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1
이곳은 메신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은 전투는 할 수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이곳이 어딘지 잊으셨나?”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둘을 진정 시키자 사나운 이빨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라드발은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왜 나왔나? 몸이나 회복하지. 아직 정상이 아닐 텐데.”
그가 아이반에게 입은 상처는 쉽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렴 묠니르로 몇 번을 후려 맞았는데.
오크투신 타르칸이 내린 축복의 후유증까지 겹쳤으니 아무리 그가 튼튼한 전사이고, 이곳이 메신의 영역 이라도 한동안은 요양해야만 했다.
“나를 이긴 자가 찾아왔다는데 어찌 얼굴을 보지 않을까! 메신께서는 나의 육신을 염려했으나, 전사의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메신이 헛짓거리하지 말고 자빠져 자라고 했는데 궁금해서 몰래 빠져 나왔다는 뜻이다.
자신의 영역이었으니 메신이 정말 모르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말해 봐야 안 들으니 그냥 내버려 뒀겠지.
주르륵.
사나운 이빨과 잠깐 신경전을 벌였다고 그라드발의 상처가 터지고 피 가 흘러나왔다.
아이반의 공격은 모두가 신성을 머금고 있어서 그걸 중화하기 전까지 는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몸을 상하게 만드는 짓이라 굳이 할 필요가 없었 을 것이다.
“뜨거운 피가 그대를 반기는구나!”
그리 소리치는 그라드발을 보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하여간 오크 새끼들 중에 제정신인 놈이 몇 없었다. 만약 테잔도 이런 식이었다면 동료가 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뚝배기를 깨 버리고 갈 길을 갔을 거다.
아이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차린 테잔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번에 던전 들이 터져 나올 때 그걸 수습했다고 했지. 혹시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나?”
차원 방벽이 흔들린 이후로 대륙 전역에 던전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빠르게 공략하여 많은 수를 정리하기는 했으나, 그 모든 던전을 해결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결국 현실에 완전히 뿌리내린 던전이 터져 나오는 일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피의 동맹에 나타난 것은 규모가 달랐다. 동시에 수십 개나 되는 던전이 무너지며 내부의 몬스터들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이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같은 시기 마리난 제국에 대악마가 나타나서 깽판을 친 바람에 상대적으로 별일 아닌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마녀의 짓이라 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했다는 말인가? 대악마가 넘어온 것처럼 악신을 불러오기 위해서? 그렇다면 방법은?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니까. 같이 간 주술사들이 무언가 흔적이 있다고 말은 했는데, 이미 던전이 사라져서 남은 증거도 없지.”
“그게 마녀의 것은 아니었나?”
테잔은 그리 물으면서도 기대하지 않았다. 흔적을 발견해도 그게 마녀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주술사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던전이 터져 나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그걸 하나하나 분석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을 거다.
테잔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모르겠 지만, 그때 그는 대주술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느라 대지의 심장에 있었으니까.
“모르겠군. 하지만 몇몇 이가 미쳐서 날뛰거나 그 자리에서 피를 뿜고 죽은 경우가 있었다. 때마침 남쪽에서 대악마가 나타났으니 이것도 그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했지.”
실제로 자잘한 악마들이 대륙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악마 소환이 마리난 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뭐, 그렇군.”
테잔은 몹시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이반은 알 수 없었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테잔이 아이반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서 몸을 좀 회복시키지. 어르신의 권능이 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 다음에 자네가 방향을 정하시게.”
패배자가 억지로 합류했다는 자각이 있는 그는 일행의 결정에 따를 셈이었다. 설령 피의 동맹이 위험하다고 해도 억지로 일행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마녀가 상대라면 성황청의 정보가 필요하겠지. 움직이는 건 그 다음이오.”
“이해하네. 옳은 결정이야.”
“그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확답을 들어야겠소.”
“무엇을 원하는가?”
“나와 같이 움직이려면, 내 말에 따르시오.”
그 말에 멈칫하던 테잔이 물었다.
“어디까지?”
아이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 며 짧게 대답했다.
“모든 것.”
테잔은 함께하려면 모든 것을 바치라는 아이반의 말을 깊이 되새겼다. 몇 번을 입안에서 굴리고, 머리로 판단하고, 가슴으로 곱씹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온전히 아이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는 대지의 심장에서 다시 태어난 열두 번째 대주술사이며 동시에 피의 동맹을 이끄는 원로였고, 천만 오크들이 신뢰하는 현자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가 일행과 함께하는 것은 동맹의 뜻도, 오크들의 의지도 아니었으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건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는 암울한 미래를 엿본 자로서 그 참담한 미래를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이반이 실패할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했다.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육신과 영혼이 불타도 껄껄 웃으면서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다른 이들의 운명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테잔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그가 아이반의 말을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스승께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겠지. 모든 것을 건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구먼.”
그러나 결국 그는 대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은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니었노라,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은 세상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노라 말했다.
“세상의 많은 자에게 무지는 곧 공포였으나, 미래를 엿본 이들에게는 무지가 곧 희망이지. 한 줌 희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러겠네.”
테잔이 진정으로 동료가 되기를 청하고, 아이반은 그를 받아들였다.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소.”
첫 번째로 성황청에 가서 마녀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
두 번째로 라이칸스로프, 죄 많은 발톱의 족장 볼타르에게 달의 여신 셀룬의 성물을 전해 줄 것.
세 번째로 피의 동맹을 공격하고 아이반을 노리고 있는 마녀와 악신 의 세력을 뿌리 뽑는 것.
네 번째로, 이건 아주 중요하지는 않지만 마리난 제국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알려 주었던 그의 가문 비밀 창고를 확인해 볼 것.
“원래 마지막은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 갑자기 신경 쓰이는군.”
비밀 창고에는 고대의 힘이 담긴 석판이 있다고 했다. 옛 전설에, 위대한 영웅이 가지게 되면 큰 힘을 얻을 것이라던 유물.
그의 가문 누구도 그 힘을 얻지 못했으니 그저 헛된 전설이 아닐까 싶었지만 마리난 제국의 명문가가 비밀 창고에 숨겨 두고 대대로 보관 할 정도라면 뭔가 있기는 있다는 뜻이다.
사정을 모르는 테잔에게 자세히 설명한 아이반이 깊은 눈으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고대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시대를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쩌면 그게 제법 중요할지도 모르겠소.”
“상대가 마녀이기 때문인가?”
“그렇소.”
마녀는 악신의 사제들이었다. 고대의 제사장이면서 사악한 마법사, 오래된 주술사이기도 했다. 그건 아주 오랜 옛날, 고대에는 마법과 주술, 신성술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화시대를 거닐던 위대한 자들은 모두가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그건 격에 새겨지고 세상이 인정한 고유의 능력이라 지금의 기준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마법과 주술, 신성술의 시작은 그 시대 초월자들의 권능을 흉내 내어 만들어진, 조잡한 것이었다. 그래서 체계화되지 않아 중구난방이었고, 구조도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단순한 만큼 본래의 권능에 가까웠고, 직관적이었기에 강력했다.
신화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세상에 흩어진 신비가 많아 단순한 술법도 큰 위력을 보였다.
지금은 드래곤이 제 몸을 유지하기가 벅차서 오랜 수면을 해야만 할 정도로 마력이 옅어졌지만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현대의 술법이 부족한 마력을 어떻게든 쥐어짜서 기적을 불러오는, 섬세하고 치밀한 구조라면 고대의 술법은 막대한 마력을 되는대로 때려 넣고 방향을 정해 주는 대포와 같았다.
마력이 부족한 현대에 와서야 비효율적이었으나, 신화시대가 된다면 그보다 적합한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현대의 술법으로는 재현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남부 제국 마리난 전역을 연결하는 대규모 공간이동 유적이 바로 고대의 유산이었다.
“만약 비밀 창고에서 고대의 유산을 찾아 그 힘을 깨울 수만 있다면 마녀와 악신을 상대하기 한결 편해질 거요.”
“그런 것이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상대는 신화시대를 끝낸 악신이야. 준비가 아무리 철저해도 충분하지 않네.”
그렇게 계획을 정리한 일행은 며칠 간 푹 쉬면서 육신을 치유했다. 메신이 가진 치유의 권능이 어찌나 대단한지, 지치고 상처 입은 일행의 몸 상태가 겨우 며칠 만에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가 매일 한 잔 대접하는 따뜻한 차는 웬만한 고급 회복 물약보다 더욱 생명력이 넘쳐서 한 모금을 넘길 때마다 몸에서 힘이 솟구쳐 올랐다.
특히나 델피노가 그 차를 좋아했다. 메신이 건네주는 차를 그가 호우 불어 마시면서 흡족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반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는데, 왠지 모르게 찔린 델피노가 눈빛을 피했다. 아이반이 차를 끓여 줬을 때와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게 민망한 모양이다.
“솔직히 당신이 끓인 차는 맛이 너무 없었지. 그리 볼 것 없어.”
이레인이 무표정하게 지적하자 아이반은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