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2
“그게 아니오. 내가 한때 동생이었던 시절이 생각나서.”
“음? 그대에게 형제가 있었나?”
이 뜨거운 물로 목욕이나 하면 좋 겠다고 중얼거리며 차를 털어 넣던 사나운 이빨이 크게 관심을 보였다. 평소 아이반은 개인적인 일에 대해 서는 언급을 피했기에 좀처럼 듣기 힘든 주제였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한때 형님이라 생각했던 자가 있었소.”
“있었다?”
“지금은 후회하는 일이지.”
일행은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아이반의 표정이 너무 날카로워 보여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아이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을 뿐이다.
“다 쉬었으면 출발하지. 시간이 많지 않소.”
짧은 회복 기간이 끝나고 일행은 또다시 모험을 준비했다.
그동안 테잔은 자신을 따르는 주술 사들에게 따로 마녀에 대해 추적할 것을 명령했다. 그라드발을 불러서는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몸을 회복한 뒤에 마녀에 대해 알아보게. 이게 인간들과 싸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할 거야.”
“마녀라, 제법 싸우는 맛이 있겠지?”
“혹시 발견하더라도 절대 혼자서 덤벼들지 마시게. 그들은 지독한 자들이니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몰라.”
“그거 짜릿하겠군.”
그라드발이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하자 테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덧붙였다.
“마녀에게 죽으면 영혼이 붙잡혀서 타르칸께 가지 못하고 악신의 장난감이 될 거야.”
“어찌 죽음이 두려워 싸우지 않을까!”
영 불안하기는 했지만 테잔은 그쯤에서 마무리했다. 비록 그라드발이 전사 중에서도 호전적인 편이기는 했지만 결코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오크와 동맹을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다.
“다행히 강철 산맥과 성황청은 방향이 같군. 물론 요정의 숲을 통해서 움직일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거요.”
피의 동맹이 점유한 지역 대부분은 주술사가 자리 잡고 영역을 구축했기 때문에 요정의 숲을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억지로 뚫고 지나갈 수는 있었으나 그러면 근처에 펼쳐둔 온갖 결계가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걸 테잔이 직접 메신에게 부탁하여 해결했다. 이곳에서만큼은 이미 소신격이나 다름없는 그였기에 자신의 영역에서 다른 영향 없이 공간을 살짝 비트는 것 정도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행은 무사히 요정의 숲을 거쳐서 강철 산맥으로 넘어갈 수 있 었다. 어디까지나 요정의 숲은 통로에 불과한지라 테잔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그것만으로 그는 꽤 감명을 받은 듯했다.
“아마 오크 중에 요정의 숲에 들어간 자는 나밖에 없을 걸세. 이건 기념할 만한 일이로군.”
단순히 요정의 숲만이 아니더라도 대륙 동쪽에서 중앙으로, 거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공간 이동이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테잔은 앉아서 수십 킬로가 넘는 거리로 분신을 보낼 수 있는 실력자 였으나, 영맥을 이용해 분신을 보내는 것과 본신이 이동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대주술사는 숨 쉬듯 자연스럽 게 공간 이동을 펼쳐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한다지만 그의 주술적 방향은 그런 쪽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대륙을 가로질러 강 철 산맥에 도착한 일행은 얼마 지나 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 너무 조용한 듯했기 때문이다.
산은 얼핏 고요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시끄러운 곳이었다. 겨울의 산이라 해도 마냥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도 그곳에서 생명은 살았다.
“···조용하군. 뭔가 두려워하는 듯 떨고 있어.”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무수히 사선을 넘어온 전사의 날카로운 본능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때로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감이 더욱 중요할 때가 있었다. 아이반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다. 문과라서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니다.
“흐음, 지맥을 훑어봐야겠군.”
이제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봄이 올 시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람은 매서웠고, 허벅지까지 눈이 쌓여 푹푹 빠졌다.
강철 산맥, 그 차갑고 단단한 산을 올라 지맥을 확인한 테잔이 한쪽 눈 썹을 치켜 올렸다.
“정상적인 영맥의 흐름이 아니야. 무언가 쐐기를 박고 정기를 빼돌리고 있어. 아주 은밀하게 숨겨져 있지만 틀림없군.”
대주술사의 단언이었다. 그가 잘못 보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뭐가 정기를 가져가는 거요?”
대단한 영초가 영맥을 빨아먹으며 자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성수나 마수, 그런 괴물들일 수도 있고.
“영맥의 흐름이 비틀릴 정도라면 아마 새롭게 던전이라도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은데…….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나야 이 땅에서는 낯선 존재니 자연이 단번에 모든 것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네.”
무언가 일이 일어나긴 일어난 모양 이다. 영맥이 비틀리고 강철 산맥 전체가 긴장할 정도의 일이.
하긴, 그러니 죄 많은 발톱의 족장 볼타르가 여기 있겠지. 신격의 시련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볼타르를 찾기는 쉽겠군. 그쪽으로 가면 있겠지.”
휘이익!
몸 안에 잠든 마력과 신성을 끌어 올린 아이반이 휘파람을 불며 천상의 말을 불렀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말이 비프로스트를 건너 아스가르드에서 이 땅으로 달려왔다.
히이이잉!
슬레이프니르가 영롱한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바닥에 내려앉으니 테잔의 두 눈이 한껏 커졌다. 이 놀라운 말이 품고 있는 신성을 느낀 것이다.
“이건… 평범한 존재가 아니군.”
“노르드의 주신, 오딘이 타고 다니는 말이오. 물론 그 영격을 이어받은 수많은 분신 중의 하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놀라워. 필멸자가 함부로 타고 다닐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정작 노르드의 신화와 전설을 보면 온갖 유명한 전사와 영웅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죄다 슬레이프니르의 후손이라는 둥, 그 피를 짙게 이어받은 명마라는 둥 그런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아마 아스가르드에서는 슬레이프니르를 씨말로 삼아 명마를 대량 생산 해서 뿌리는 모양이다. 판매가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이어 사나운 이빨이 북풍의 정령마를 불러냈다. 테잔이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으니 주위에 흩어진 눈이 뭉쳐 새하얀 백마가 셋이나 만들어 졌다.
그렇게 일행은 각자의 말을 타고 강철 산맥을 달렸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말이라 아무리 험한 길이어도 어렵지 않게 뛰어넘었다.
“…피 냄새가 난다.”
사나운 이빨이 문득 코를 벌렁거리며 그리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토막 난 채로 흩어진 중대형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눈이 붉게 변한 거대한 늑대가 거친 숨을 내뱉 고 있었다.
무언가 낯선 것이 빠르게 다가오자 늑대는 으르렁 거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휙 돌려 공격 자세를 잡았다. 그러다가 일행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적의를 흩어 버렸다.
거대한 늑대의 덩치가 점점 줄어들더니 털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두 발로 서서 일행을 맞이했다.
“은인이 왔다!”
볼타르가 그리 소리치자 사방에서 늑대들이 나타나 그들을 둥글게 감싸고 환영했다.
라이칸스로프. 달의 여신에게 크나 큰 죄를 범하고 그 대가로 이성을 빼앗겨 오래도록 고통받은 자들. .
인간형의 모습과 늑대의 모습을 오갈 수 있으니 인간의 시선으로 굳이 따지자면 늑대 수인의 일파라 불러야겠지만, 일반적인 수인과는 그 근원이 달랐다.
다른 수인들이 태생부터 야생의 피를 잇고 있었다면, 이들이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본디 달의 여신이 내린 축복이자 저주였기 때문이다.
한때 힘과 지성을 겸비하고 여신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그녀를 지키던 이들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광기에 물들어 짐승의 모습으로 지내야만 하니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정작 죄를 범한 이들은 모두 죽어 사라졌으나, 그저 그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벌을 이어가야만 하는 라이칸스로프들의 가슴속에는 여신에 대한 사죄의 마음보다 분노가 컸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신을 버리고 어둠을 받아들여, 세상을 노리는 파멸의 첨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반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으니, 여신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으로 불타오른 파멸의 첨병은 사라졌다. 달의 여신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가장 신실한 자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달의 여신께서 우리에게 네 가지 시련을 내려 주셨다.”
강철 산맥의 어느 동굴 속에서, 갓 잡은 사슴을 모닥불에 지글지글 익히며 죄많은 발톱의 족장 볼타르가그리 말을 꺼냈다.
“그 시련을 하나씩 수행하는 중이지.”
흩어진 라이칸스로프를 하나로 묶어라, 잃어버린 성물을 되찾아라, 달의 성지를 확보해라, 달의 신앙을 바로 세워라.
크게는 넷이고, 세부적으로는 몇 개쯤 더 임무가 있었다. 오랜 세월 신도를 잃고 약해진 달의 여신이 본래의 신성과 위엄을 되찾기 위한 일들이었다.
달의 여신은 신격으로 따지면 비교적 최근의 신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이미 오래전 잊힌 옛 신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게 모두 그녀를 진심으로 신앙하는 자가 이 땅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흩어진 형제들을 모으고 사라진 달의 성지를 재건하고 있다. 이곳에 온 것은 그를 위한 재료를 모으기 위해서다.”
“평범한 재료를 얻으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엇을 위해 오셨소?”
“달의 여신께서 필멸자이던 시절, 이 땅에 남긴 흔적.”
뿌리에서부터 조금씩 흔들리던 차원방벽은 대악마가 소환되고 뱀신 모르나가 자신의 육신을 다시 만들면서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현실과 관념의 경계가 흐려지고 사라진 역사와 전설, 신화가 던전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강철 산맥에 나타난 것도 그렇게 나타난 옛 전설의 파편이라고 했다.
“그분은 수많은 악마와 마물, 마녀와 악신의 대항자이셨고, 세상을 평화로 이끈 선도자셨다. 일찍이 이 땅을 주유하실 때 수많은 위업을 남기셨으니, 이곳에 남은 흔적 역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