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3
달의 여신은 말하자면 아주 오랜 옛날 몇번쯤 세계를 구한 용사 파티의 멤버였단 뜻이다.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을 헤치고 조금씩 격을 쌓아나가 마침내 위대한 신격이 되었으니, 실로 대단한 위업이었다.
필멸자가 신격이 된다는 것은 그리도 지난한 일이었다. 세계를 구한 용사정도나 되어야 겨우 도전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땅에는 그분께서 쓰러뜨린 존재가 잠들어 있으니, 던전의 힘이 그를 깨웠다. 우리는 여신의 가장 가까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녀석을 다시 해치우고 놈의 심장을 제물로 삼아 달의 성지를 완성할 것이다.”
아오오오-
주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목을 길게 빼서 달을 바라보며 하울링을 시작했다. 그건 달의 여신을 향한 기도였고, 동시에 악을 처리하겠다는 전사의 다짐이었다.
달의 여신은 일견 싸움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평화로운 신격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무척이나 실전적인 무투파였다.
그녀는 필멸자이던 시절부터 사악한 어둠과 평생 치열한 싸움을 계속 했고, 마침내 신격이 되어서도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겠다는 의미로 달의 신성을 가져갔다.
그런 달의 여신이 한때 가장 아끼던 자들이 라이칸스로프였다. 그들의 투쟁심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기에 악마라도 봉인되어 있는 것인가?”
“옛 신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다. 섬기는 이가 아무도 없어 오래도록 영락하여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광기에 물든 파괴적인 괴물이지.”
“영락한 신의 파편이라면 쉽지는 않겠군. 우리가 어찌 도와주면 되겠소?”
“제안은 고마우나,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여신의 시련이니,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겨내겠다. 그리해야만 우리의 깊은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아이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산맥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지만 이건 일행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받으시오. 우연히 마리난 제국의 황실 보물창고에서 구한 물건이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달의 여신이 남긴 성물을 꺼내 볼타르에게 전해주었다. 실상 우연은 아니었으나, 굳이 그것을 뽐낼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이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볼타르가 성물을 받아들었다. 품고 있는 기운이 너무나 미약해서 이게 성물인지도 헷갈릴 정도였으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분명 달의 여신이 남긴 성물이었다.
“이걸 되찾는 것이 가장 어려울 것 이라 여겼는데……!”
잃어버린 성물이 어디로 흘러 들어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되찾기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남부 제국 마리난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나라였고, 라이칸스로프가 제국 황실의 보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마리난 제국을 무너뜨린 다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신이 내린 가장 큰 시련이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쉽게 성물을 되찾다니, 볼타르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것을 이렇게 얻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환희로 가득한 볼타르의 표정이 급격하게 심각해졌다.
“우리가 여신께 범한 죄를 씻으려면 목숨을 몇 번이나 내놓아도 부족 한데 이렇게 간단히 얻어서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달의 여신이 내린 시련이란 단순히 결과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이 핵심이었다.
지독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다시금 신앙을 되찾는 그 과정이야말로 진정 죄를 씻을 수 있는 길인데,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다.
“고난은 이제 시작이오. 어둠이 다 시금 이 땅을 노리고 있으니 그대들 의 신실함을 증명할 기회는 많이 남 아 있소. 틀림없이 달의 여신도 그 리 생각하겠지.”
아이반의 말에 볼타르가 깊이 생각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얻은 대가는 언제든 그대가 원하는 전장에 달려가는 것으로 치르겠다. 이는 은인에게 보답하는 일과는 별개이니, 마음껏 우리의 목숨을 사용하라.”
힘들고 위험한 전장일수록 가치가 있었다. 어설프게 자신들을 생각해 내버려 두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오로지 고통스럽고 치열한 전장만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볼타르가 덧붙였다.
“우리의 운명을 구원한 대가는 결국 우리의 운명으로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우웅-
그때 볼타르가 쥐고 있던 여신의 성물이 부르르 떨면서 신성한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게 마치 여신이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것 같아서 볼타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 많은 우리의 운명이 부디 가치 가 있기를!”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라이칸스로프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였다.
그건 달의 여신을 향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일족을 구원한 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라이칸스로프, 달의 여신이 아끼던 가장 강인한 전사들이 아이반의 명을 청했다.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전장을 알려 주길 원했다.
고개 숙인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반은 동료들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곧 파멸이 세상에 닥칠 것이오. 셀 수 없는 악마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옛 신들이 깨어나겠지. 비틀린 악신들이 유폐를 풀고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것이오. 세상을 위해 싸워 달란 소리는 하지 않겠소. 부디 그곳에서 나를 위해 죽어 주시오.”
위험한 일이었다. 지독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이칸스로프는 기꺼이 대답했다. 그 위험하고 지독한 전장이야 말로 자신들을 위한 곳이라고.
달의 여신을 진정으로 섬기는 자라 면 그 전쟁에 목숨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 죽어 달라고 말하는 아이반의 관대 함에 그저 감격할 뿐이다.
“영락한 신격의 파편을 해치우고 그것으로 달의 성지를 완성하면, 우 리의 형제들과 함께 당신의 곁으로 가겠다.”
“쉽게 죽지 마시오. 그대들의 운명 은 훨씬 가치 있게 사용되어야 하니 까.”
“밤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한, 우리의 맹세는 지켜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의 등 뒤로 던전의 기운이 느껴지고, 아주 파괴적이고 거대한 광기가 흘러나왔으나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라이칸스로프는, 달의 전사들은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일행은 땅을 쿵쿵 울리는 전투의 여파를 느끼면서 강철 산맥을 떠났다. 그리고 대륙의 중심, 성황청으로 향했다.
저 멀리 성벽도 없는 도시가 보인다. 온통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정갈한 복장으로 신앙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도시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과연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 그런 별칭에 어울리는 곳 이었다.
“여기가 성황청, 아홉 신에 가장 가까운 도시로군.”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테잔이 어딘가 감회가 새로운 듯 그리 중얼거리다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 졌다.
“확실히 몰래 숨어들기는 어렵겠어. 나름 기척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벌써 파악되었네.”
눈을 가늘게 뜨며 기운의 흐름을 파악하는 테잔을 보면서 델피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성황청은 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곳입니다. 낯선 이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허술 하지는 않죠.”
성황청 아홉 신은 대륙에서 가장 숭배받는 아홉 신이기도 했다. 지상 에 내려보낼 수 있는 기적과 은혜의 크기가 다른 신격과 남다른 수준이 라는 뜻이다.
온갖 고위 성직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성황청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씩 쌓아 올린 신성한 기적은 성황청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감히 성황청으로 진격할 군대는 없겠지만, 이곳은 굳이 성벽이 없어도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무려 아홉 신격이 동시에 가호하는 도시였으니까.
“···지금 시대에 성자가 있었던가?” 성황청을 자세히 살펴보던 테잔의 말에 델피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대에는 아직 성자께서 나 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소문에 돌기로 바로 그 자신, 델피노가 가장 성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했고, 실제로 그를 성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델피노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는 성자가 없다, 그렇 단 말이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테잔은 힘 차게 앞으로 걸으며 일행을 재촉했다.
“계속 이리 서 있는 것도 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 어서 가세. 그 잘난 성황청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인간과 리자드맨, 엘프, 오크로 이루어진 일행은 각자 마법과 주술로 외형을 숨길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성황청에서는 그게 의미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벽이 없는 성벽, 그리 불리는 신성한 결계에 도달한 순간 부드럽게 신성력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일행과 연결된 수많은 힘이 끊어졌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 뱀신 모르나와 세계수의 존재가 아득히 멀어졌다.
빛의 신 아룬의 깊은 관심을 받아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게 된 델피노 조차 단독으로는 오래 사용하지 못하는 성지 선포가 성황청에서는 항상 펼쳐져 있었다.
성황청 아홉 신의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외력이 봉인되니 델피노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갑갑한 느낌이었다. 온몸을 쇠사슬로 묶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상태로 성황청을 향해 걸어가니 누군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평범한 사제복이었으나, 은밀하게 새겨진 성표는 그가 추기경임을 알려주었다.
“어서 오시오.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이리 보는 것은 처음이군. 성황청에 온 것을 환영하오.”
그가 그리 인사하자 델피노가 일행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성황청 종교재판소장이십니다.”
그 말은 즉, 성황청 이단심문관의 대표라는 뜻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일행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추기경은 그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들어오시오. 할 이야기가 많으니.”
일행이 벽이 없는 성벽을 넘어 성황청으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성황청의 방위를 맡은 수호 성기사단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한 힘을 지닌 자들이 갑자기 성황청에 나타났으니 수호 성기사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겠지. 원래의 일행이야 워낙 성황청에 잘 알려졌기에 경계보다는 환영의 뜻이 더 강하지만,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새로 탄생한 대주술사, 그 정체는 오크의 현자이자 피의 동맹 원로.
현재 전쟁 중인 상대의 최고위급 인사가 나타났으니 섣불리 공격하지도, 그렇다고 환영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경계만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안토니오 추기경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험악한 분위기였을 거다.
“흠!”
안토니오 추기경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눈짓하자 그를 근접 경호하던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주변에서 경계하던 성황청 수호 성기사단이 길을 열었다.
“혹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하겠소. 시국이 시국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최근 성황청의 분위기가 무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