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68
그는 언뜻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으 나, 그렇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식물 의 잎과 뿌리였으며, 눈동자와 손발 톱은 보석, 피부는 흙, 뼈는 돌이었 다. 심장은 피 대신 마그마를 뿜어 냈고, 땀 대신 순수한 물을 흘리며, 한 점 숨결에 폭풍이 담겨 있었다.
“그 아이는 저기 눕혀 두십시오.”
크뮨의 말에 사나운 이빨이 짐짝처럼 어깨에 얹어 놓은 테잔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자 창백하던 테잔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거칠던 호흡마저 부드럽게 변한걸 보면 평범한 침대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는 뱀신 모르나의 의뢰를 받아 그녀의 오래된 육신을 되찾으러 왔소.”
아이반의 말에 크뮨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살피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가 투명한 눈으로 일행을 보았 다. 아이반 역시 그와 눈을 마주했지만, 생명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상과도 같은 자였기에 감정을 읽기란 어려웠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흐르는 물길에 감정은 없었다. 그저 그러할 뿐이다.
“그러면, 주시겠소?”
“고민 중입니다. 어떤 흐름을 선택 해야만 하는지.”
대스승 크뮨은 이 세계에서 최초로 주술을 깨닫고 그것을 퍼트렸던 자였다. 그리하여 최초로 대주술사이자 가장 순수한 자연의 화신이었다.
그의 눈은 지금도 끊임없이 미래를 엿보고 있었고, 쉴 새 없이 갈라지는 미래의 갈림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미래는 무한정했기에 그의 고뇌는 끝나지 않았다. 그 무한정한 미래의 대부분이 절망과 파멸로 뒤덮여 있음을 알았기에 더욱 침묵했다.
“…지금과 같은 흐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원래 대악마에게 쓰러졌어야만 했습니다. 세계수는 불타고, 뱀신 모르나는 더욱 비틀려야만 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오크의 땅을 건널 수는 없었을 거고, 테잔을 넘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담담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여기까지 왔군요. 이런 미래는 낯선 것이었고, 이 미래가 향하는 방향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특이점이 결국 대륙의 역사를 이리도 크게 바꾸었군요.”
그때 사나운 이빨의 몸에 뱀신 모르나의 신성이 가득 차올랐다. 원래 크뮨의 영역에 다른 신격이 끼어들 수는 없었으나, 주인이 굳이 막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을 모시는 전사의 몸을 통해 이곳에 나타날 수가 있었다.
“말이 길다. 올지 안 올지 모를 미래에 매몰되어 자신의 운명을 바쳤으나 지나친 신중함이 결국 그대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구나.”
사나운 이빨의 얼굴로 한껏 요염한 표정을 짓던 뱀신 모르나가 의자에 앉아 크뮨을 내려다보았다.
“결정하지 못하겠다면 이번에도 방관하라. 그대가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리하면 될 것이 아니냐?”
대스승 크뮨은 최초의 대주술사였다. 아득한 미래에 닥칠 거대한 어둠을 보고 평생을 준비한 자였다. 그러나 너무나 거대한 절망은 그의 몸을 붙잡는 사슬이 되어 정작 어둠이 닥쳤을 때조차 이것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미래에서도 지금처럼 고뇌만 계속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이자 진정한 의미의 관찰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부활이 향하는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당신 역시 그럴진대, 어찌하여 그것을 택했습니까?”
“무지는 곧 축복이니라. 알고 있는 행복과 모르는 불행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후자를 택한다. 그것이 나의 본질이고 그게 나의 욕망이로다.”
“그 욕망이 위험하니 테잔이 그대의 부활을 그리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그러지 않았지. 감히 주술사의 대스승이 막으려 했다면 이 아이들이라고 한들 이곳까지 올 수 있었겠느냐?”
그 말을 들은 대스승 크뮨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기묘한 조각이 나타나 뱀신 모르나에게로 향했다.
우웅-
기묘한 힘의 파동을 느낀 아이반은 조금 전해진 것이 뱀신 모르나의 잃어버린 육신의 조각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모양이었다.
“방관자야, 이번 흐름에서도 그럴 생각인가?”
“나는 당신들의 노력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확신이 들지 않으면 결코 움직일 수 없으니, 최악의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 나의 몫일 겁니다.”
“멍청한 선택이고 한심한 고집이다. 하나 그 또한 그대의 본질이겠지.”
대화를 마무리한 뱀신 모르나가 힐끗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특한 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제법 묘목이 자랐구나.”
아이반은 그게 자신이 품고 있는 신성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필멸자를 벗어나 초월자를 향해 뻗어 가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짚은 말이었다.
“아직 멀었소.”
“그래, 멀었지. 하나 아주 흥미롭구나. 누천년 만에 발견한 즐거움이니라.”
마지막까지 요사스러운 눈웃음을 짓던 뱀신 모르나가 사나운 이빨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사나운 이빨은 자신의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얼굴로 지었던 표정이 영 어색했던 모양이다.
“뱀신의 매력은 나의 육신으로 표현하기에 너무나 버겁다.”
그가 작게 투덜거리는 것을 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려 크뮨을 바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투명한 눈으로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당신을 만나면 한 가지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을 수 있다던데, 맞소?”
대스승 크뮨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주술사이자 예언가였다. 수 없이 미래를 엿보았기에 온갖 세상의 비밀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현자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묻고자 합니까?”
그 말에 아이반은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때로는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내뱉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 모든 궁금증을 억눌렀다. 대부분은 크뮨에게 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어디로 가면 라이칸스로프를, 죄 많은 발톱의 족장, 볼타르를 만날 수 있겠소?”
대스승 크뮨은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침묵했다. 더운 찻물이 두어 번 다시 데워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겨우 답했다.
“강철 산맥으로 가면 달의 여신이 내린 시련을 수행 중인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러나 그들을 만나는 길이 절대 순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뱀신 모르나가 온전히 부활하면 결국 차원 방벽이 무너질 테니, 지금껏 당신을 노려보고만 있던 자들이 움직이겠죠.”
그 말에 떠오르는 자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아이반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금껏 걸어온 길도 거칠긴 마찬가지 였으니까.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테잔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도 같이 가지. 자네가 이겼으니 자네가 선택한 결과를 봐야만 하겠어.”
아이반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다가 되물었다.
“괜찮겠소? 동맹은 어쩌고?”
“동맹은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갈 텐데, 뭐. 거기에 자네가 강자의 증명을 완료했으니 더는 사적인 원한으로 덤비는 자가 없을 거야. 어차피 자네도 동맹과 전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 싸우던 자와 친구가 된다는 소년 만화식 동료애는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륙의 균열은 피의 동맹으로도 뻗어졌고, 지금껏 개입하지 못했던 사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린스킨의 영역을 돌아다닌다면 그가 함께하는 편이 좋았다.
팔짱을 끼고 깊이 고민하던 아이반은 동료들과 눈빛을 마주하고는 결정했다.
“좋소.”
아이반이 손을 내밀자 테잔이 그것을 붙잡았다. 돌고 돌아 이리되니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대스승 크뮨의 거처를 벗어 나고 한참이나 걸어 거리를 벌린 후에야 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크뮨은, 대체 뭐지?”
정신체의 특성이 남아 있는 엘프인 이레인은 크뮨의 존재를 더욱 선명 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알았다. 그는 이런 형태로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크뮨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최초의 주술사, 위대한 선지자,
자연의 화신. 그러나 그는 반신이지 신격이 아닌데 어째서……?”
“대스승께서는 신격이 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되지 않은 것이라네, 엘프.”
“…이레인.”
아이반이 끼어들어 호칭을 정정하자 테잔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그래, 이레인.”
그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던 신경 쓰지 않는 이레인은 테잔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신격이 되지 않았다고?”
“엄밀히 말하면 필요가 없었던 게지. 그분은 자연의 화신이니 천상에 올라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건 틀린 말이야. 자연물의 신격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에 답한 것은 아이반이었다. 오래된 옛 기억을 뒤적이던 그가 크뮨의 거처가 있는 방향을 홀깃거리며 설명했다.
“천상에 올라가면 더는 움직이지 못하오. 차원 방벽 때문에 직접적인 개입이 힘들지.”
그래서 세계수는 요정의 숲에 자리 잡았고, 뱀신 모르나는 육신을 버리는 것으로 지상에 남았다. 크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소. 그러나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지.”
그는 만약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어둠에 물들어 멸망한다면 세계의 씨앗을 다른 세계로 옮길 계획이었다. 지상에 남아 언제 찾아올지 아닐지도 모를 멸망을 기다리며 방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미래에도 특별한 활약이 없어서 그저 설정만 그럴 듯한 반신인 줄 알았으나, 아이반은 그를 실제 보고서야 그 강력함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마 신격을 얻지 않고 반신을 유지하는 것도 그 편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겠지.
‘그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돕는 다면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아쉬워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크뮨이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그는 최후의 최후에나 움직일 테니까.
그렇게 대지의 심장을 벗어나 그린 스킨의 들판으로 돌아온 순간, 테잔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