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0
“알고 있어.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얼마 전에 그라드발을 죽사발로 만들어 여기로 보낸 놈이 이놈이지? 나는 메신이야. 지팡이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중늙은이지.”
메신이 짐짓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을 소개하자 뒤에 있던 테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 지팡이를 휘둘러 한 방에 히드라 대가리 아홉개를 터트리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와. 다른 건 못 해 줘도 따뜻 한 물에 풀 쪼가리 몇 개 띄워 줄 정도는 되니까.”
그렇게 메신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깊은 산맥에 있다고는 믿기 힘든 큼지막한 건물이 보였다. 사나운 이 빨은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약 냄새 때문에 코가 간지러운 듯했다.
“으흠, 따끔하다.”
“흘흘, 냄새가 독하지? 망할 놈들이 허구한 날 쌈박질이나 하고 그러니 약 냄새가 빠지질 않아.”
“쌈박질이라뇨, 어르신.”
“그러면 쌈박질이지, 이게 뭐야!”
들어 보니 피의 동맹에서 정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이곳에서 몸을 회복한다고 했다. 메신은 최고의 치유사라 죽은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지독한 상처라도 치유한다는 것이다.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많은 자가 헛되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그걸 알면 싸우질 말아야지. 매일 전쟁이다, 전투다, 그리 소리치면서 피나 묻히고 말이야.”
쯧 하고 혀를 찬 메신이 누워 있 는 환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죽을 놈은 죽어야지.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야.”
메신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이제 대충 그의 성격을 파악한 일행은 걸러 들었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정이 많은 자였다.
그걸 깨달은 모양인지 메신은 괜히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그러면 물은 대충 끓였으니까 들어와.”
스스슥-
바람이 불고 메신의 육신이 나뭇잎이 되어 흩어졌다. 테잔이 즐겨 쓰는 분신술이었으나,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아이반이 미처 분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원조는 따라갈 수가 없더군.”
어깨를 으쓱인 테잔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완전히 나무와 하나가 되어 눈을 감고 있는 메신이 보였다.
늙은 육신에서 뿌리가 자라나 땅에 박혔고, 머리카락은 잎이 되어 퍼졌다. 손은 지팡이를 파고들어 가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바닥에서 찻잔이 솟아올랐다. 맑은 물에 초록잎이 은은하게 흔들거렸다.
“그래, 어떤 말로 나의 평화를 깨 려느냐?”
마치 나무가 되어 버린 듯한 메신의 모습에 사나운 이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건 그쪽 주술사의 특징인가?”
대지의 심장에서 스치듯 만난 트롤 주술사도 저 비슷한 모습이었다. 대 스승 크뮨 역시 자연물에 가까운 형 상이었다. 본디 태어나기를 그리하 지는 않았을 텐데 어찌 저런 모습인
지, 사나운 이빨은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흘흘, 자연과 깊이 동화하면 육신 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법이지.”
정령술이 친구로서 부탁하는 일이라면 마법은 법칙으로 명령하는 일이었고, 주술은 남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하는 일이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 같은 경우 굳이 자신의 육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메신처럼 아예 살아서 자연령이 되기를 선택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육신부터 바꿔 버린 것이다.
‘메신은 이미 거의 인격을 가진 나무나 다름없군. 더는 트롤이라고도 부르기 힘들겠어.’
대주술사가 육신을 바꿔 자연령이 되어 이곳에 뿌리내렸으니 적어도 이 영역 내에서 만큼은 자연의 하위 신격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이들이 이곳을 공격하기도 무척이나 까다롭다는 뜻이다.
왜 피의 동맹이 부상자들을 이곳으로 보내 치유하는지 알 것 같았다.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아도 이곳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대주술사가 신목이 되어 지키는 곳 이니 누구라도 감히 이곳을 노릴 수는 없겠지.
“어르신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늙은 이 몸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하나 마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어르신 아닙니까?”
마녀라는 단어에 메신이 테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던전들이 터져 나왔다지? 혹시나 했는데 그 수작이 마녀의 것이었던 모양이군. 이럴 때는 내가 뿌리를 내려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워.”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마녀가 대지의 심장을 감시하고 있던 걸 생각하면 아마 틀림없겠지요.”
“마녀, 그 오래된 자들이 또 움직인단 말이냐? 허어, 대악마만 해도 놀라운 일이거늘 정녕 세상이 어찌 되려는 것인지……
긴 탄식을 흘리던 메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와 악신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야 질리도록 들었지만, 이들은 아니니 말입니다.”
일찍이 재능이 남달랐던 메신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 만물이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바람에 잎이 일렁이는 소리,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가장 처음 땅에 닿은 눈의 소리와 뜨겁고 포근한 불꽃의 소리.
남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모 든 것들이 그에게는 대화였고, 놀이 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친구였고, 동료였으며, 가족이었다.
그렇게 자연이 속삭이는 소리를 따라 세상을 방랑하던 시절, 이름 모를 산속에서 우연히 자연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건 무척이나 끔찍한 소리였어. 내가 살면서 그리 소름 끼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지.”
사실 그때까지는 자연이 비명을 지를 줄 안다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그럴 일이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이 끓어오른다고 그게 특별한 일 이며, 절벽이 무너진다고 그게 놀라운 일인가?
숲이 불타는 것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땅이 갈라지는 것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다. 자연이 고통스러워 하는 일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달랐다. 공간이 비틀리고, 마력이 오염되며, 땅이 물처럼 흘러내리고 공기가 딱딱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그곳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우리 세계의 법칙이 아니었어. 이계의 것이었지. 그래서 처음엔 악마라도 나타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군.”
태어나기를 이 땅에서 태어났으나, 이 땅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 질적인 존재.
차원 너머에 유폐된 가장 오래된 악신을 이 땅으로 불러오는 사악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녀들이 몇이나 모였지. 그들이 부리는 사역마가 산을 뒤덮었고. 그들을 추적하던 아홉 신의 사제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이가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면 결국 악신이 나타났을 거야.”
아홉 신의 사제들. 그 말을 들은 델피노가 미간을 좁히고 고민했다.
그 정도의 사건이라면 알려지지 않 았을 리가 없었다. 성황청의 역사를 더듬고 더듬어 그 시기를 추측한 델 피노는 메신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마녀의 밤을 말씀하시는 겁 니까?”
“마녀의 밤? 인간들이 그때를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리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마녀가 많기는 했군.”
그걸 들은 델피노가 신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천삼백 년은 족히 된 일인데······.”
엘프도 아니고 트롤의 수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대주술사의 경지에 올라 자연의 화신이 된 메신이라면 그럴 법했다.
“그게 벌써 천삼백 년이나 되었나? 하긴, 젊은 시절의 일이긴 했지.”
그 후로도 한참이고 마녀와 악신의 끔찍한 행동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 놓던 메신이 자신의 팔과 연결된 지팡이를 뚝 잘라서 건네주었다.
짧아진 지팡이는 순식간에 자라서 원래의 것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싱그러운 잎이 달린 덩굴이 치렁치렁 감겨서 이게 지팡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정녕 악신과 싸우게 되거든 땅에 그것을 심어라. 내가 이곳을 떠나지 는 못하지만, 그것을 통해 한 손 거들어 볼 테니.”
이야기가 끝나고 일행이 찻잔도 모 두 비우자 메신이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다시 눈을 감고 잎과 이끼가 가득 하니 그저 나무처럼만 보였다. 그의 호흡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메신의 거처에서 나오니 누군가 어슬렁거리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그라드발, 혹시 한 번의 싸움으로는 부족했던 거요?”
오크투신 타르칸의 두 번째 도끼, 아이반의 앞을 막아섰던 오크 전사.
피의 동맹에서 가장 용맹한 지휘관 이라는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흠, 아니야. 창피하게도 목숨을 건졌는데 무슨 면목으로 그러겠나? 내가 더 강해져서 반드시 당신의 목을 벨 수 있을 때가 아니면 싸울 생각은 없어.”
놀랍게도 이 말은 시비가 아니라 칭찬이었다. ‘지금 당장 덤벼도 이길 자신이 없을 정도로 당신은 강자 입니다.’ 를 오크 전사 스타일로 돌려 말한 거다.
패배와 약함을 죄악시하는 오크들 의 문화에서는 이건 크게 겸손한 말 이었고, 동시에 상당히 공손한 표현 이었다.
“뭐, 그러시군.”
언어 스킬 덕분에 오크들의 언어 생활에 대해 대충 알고 있는 아이반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나운 이빨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 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다음은 없다! 그 전에 너의 목을 베어 주마!”
사나운 이빨이 왜 흥분하는지 모르는 그라드발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무기를 뽑아 들었다. 어쨌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오크 전사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 지만,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를 내렸다. 이곳에 가득한 묘한 기운이 그들이 싸우지 못하게 억눌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