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60
은원을 끊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힘이었다. 오크를 죽이고 죽여서 더는 아이반에게 죽는 것이 흠이 아니게 될 때, 비로소 은원이 사라지 는 것이다.
이들은 커다란 명성을 가진 전사에게 죽는다면 오크투신 타르칸이 자신의 부족으로 데려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은원이 아니라 오크투신의 부족에 들어가기 위해 덤벼들겠지.
평화 따위는 지루한 것이라고 외치는 실로 광전사다운 방식이었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고.
“···쯧, 우리 오크들은 피로 새겨지지 않은 문장은 읽지 않지. 자랑스러운 전사의 문화이나, 또한 안타까운 야만성이로구나.”
긴 한탄을 내뱉은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쏘아 보낸 화살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크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우리에게 굴복하든, 우리가 그대를 인정하든 끝을 볼 수밖에. 피의 무게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시게.”
“그대도 나설 것이오?”
“글쎄, 원치는 않으나 나 역시 오크이니 그렇게 될 걸세. 다만 이것은 오크의 싸움이지 동맹의 싸움이 아니니 다른 종족은 막아 보도록 하지.”
그 말에 아이반은 얼마 전 보았던 트롤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싸우길 원하는 자들이 있을 텐데, 가능하겠소?”
“아직 내가 그 정도의 힘은 있다네. 사실 다른 종족이 오크와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면 조만간 뵙겠소. 그때는 대화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그때 보세. 기다리고 있겠네.”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흙과 이끼, 눈덩이가 되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제 역할을 다한 분신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떠나자 아이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이 끝나지 않기는, 개뿔.”
열두 번째 대주술사가 되기 위한 수련은 거의 끝난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주술사의 대스승 크뮨이 테잔의 외부활동을 용인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대지의 심장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먼 곳에서 이곳 까지 분신을 보낸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평범한 주술사라면 엄두도 못 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실력만으로는 이미 대주술사의 경지 에 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온천과 뜨끈한 국물에 풀려있던 몸과 정신이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졌다. 아이반의 마음도 모르고 흡족해하는 아스가르드 신들의 시선이 느 껴졌다.
오크투신 타르칸, 아스가르드의 신 들.
하여간 죄다 빌어먹을 놈들이다.
혹한의 날씨와 우글거리는 몬스터를 이겨내고 설산을 넘고 넘었다. 그렇게 크게 우회해서 다시 피의 동맹이 지키고 있는 영역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부터 대지의 심장까지 는 일직선이었다. 그들의 영역을 통과하는 길로는 최단 거리였다.
이미 일행의 존재는 다 파악되어 있었다. 오크들은 마치 국경선을 지키듯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을 쏘아 날리면 금방 도착할 거리임에도 오크들이 공격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평범한 싸움이 아니라 증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래서 오크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도전해라. 기다리고 있겠다.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런 자신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우리가 아무렴 저런 오크 병사들 에게도 무시당할 정도는 아닌데. 하긴 이게 오크의 자존심인가?’
원래 계획은 최대한 전투를 피해 몰래 대지의 심장에 들어가는 것이 었는데, 이제 그런 식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철저하게 전사의 방식대로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욕 당했다고 여긴 오크들이 끝까지 따라붙어서 아이반의 목을 베려고 할 테니까.
피해서는 안 된다. 도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숨을 수도 없었다. 덤비는 녀석들을 죄다 박살 내고 앞으로 가야만 했다. 그게 오크들이 생각하는 전사다운 것이었다.
아이반, 사나운 이빨, 이레인, 델 피노.
단 네 명이 앞을 막고 있는 오크들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주 아찔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옛 신의 화신과도 싸웠고, 원시 거인도 보았으며, 뱀파이어 군주와 깨어난 드래곤, 대악마와도 싸웠다. 겨우 오크들이 앞을 막아선다고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이반이 기다리고 있던 오크들 코 앞까지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도망치지는 않았군, 노르드의 전사.”
어느 오크가 그리 말을 내뱉자 아이반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대꾸 했다.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대들인데.”
“배짱은 좋군. 스스로 증명할 자신이 있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묻자 아이반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들을 깔아보았다.
“이건 우리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오. 감히 우리의 앞을 막을 자격이 있는지 그대들을 시험하는 것이지.”
아이반의 도발에 오크들이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근육이 꿈틀거리며 무기를 굳게 쥐었다. 당장이라도 휘두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다.
바닥에 퉤하고 침을 뱉은 아이반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어디 시작종이라도 울려야 하오? 오크는 싸우기 전에 계약서라도 쓰고 덤비나? 준비되었으면 빨리 덤비시오. 갈 길이 머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도끼가 날아왔다. 파괴적인 마력이 휘몰아쳤다.
한때 그러한 오크 전사의 공격은 공포였다.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었고 절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휘이잉!
아이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폭풍이 그대로 어두운 용의 발톱으로 이어졌다. 손바닥 크기의 창이 순식간에 길어지고 휘감은 폭풍이 주변을 후려쳤다.
쾅!
거친 기세로 달려들던 오크 전사 십수 명이 그대로 피를 뿜으며 날아 갔다. 그 뒤에서 공격 기회를 노리 고 있던 자들 역시 한참이고 뒤로 밀려났다.
흙먼지를 뚫고 나타난 아이반이 오크들에게 말했다.
“약하면 빠지시오. 한심하게 뒈지기 싫으면.”
오크투신 타르칸이 처음 도끼를 휘두른 이후로 오크들에게는 투쟁이 곧 삶의 목표였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었으나, 강해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였다. 후퇴는 죄가 아니었으나, 죽음의 두려움으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은 죄였다.
약하면 빠지라, 한심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아이반의 그 말은 오크를 위축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오크들이 뒤로 물러나지 않게 만들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오크투신 타르칸에게 하찮은 싸움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투신의 자손이다!”
날카로운 바람에 베여 피를 흘리던 오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반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전장에서 목숨 을 불태우기로 다짐한 오크 전사들이 용맹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팔이 잘려도 달려왔다. 다리가 잘리면 기어 왔다. 내장이 뚫려도 도끼를 휘둘렀고, 목이 잘려 허공에 떠오른 상태에서도 노려보았다.
양팔이 사라진 오크 전사가 검을 물고 덤벼들다가 심장이 꿰뚫렸다. 흘러나오는 창자를 한 손으로 모아 쥐고 창을 휘두르던 누군가는 뜨거운 불길에 시커멓게 타버리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오크투신 타르칸을 모시는 전사들은 죽음의 그 순간까지 단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실로 광기의 영역에 도달한 전투의지였다.
“적의 목을 베어라!”
거칠게 소리치는 오크들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근육이 꿈틀거리면서 부풀어 오르고, 눈빛이 반쯤 맛이 갔다. 자잘한 상처는 물론이고 목숨을 끊어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끓어오르는 투쟁심이 오크투신 타르칸의 권능을 불러온 것이다. 단번에 모든 능력이 강해지는 광화 상태였다.
짧은 시간이 지나면 무척이나 약해 지고, 자칫 영구적인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 목숨을 바친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벼운 대가였다. 어차피 다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쾅!
오크 전사들을 날려 보내던 아이반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전보다 손맛이 단단했다. 이전보다 더욱 목숨이 질겨졌다. 구체적으로는 심장이 꿰뚫린 자가 끝끝내 아이반의 창을 부여잡고서야 숨이 끊어질 만큼.
그러나 그렇게라도 아이반의 움직임을 멈추고 틈을 만들어 보려던 오크 전사의 노력은 의미가 없었다. 겨우 그 정도로 아이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슈우욱!
어두운 용의 발톱, 드래곤의 뼈와 아다만트로 만들어진 아이반의 창이 순식간에 길고 두꺼워졌다. 이미 죽어 버린 오크 전사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다른 녀석의 척추를 끊어내고 또 빠르게 짧아졌다. 그렇게 오크 전사의 손을 탈출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까지 줄어든 어두운 용의 발톱이 제 모습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오크의 몸이 갈라졌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길이를 바꾸는 것만으로 오크 전사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쓰러졌다.
쿵!
아이반은 강하게 발을 구르며 창을 휘둘렀다. 검을 내밀던 오크가 갈기갈기 찢겨서 흩어졌다. 그 핏물이 폭풍과도 같은 바람에 휘날려 땅을 적셨다.
전사들의 피로 길이 만들어졌다. 붉디붉은 그 길을 밟으며 아이반이, 사나운 이빨이, 델피노와 이레인이 앞으로 나아갔다.
사나운 이빨이 방패를 휘두르자 건장한 오크 전사의 몸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튕겨 나갔다. 검을 휘두르면 통째로 쪼개져 바닥을 굴렀다.
이레인의 화살이 오크의 단단한 두개골을 가르고 박혔다. 정령이 오크의 몸을 불태우고, 얼렸으며, 찢고, 짓눌렀다.
델피노가 지팡이를 부여잡고 기도를 올릴 때마다 신성력이 퍼져나갔다.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 이레인의 몸에 생겨난 자잘한 상처가 사라지고 체력이 차올랐다.
팅!
아이반은 창을 반쯤 돌리는 동작만으로 자신을 노리던 화살과 도끼를 걷어냈다. 그리고 그 방향을 포착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치지직!
공기가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푸른 번개가 땅을 타고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