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69
미약하고 은밀한 감시의 눈길이 사라졌다. 그것에서 풍기는 불길한 마력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건 마녀의 방식인데……. 마녀 가 감히 대지의 심장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잡스러운 것들이 함부로 살필 수 있을 만큼 대지의 심장이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테잔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크뮨이 그리 경고했나 보군.”
마녀 그리고 그들이 모시는 악신.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던 그들이 마 침내 참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마녀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델피노가 양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신성력을 내뿜으니 아이반이 말렸다.
“마녀가 나타난 것은 아니오. 그저 감시용 사역마나 날려 보냈을 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녀가 함부로 대지의 심장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감시용 사역마가 이리 가까이 다가 온 것도 결국은 대스승 크뮨이 아이반에게 경고하기 위해 용인했기 때문이고.
그러나 테잔의 표정은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명색이 열두 번째 대주술사인데 이런 얕은 수작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물론 테잔은 일행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주술사의 주력과 대지의 심장의 영맥을 묶어 아예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주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따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으나, 그건 대주술사에게는 변명이 되지 못했다.
“이거 영 면목이 없군. 이래서야 어디서 대주술사라고 떠들 수가 있겠냔 말이야.”
아이반이 그런 테잔을 위로했다. 과연 위로가 되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잘못이 아니오. 그저 마녀가 조금 더 유능했고, 조금 더 치밀하게 수작을 부린 게지.”
“말이 묘하군.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모른 척하기는. 악마들이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그리 수작질을 했는데 과연 동맹이라고 가만히 내버려두었겠소?”
신뢰의 연합에서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다면 피의 동맹에서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반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행되는 세상이니 지금쯤 꽤 심각한 상황일지 몰랐다.
“마리난 제국이 악마에게 갈려 나갈 때 피의 동맹은 그저 전선을 유지하고만 있었지. 그건 정말 본인들의 뜻이었소?”
악마가 영토의 삼분의 일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제국은 크게 쇠약해졌다. 그것을 피의 동맹은 그저 지켜 보고 있다가 악마가 사라진 지금에야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굳이 밀고 내려가 악마와 직접 싸울 필요가 없으니 방관한 것 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대륙의 위험을 공감하였기에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피의 동맹이 기다려 준 것이라 설명했다.
누군가는 마리난 제국이 악마에게 피폐해져 무너질 때를 노리고 전략적 인내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피의 동맹은 왜 마리난 제국이 악마와 싸우며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어째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피의 동맹은, 특히 오크들은 싸움을 보고만 있지 않소. 전략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이 오크 투신 타르칸 에게 바칠 위대한 싸움이고, 게다가 대악마라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대지.”
오크들이라면 차라리 전선을 밀고 내려가 악마와 싸웠을 것이다. 기다리느니 창을 던질 것이며, 참아 내느니 도끼를 휘두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싸움을 방관했다면 그건 다른 이유였다. 이미 다른 싸움 을 하고 있었던 경우.
“무언가 이쪽에서 날뛰고 있었겠지. 그래서 미처 악마와 싸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오?”
자연의 구도자 테잔은 묘한 표정으로 아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쪽도 나름대로 일이 많았다네. 나야 대주술사가 되기 위한 시련 중이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군.”
“그게 마녀와 관련이 있었소?”
“그건 아니었어. 하지만 흐름을 보면 마녀의 수작일지 모르겠네.”
그 말에 델피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쪽은 악마가, 한쪽은 악신이. 어딘가 익숙한 협력이군요.”
“익숙하다면?”
“대전쟁을 말하는 겁니다. 신화시대의 종결.”
악마와 악신은 흔히 혼동되는 존재였다. 보통의 대중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위험하고 사악한 자들이라 여겼지만, 엄밀히 따지면 악마와 악신은 전혀 결이 달랐다.
악마는 곧 마계의 존재이며 이계의 침략자이지만, 악신은 엄연히 이 땅에서 탄생한 신격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를 이 땅에서 태어나 신격이 되었으나, 그 본질이 너무나 사악하여 차원의 저편으로 유폐된 자들. 그것이 바로 마녀가 모시는 악신이었다.
“마녀가 모시는 악신은 하나가 아닙니다.”
모처럼 신학에 대해 논하게 된 델피노가 다소 딱딱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테잔이나 이레인이야 이미 알고 있 는 것이겠지만, 아이반이나 사나운 이빨은 그렇게 자세히는 알지 못했기에 귀를 기울였다.
“애초에 신격의 선악이라는 것을 필멸자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마녀들이 숭배하는 악신은 신격마저도 기겁할 정도로 사악하게 비틀린 자들입니다.”
창조가 있으면 파괴가 있고, 삶이있으면 죽음이 있었다. 한 세계에서 탄생한 신격은 그 모든 방향으로 뻗어 있으니 파괴적인 신격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오크 투신 타르칸만 해도 아주 폭력적인 존재였고, 뱀신 모르나 역시 악신인지 아닌지 모호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마녀들이 모시는 악신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낳은 온갖 불합리한 공포와 절망, 사악한 관념의 집합체이며, 그렇기에 품고 있는 비틀림이 너무나 커서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점차 다른 이들과 악신들의 사이가 벌어졌다. 악신들은 비록 이 땅의 신격이었으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러다가 신화시대의 끝 무렵, 악신들이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다. 거인과 요정, 드래곤, 신격과 악마가 뒤섞인 대전쟁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치열한 싸움 끝에 그들을 세상 밖으로 쫓아낸 후 두꺼운 벽을 세웠으니, 그게 바로 차원 방벽이고 신화시대의 종결이었다.
“당시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킨 악신의 수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열이 넘습니다. 그중에서 도대체 어떤 존재가 나선 것인지 모르겠군요.”
“대부분은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겼고, 깊은 어둠 속에 봉인되었어. 남은 자들은 한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에 불과할 거야.”
“그렇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그들은 대악마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니까요.”
비록 추방된 자들이나 그들이 가진 신격의 근원은 이 세계이니 신성을 펼치는 것에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성황청은 악마 숭배자보다 마녀를 더 경계했던 거다.
“마녀는 당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였소. 그 손길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이제 흔적을 드러냈다는 말은 대강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전에 보았던 마녀를 상상해서는 안 되겠군.”
“그 오랜 세월을 버틴 자들입니다. 성황청이 뿌리를 뽑으려고 해도 찾지 못했죠. 그런 자들이 이리 당당히 나타난 것을 보면 자신이 있다는 소립니다.”
마녀, 악신.
껄끄러운 이름이었으나, 새삼스러운 것은 없었다. 앞을 막아선다면 머리를 쪼개야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일단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요. 다들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니니 싸울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어 둬야지.”
그러면 요정의 숲에서 회복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테잔이 턱을 긁적 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게. 휴식도 할 겸, 마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면 그를 만나는 게 최선이니까.”
일행은 테잔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깊은 산맥으로 들어갔다. 보통 이런 험한 곳은 몬스터가 우글거리기 마련인데, 어째 썩 위험해 보이는 놈들이 없었다.
가끔 호랑이나 늑대, 곰, 멧돼지 같은 맹수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진짜배기 괴수들에 비하면 귀엽기만 했다. 그리 거칠어 보이지도 않았고.
“어째 평화롭군. 숲이 아니라 잘 가꿔진 정원 같아.”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테잔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싸울 수가 없거든. 마수처럼 흉포한 놈들은 차마 견디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지.”
이곳에 있으면 자연히 투쟁심이 줄어든다고 했다.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야 그저 투쟁심 만의 문제가 아니니 괜찮지만, 그저 폭력적이고 흉악하기만 한 녀석들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크들에게는 투쟁심이 삶의 모든 것일 텐데, 참으로 끔찍한 곳이군.”
“그래서 몇몇 전사는 이곳을 좋아 하지 않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존중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곳에 있는 것은 테잔의 선배였다. 또 다른 대주술사.
그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에 평화를 내리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한다는 위대한 자연의 화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대스승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일세.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배울 것이 많았지. 정신적인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그때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지저귀는 새소리 같기도 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기도 했으며, 내리쬐는 햇빛이나 봄바람 같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 지팡이에 달린 작은 종을 흔들면서 누군가 걸어왔다. 다른 이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의 트롤이었다. 그러나 피부가 자글자글하고 허리가 굽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노인이기도 했다.
“거 귀한 손님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찾아왔으면 냉큼 인사나 하지 않고.”
늙은 외모와 달리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가 까랑까랑하게 소리치자 테잔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그 꼬맹이가 정말로 대주술사가 되다니, 확실히 세상이 망할 때가 되기는 되었어.”
트롤 노인은 그리 쏘아붙였으나 눈빛에는 기특하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등을 쓸어 주는 손길도 따뜻했다.
‘김첨지 같은 자로군.’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확신하지는 않았다. 혹여 외상 안 되냐고 물어보면 정색하면서 ‘그 건 곤란합니다, 손님.’을 외치는 욕쟁이 할머니일지도 모르니까.
“어르신, 이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