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67
아이반의 창이 꿈틀거렸다. 궁니르의 권능이 공간을 뛰어넘어 테잔의 육신을 베었다.
그것은 거짓. 대주술사가 뿌려 놓은 분신. 그러나 아이반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집중했다. 모든 분신을 찌르면 결국 본신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찌르고, 베고, 짓눌렀다. 그 와중에 땅이 갈라지거나 용암이 그들을 덮쳤지만, 아이반은 그저 테잔을 찾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스물세 번째. 대주술사의 분신을 꿰뚫던 아이반은 그곳에서 아주 미묘한 흐름을 발견했다. 그의 추적이 마침내 대주술사에게 닿은 것을 확신했다.
“저쪽!”
아이반이 방향을 가리키자 델피노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생명의 한 조각을 신상으로 삼아 빛의 신 아룬에게 청원했다.
“우리에게 빛을 내려 주소서. 진실을 비출 한 줄기 희망을 원하나이다.”
델피노의 성흔이 빛나고 그의 등에서 후광이 떠올랐다. 천상의 신이 그의 청원을 받아들여 하늘을 가르고 친히 빛을 내려 주었다.
화아아-
빛이 닿는 곳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뜨겁게 불타오르던 화산의 모습이 찢어지고 푸른 숲의 모습이 보였다. 대주술사가 만들어 낸 결계, 인위적인 차원의 틈을 찌르고 진실을 밝혔다.
“컥!”
억지로 공간의 틈을 비틀어 열었던 델피노가 내상을 입어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가 밝힌 빛은 헛되지 않아 아이반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치지직!
쾅!
발에 천둥을 휘감아 밟고 지나갔다. 그렇게 공간을 뛰어넘어 틈새에 다가가자 땅에서 새로 숲이 솟아나 아이반을 밀어내려 했다.
수많은 나무가 길을 막고 폭포가 아이반을 붙잡았다. 그사이 테잔이 찢어진 틈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점차 공간의 틈이 사라지고 있었다.
쉬이익!
이레인이 쏘아 보낸 화살이 공간의 틈을 꿰뚫어 고정했다. 완전 발동 상태는 아니었으나, 세계수의 힘을 담았기에 일순간 술식의 뒤흔들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벌려진 틈으로 아이반이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전쟁과 법, 용기의 신을 외쳐 불렀다.
“티르!”
아이반의 오른쪽 손에 가느다란 끈이 묶였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얇고 가는 끈이었으나, 무엇보다 질기고 튼튼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글레이프니르, 아스가르드와 아홉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봉인구.
아이반의 오른팔이 마치 잘려 나간 듯 감각이 사라졌다. 힘이 하나도 없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테잔의 몸 역시 묶였 다. 그가 뿜어내던 그리고 받아들이던 힘의 흐름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스스슥-
테잔이 만들어 낸 세상이 무너진다. 인위적으로 구현한 자연의 분노가 거짓이 되어 흩어졌다. 주술을 조율해야 할 테잔의 힘이 억눌리고 그를 보조하던 주술사들의 기운이 끊어지자 빠르게 사라졌다.
“이런······!”
자신의 오른팔과 이능을 대가로 상대의 모든 이능을 봉인하는 티르의 권능.
남은 것은 오로지 육신의 힘뿐이었고, 외부의 간섭도, 내부에서의 탈출도 불가능한 상남자의 결투만이 남아 있었다.
“이 꽉 깨무시오. 턱 돌아가기 싫 으면.”
퍽!
아이반이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테잔을 후려쳤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도 나름 오크라 연약한 몸은 아니었으나, 늙은 주술사가 전사의 주먹질을 견딜 수는 없었다.
테잔이 단번에 뒤로 나가떨어지며 피를 뿌렸다. 코뼈가 뭉개지는 감각 이 선명했다.
“크억!”
거친 신음을 터트린 테잔이 자리에 서 일어나려 했으나, 정신이 어질어질한 모양인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던 아이반은 다시금 주먹을 휘두르려다 말고 급히 허리를 꺾었다. 날카로운 얼음 화살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글레이프니르에 묶인 상태로 주술을 사용한다고?’
지극히 유리한 상태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대주술사의 주력을 완전히 봉인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반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졌다.
“이것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줄 아는가!”
테잔이 글레이프니르에 묶인 상태에서도 거칠게 주력을 내뿜었다. 비록 외부에서 그를 보조하던 주술사 들의 기운은 막혔으나, 그가 가지고 있던 주력을 완전히 봉인할 수는 없 었던 모양이다.
역시 대주술사. 규격을 초월하는 자연의 화신.
“주술은 나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네.”
바닥에 피를 퉤 뱉은 테잔이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이반의 전신에 서늘한 위기감이 가득했다.
아이반이 옆으로 피하자 바닥에서 뾰족한 바위가 솟구쳐 방금 그가 있던 곳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살갗을 베었고,
웬 나무뿌리가 그의 다리를 붙잡기도 했다.
모든 이능을 잃어버리고 오른쪽 팔은 짐짝이 되어 버린 아이반에게는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힘겨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겨우 이런 수준의 불리함은 아이반의 인생에서 너무나 흔히 경험한 것이었으니까.
탁!
발을 묶은 나무뿌리를 끊어 내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왼팔 하나로 창을 휘두르며 얼음 화살을 튕겨 내고, 화염구를 걷어 냈다.
창수는 끝까지 창을 쥐고 있어야 한다. 손이 아닌 마음으로라도.
아이반은 라인하르츠 공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창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창이 그저 무겁기만 했다. 마력이 봉인된 상태로 바위를 밀어내고 불길을 막아 내려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몸에 잠든 신성과 언젠가 한껏 뒤집어썼던 용의 피가 테잔의 주술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살갗이 찢어지고, 베이고, 터지고, 짓눌려도 아이반은 한 번 더 창을 휘두를 기회가 있었다.
캉!
무거웠던 창이 점차 가벼워진다. 제멋대로 흔들리던 창이 점차 마음 대로 휘둘러졌다. 마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던 움직임이 지금 아이반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비로소 마음으로 창을 잡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힘은 있었으나 깊이는 얕았던 아이반에게 깨달음이 차올랐다.
찌르고, 후려치고, 베고, 걷어 내고, 누른다.
가장 기본적인 창의 원리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행동조차 낱낱이 분해되어 새롭게 다가왔다.
스걱!
아이반의 창이 테잔의 주술을 갈랐다. 마력 하나 없는 그의 창이 테잔의 주술을 상쇄했다.
그 순간, 테잔은 깨달았다.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미래의 태동을.
본인이 보았던 미래는 모두 헛된 것이었고,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주술사, 어두운 미래를 엿보고 세계의 미래를 위해 고뇌하던 현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환호했다.
자신은 틀렸다. 그러나 희망을 보았다.
우웅-
당장에라도 아이반의 몸을 짓눌러 터트려 버릴 수 있는 막대한 주력을 스스로 흩어 버렸다. 그리고 아이반 의 창에 기꺼이 몸을 내밀었다.
쾅!
아이반은 그를 베어 내는 대신 후려쳤다. 그리고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확인 하고서야 창을 내렸다.
“후우······.”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깨달음을 음미하던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위대한 자, 주술사의 대스승, 크뮨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게 대스승, 크뮨? 반신이라고? 웬만한 신격보다 더한 것 같은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그가 있음직한 곳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쯤 하면 되었소? 이제는 만날 수 있겠소?”
그 질문에 답하듯 숲이 갈라졌다. 대지의 심장이 비로소 낯선 이들을 환영했다.
대지의 심장은 세계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영맥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땅에서 솟구치는 정기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데, 마치 심장박동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감이 좋은 사람일수록,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일수록 이 땅의 가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반은 물론이고 일행의 그 누구도 주술사가 아니었으나, 이곳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겸허해졌다. 그리고 세상 만물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될 것 같았다.
스스슥-
나무가 스스로 굽히고 바위가 저절로 움직이고 강물이 몸을 틀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긴 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자그마한 오두막이 나타났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너무나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위협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것이 놀랍기만 했다.
열린 문을 통해 일행이 안으로 들 어가자 누군가 차분한 표정으로 차 를 마시고 있었다. 주술사의 대스승, 크뮨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