일이 일행의 손을 잡으며 환영했다.
“이곳은 빌어먹을 그린스킨과 싸우기 위해 온갖 곳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 그대들의 활약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마리난 제국에 알려진 일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악마의 침공을 경고하고 마경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악마들과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지에서 원시 거인과 싸웠던 일, 스페니안 왕국에서 수백 년간 숨어서 영지 하나를 장악한 마녀를 처리한 일, 몇 개나 되는 던전을 해결하고 악마와 뱀파이어 군주를 해치운 일까지 하나하나 굵직굵직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모든 일들을 듣고 있노라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르티스 후작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것은 역시 저 빌어먹을 그린스킨을 죽이기 위해서 겠지? 그대들이 함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미안하지만 참전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오.”
“···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는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소.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동맹의 영역을 건너가야 할 뿐, 전투 자체가 목적은 아니란 소리요.”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에 잠시 표정이 굳었던 마르티스 후작은 이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그 말이군. 어차피 저놈들의 영역을 건너려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그가 원했던 말은 아니었으나 아주 실망하지는 않았다. 비록 일행을 전쟁에 동원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들이 적들의 영역을 들쑤시면 그것 만으로 이득이었다.
“하지만 괜찮겠소? 겨우 넷이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저놈들이 허술하지는 않은데. 역시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안타깝게도 시련을 골라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어렵다고 하여 멈출 수가 없소.”
“그대들 같은 영웅을 강제할 자가 있단 말이오?”
“신격의 뜻을 거부할 수 있는 필멸자는 많지 않으니까.”
그 말에 마르티스 후작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아꼈다. 설마 신탁이라도 받았냐고 묻고 싶지만, 호기심을 억눌렀다.
“우리도 여유가 없어서 그대들을 크게 도울 수는 없을 거요.”
“이해하오.”
“무슨 임무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뜻을 이루시길 빌겠소.”
마르티스 후작을 만나고 나오니 이미 그들의 존재가 널리 퍼졌는지 몇몇 이가 사람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다.
그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이름이라면 역시 첫째 황자. 제국 수도를 장악한 동생을 피해 동쪽으로 도망쳤다는 그였다.
“마르티스 후작이 순순히 물러난 것을 보고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첫째 황자가 따로 부르다니, 뭐라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르티스 후작은 동부의 대영주이면서 첫째 황자의 장인이었다. 말하자면 가장 든든한 지지자.
그런데 처음 접견에 첫째 황자가 동석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서로 태도가 다른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둘 사이가 그리 끈끈한 편은 아닌 모양이다. 희미한 균열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델피노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시하겠소.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은 피곤하니까.”
둘째 황자를 만날 때는 받아야 할 보상이라도 있었지, 첫째 황자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만나봐야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개소리나 듣겠지.
이 빌어먹을 세상이 아직도 버튼 몇 개로 돌아가는 곳이었다면 아이반은 기꺼이 만났을 것이다. 별것 아닌 보상에도 순순히 귀찮고 복잡한 임무를 수행하며 제국의 분열이라는 흥미로운 이벤트에 끼어들었겠지.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흥미만으로 살아가기엔 이미 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알았다. 황제는 아무나 하라지.
‘상황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둘째 황자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격렬히 저항하는 세력은 드물고 대부분은 방관이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유로 상황이 최악이라고는 해도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그것만으로도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마리난 제국은 붕괴했고, 제국 황가의 권위는 사라졌다. 피의 동맹과의 전쟁이 끝나고 악마와 언데드의 손에 불타 버린 남부를 되찾는다고 해도 다시 하나가 될 일은 없으리라.
그게 각자도생의 길로 이어질지, 덧없는 권력을 향한 내전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암울 한 대륙의 미래를 생각하면 따로 힘을 뺄 여유가 없지 싶었다.
“소꿉장난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리는 새롭게 만들어진 전선을 피해서 동쪽으로 올라가겠소. 피의 동맹이 이쪽으로 몰아쳤으니 다른 쪽에는 틈이 있겠지.”
이번에 피의 동맹이 크게 몰아치면서 전선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이 막혔으니 크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동쪽. 인간은 다니지 않는 험한 길로 산을 몇 개나 넘을 생각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험준한 돌산, 온통 뒤덮인 눈과 얼음을 향해.
“이곳은 지리가 험해 전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소. 다수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보통이라면 미친 생각이었으나 그 들은 자신이 있었다. 혹한의 환경은 몇 번이나 겪었고, 인벤토리가 있는 이상 식량도 문제가 없었다. 길이 험해서 다수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적 또한 많지 않다는 뜻이니 들킬 위험이 적었다.
빠르게 계획을 수정한 일행은 새로운 루트를 지도에 대충 그리고 동쪽으로 향했다. 이쪽은 워낙 험해서 사람이 살지 않아 지도 역시 명확하지 않았다.
명목상은 제국의 영토였으나, 사실 아주 옛날부터 인간의 영역은 아닌 곳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길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보호색을 맞춰 눈처럼 새하얀 코트로 몸을 감싼 일행이 아슬아슬하게 튀어나온 돌을 밟고 산을 올랐다. 마력으로 감싼 손을 휘둘러 바위를 꿰뚫고 절벽을 건넜다.
그렇게 산 두어 개를 넘었을 때쯤, 아이반이 표정을 굳혔다.
“주력이 느껴지는군. 주술사가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모양이오.”
이런 험한 곳까지 영역을 만든다고? 어지간히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일행으로서는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부터 마력 사용은 줄이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하오.”
조금이라도 마력이 새어 나왔다가는 주술사가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다. 함부로 나무를 베거나 불을 피우는 것은 당연하고, 음식 역시 냄새가 적은 것들만 가능했다. 아마 건량이나 생식으로 배를 채워야겠지.
순찰하는 늑대 기수와 영역을 만드는 주술사를 모두 속여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일행은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돌을 밟으며 움직였다. 눈을 파고들어 잠을 잤고, 식사는 익히지 않은 풀과 버섯, 곱게 간 곡물을 먹었다. 혹시 예민한 늑대의 후각에 고기 냄새가 걸릴까 봐 육포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행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오크의 순찰이 잦았고, 주술사의 영역 또한 견고했다.
사나운 이빨은 은밀하게 숨겨진 함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얼마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무언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들이 이상함을 느낀 거다. 이쯤 되면 이미 발각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침입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을 거다. 정확한 위치는 들키지 않았으나, 그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아마 이번에는 말 타고 도망칠 수는 없을 거요. 싸워야겠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여기까지였다. 지금부터는 힘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위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