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4
안토니오 추기경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그렇지는 않소. 당연한 일이지.”
사실 이 정도 수준의 멤버라면 성황청에 방문하기 전에 미리 연락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방문한 것은 일행의 실수이니 다소 날카롭게 반응했다고 해서 불만스러워할 수는 없었다.
‘이게 성황청인가, 실제로는 더욱 놀랍군.’
아이반은 그를 따라 움직이면서 주변을 살폈는데, 길가에 세워진 성스러운 조각상들이 모두 짙은 신성력과 축복을 머금은 성물이라는 것에 놀랐다.
대륙 전역에서 신앙을 끌어모으는 성황청의 핵심, 그곳에서 수많은 사제가 매일같이 기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성력이 스며들어 성물로 변한 모양이었다.
하긴, 매일 성지 선포가 펼쳐진 곳인데 그곳에서 수백 년쯤 동상으로 있으면 그럴 법도 하지.
다시 살펴보니 성물로 변한 조각상들이 성황청의 거대한 결계를 지지하는 기둥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황청 아홉 신을 본떠서 만든 신상과 옛 신화를 그려 놓은 벽화와 천장화, 역대 성자들의 동상을 지나 응접실로 향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무척 고풍스러웠고, 또 웅장했다. 건축물로 신의 위엄을 드러내려 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관광으로 왔다면 무척이나 훌륭한 건물이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치밀하게 엮인 결계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영 불편했다.
쪼르르 차를 타서 대접한 안토니오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본디 귀빈은 국무원에서 맞이해야 하나, 공식적인 방문은 아닌 듯하여 내가 나오게 되었소.”
안토니오 추기경은 성황청 검사성성 장관이며, 동시에 중앙 종교재판 소장이었다. 그러니까 이단심문관의 대표.
그는 여전히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일행은 마냥 편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대륙에 퍼진 이단심문관의 악명이 너무 대단했다.
기껏 편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은 델피노 정도였다. 나머지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대들이 대지의 심장을 향해 떠났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소. 오크들의 그 지독한 강자의 증명을 완료했다는 것도. 그런데 새로운 손님과 함께 이리 찾아온 것을 보니 역시 평범한 일은 아니겠구 려.”
“그렇소. 우리는 동맹의 영역에서 마녀의 흔적을 발견했소.”
“마녀, 그 비틀린 악신의 추종자들이 동쪽에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허허 웃고 있던 안토니오 추기경의 얼굴이 잠깐 싸늘하게 변했다. 일순간의 변화였지만, 한없이 부드럽던 인상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짧지만 무서운 침묵 끝에 안토니오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성황청은 악신의 추종자를 절멸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소. 하나 지금 동쪽은 이미 피의 동맹이 장악했으니, 함부로 나설 수가 없구려.”
피의 동맹이 악마에게 무너지는 마리난 제국을 위해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처럼, 신뢰의 연합 역시 오크를 위해 원군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둘 사이에 새겨진 골이 너무 깊었다. 전쟁 중인 적을 위해 희생할 수는 없었다.
“신의 종이 정치적 논리를 꺼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고 개탄스럽소만, 상황이 그러하오. 신성군대의 파병을 건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오. 반대가 극심하겠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테잔이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건 우리도 원하지 않아. 동맹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테잔이야 주술사이니 조금 다르지만, 다른 이들은 드높은 전사의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싸울 상대를 빼앗긴다고 화를 내겠지.
답답한 일이었으나, 오크의 문화가 그러했고 전통이 그러했다. 만약 끼어들고도 별말 듣지 않으려면 강자의 증명을 완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동맹은 나약하지 않지.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곳까지 찾아오셨소?”
“마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네. 오랜 세월 그들을 추적했던 성황청이라면 보다 자세한 정보가 있을 테니까.”
“악신의 무리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내어줄 의향이 있소. 그러나 그 또한 성황청의 자산이라 피의 동맹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다소 우려스러운 일이구려.”
“가장 선두에서 악신과 싸워야 할 자들이 셈을 따진다는 말인가?”
“그게 우리의 형제들이 목숨으로 일궈낸 것이니까.”
그리고 안토니오 추기경은, 검사성성의 장관이자 중앙 종교재판소장, 이단심문관의 대표는 테잔에게 되물었다.
“이단을 척결하는 건 우리의 사명이나, 그로서 이교가 흥성하는 것은 지켜볼 수가 없소. 악신의 위험성은 물론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과연 피의 동맹은, 오크투신 타르칸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지 않는단 말이오?”
“감히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을 악신과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를 비교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소? 우리 형제의 피로 새겨진 기록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단 말이오.”
그 후로 안토니오 추기경과 테잔은 한참이고 실랑이를 벌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악마와 악신, 기타 대륙의 존망을 뒤흔들 만한 대재앙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 진영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던 정보를 개방하고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 협력하는 것.
그 외 자잘한 몇 가지 사안에 합의하고 나서야 안토니오 추기경은 성황청이 보유한 마녀와 악신에 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안토니오 추기경이 떠나고, 자신이 직접 서명한 서류를 바라보던 테잔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생각보다 까다로운 자로군. 상대하기 힘들어.”
그때 다른 사제들과 이야기를 하다 돌아온 델피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 안토니오 추기경께서 양보를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피의 동맹과 전쟁이 길어지고 대륙 전역에서 온갖 이상 현상이 벌어지며, 마침내 대악마가 강림하는 상황까지 오자 성황청 내부에서 과격파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국이야말로 성황청이 나서서 인도해야 한다, 위대한 성전을 시작해야 한다, 온갖 삿된 자들을 잘라내고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평소에는 음지에 존재하던 의견들이 점차 수면으로 올라오고, 그게 또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마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는 했다.
그런데 이단과 이교를 모두 쓸어버리고 성황청이 주도하는 아홉 신의 위대한 가르침으로 대륙을 통일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가장 강하게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안토니오 추기경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단심문관하면 이단을 고문하며 즐기는 사이코패스 광신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들은 성황청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은 직접 이단을 조사하고 판단할 의무와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광신으로 판단이 흐려진 상태로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고, 오히려 성황청 아홉 신이 선포한 신앙과 교리를 가장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들만이 이단심문관이 될 수가 있었다.
누군가의 신앙을 정의한다는 것은 결코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안토니오 추기경은 모든 이단 재판의 최종 판사이니 성황청에서 가장 신중하고 현명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비록 검사성성 장관이라고 해도 성황청의 기록을 함부로 외부에 누출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죠.”
안토니오 추기경은 그런 부담을 짊어지고 기록을 개방한 것이다. 그게 뭐 별거냐 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크게 문책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국무원이 나서기 전에 추기경께서 직접 맞이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네요. 정해진 절차를 따라 국무원에 정식으로 신청 했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자료 열람이 반려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이 성황청을 떠나 있던 시간이 길어서 제대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다면서 델피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안토니오 추기경이 그리 호의를 보인 이유는 대체 뭐지?”
물론 일행이 그동안 쌓은 업적이 있으니 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성황청의 인사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고 안토니오 추기경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나? 정말 순수한 호의 때문일까?
그 의문에 테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성황청의 인물이나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이게 순전히 저 남자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게 무슨 의미요?”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네. 물론, 성황청에 들어오기 전에 본 것과 같았지.”
서류를 조심스럽게 품에 집어넣은 테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델피노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시대에는 성자가 없다고 했나?”
“예? 예, 그렇습니다.”
“글쎄, 그 말이 진짜인지 알아보자고.”
“그게 무슨……”
델피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잔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누군가 그들을 찾아와 똑똑 문을 두드렸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차분한 인상의 남자였다. 입고 있는 사제복과 성표를 보면 딱히 직위는 없는 평사제인 듯했다.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으나 그리 대단한 능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여러분을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밤에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체 누가 우릴 찾는단 말이오?”
“저는 말하지 못합니다.”
아이반이 동료들을 바라보았으나 모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저 테잔 홀로 무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주인이 부르면 객이 찾아뵈어야지. 안내하시게.”
테잔이 그리 말하자 사제가 그들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동선이 완벽히 비어 있어.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군.’
일행은 나름 귀빈실에 머물고 있었다. 경비와 순찰, 어쩌면 감시를 위해서라도 지키고 있는 병력이 있어야만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그들이 모두 사라진 모양이다.
그걸 깨달은 델피노 역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도 이제는 나름 아룬 교단의 고위 사제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어느 구석진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간 일행은, 그곳에서도 숨겨진 지하 통로를 통해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먼지 한 점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였다. 성황청 지하에 이런 곳이 있어도 되는 걸까 의아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한참을 걸어가고 있으니 벽이 없는 성벽만큼이나 강한 신성결계가 보였다. 뜨거운 열기도 없이 후끈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불의 신 쿤다라의 신성력이 듬뿍 들어 간 결계가 틀림없었다.
일행이 멈칫 사제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