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6
후인 델피노가 선인 알베르홈에게 말했다.
“이 어둠의 끝에도 빛이 내리쬘 것 입니다.”
그 말에 알베르홈이 빙긋 웃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이미 말라 버린 눈물샘 때문에, 살아 있다고 감히 외치지 못하는 몸뚱이라 그저 웃음으로 감정을 전했다.
자신이 만든 깃발이 후대로 이어지며,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희망이 되기를.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의 웃음은 눈물보다 깊고 진했다.
한밤중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태양이 솟아올랐다. 어둠을 밀어내고 다시 낮을 가져온 것처럼 성황청이 환하게 변했다.
이 기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밖 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고, 이내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게 불의 신 쿤다라의 권능임을, 또한 빛의 신 아룬의 기적임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감히 성황청의 사제라 할 수 있을까.
신께서 직접 의지를 드러내어 성황청의 밤하늘에 태양을 띄웠다. 그 의미를 나름 추측한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 숙였다.
그건 이 어두운 세월을 환희 밝히라는 신의 명령이었다. 또한 그 험한 길을 이끌어갈 종들에게 내리는 축복이었다.
성황청 아홉 신은 온 세상 만물을 바라보며 언제나 곁에 있었으나, 이리도 선명하게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제대로 기적을, 어떤 신탁을 내린 것이 적어도 수백 년은 되었으리라.
성황청이 주도해서 이단과 이교를 쓸어버리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급진파는 자신들의 뜻을 신께서 긍정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사명감과 광적인 신앙심이 차올랐다.
“보라! 신께서 우리의 길을 인정하셨다! 성황청은 변해야 한다! 나약함을 버리고 우리의 손으로 이 땅에 다시금 신성한 법칙을 세워야 한다!”
누군가 그리 소리치고 몇몇이 그에 동의해서 벌떡 일어났을 때, 델피노가 지상에 나타났다.
화아아-
하늘에 떠오른 신성한 태양이 그를 비추었다.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델피노에게 내리쬐어 지상에 나타난 신성 대리인을 축복했다.
바람 한 점 없었으나, 신성력을 머금은 깃발, 신성의 증명이 부드럽게 펄럭였다. 신성의 증명에 새겨진 성황청 아홉 신격의 성스러운 상징과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신성력, 위대한 신격의 권능에 성황청의 모든 사제가 압도당했다.
펄럭!
델피노가 신성의 증명을 휘두르자 성황청이 오랜 세월 자리 잡은 땅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웅-
실로 초월적인 수준의 신성력이 움직인다. 평범하던 공간이 이질적으로 변하고, 한 줌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에도 신성함이 가득했다.
성자가 수백여 년을 일념으로 기도하여 만들어 낸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 수많은 사제가 매일 기도 하여 만들어 낸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와 만나 기적을 일으켰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은 지상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존재했다. 위대한 신격이 노니는 곳에 한없이 가까워졌다.
아아아-
천사들이 피리를 부르고, 노래하며 길을 열었다. 지상에서 올라온 자들을 환영했다.
그리고 빛을 두른 자가 나타나 델피노의 뒤에 섰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횃불을 든 자가 한쪽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양옆으로 물이 몸을 일으켰고, 바람이 머물렀다. 땅이 지켜보았으며, 생명이 미소 지었다. 팔짱을 낀 강철이 오만하게 내려다보았으며, 지혜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헤아렸다. 황금이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신성한 대지와 천사의 보필을 받는 그들이 누구인지 의심하는 자는 이 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 막대한 존재감이 본인을 증명했다. 사제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신성력의 근원을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할 수는 없었다.
성황청 아홉 신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 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상에 나타난 신성 대리인이 입을 열었다.
“들어라.”
델피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이곳 에 있는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조용한 음색이 심장을 두드렸다.
“너희, 세상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지어다. 가장 밝은 곳이 아니라 가장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며, 가장 추운 자리에서 불을 피우고, 가장 목마른 곳에서 물을 전할지어다.”
델피노의 말이 시작되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곳에서 델피노의 말만이, 성자의 복음만이 울려 퍼졌다.
“너희의 바람은 가장 가여운 자들을 포근하게 감싸주어야 할 것이며, 가장 척박한 땅에 풍요를 가져오고, 가장 아픈 자들에게 생명을, 가장 나약한 자들에게 의지를 전할 것이다. 가장 부유한 자가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를 위해 금을 내놓고, 가장 혼란스러운 곳에서 너희의 지혜를 사용하여라.”
그 말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감히 반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너희의 고난과 헌신은 세상이 아니라 신께서 알아보시니, 언제나 그 분들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하라.”
신을 직접 배알하고 그 앞에서 듣는 말이었다. 그 복음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 성황청 모든 사제들의 가슴속에 단단히 새겨졌다.
“위대한 주께 영광이 있으라!”
그리 소리치며 깊이 고개를 숙이니 영광스럽던 천상의 풍경은 사라지고 어느새 본래의 성황청 풍경으로 돌아왔다.
하늘에 떠오른 신성한 태양조차 없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내 서로 눈을 마주하며 방금 경험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제들은 다급히 신성한 깃발과 델피노를 찾았으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델피노가 어디로 향했는지, 그리하여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건네받았는지 알고 있는 안토니오 추기경이 한참이나 아래를 바라보았으나 주변의 누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 무서운 검사성성의 장관이자 중앙 종교재판소장조차 감격에 겨워 감정을 추스르기 힘든 것이라 여겼을 뿐이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노력한 옛 성자를 위해 눈을 감고 기도하던 안 토니오 추기경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이 어두우니 갈 길이 바쁘신 게지.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분들의 발을 붙잡을 수가 있겠소?”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옳은 말이라 동의했다. 영광스럽게도 신의 형상을 배알할 기회를 얻었는데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모두 영광과 축복을 노래할 뿐이다.
“이 땅에 새로운 성자께서 나타났으니 그것을 널리 알려야만 하오.”
그리고 사흘 후, 성황청은 유례가 없는 속도로 시성 절차를 마무리하고 성자 델피노의 탄생을 세상에 선언했다.
안토니오 추기경이 준비한 마녀와 악신에 대한 자료들을 들고 성황청을 떠난 것이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그사이 일행은 다시금 동맹의 영역 으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계속 자료만 뒤적거리고 있으니 눈이 침침할 지경이다.
개중에는 헛소문도 많았고, 평범한 범죄를 마녀와 악신의 짓이라 변명한 것도 많았다. 그걸 그냥 자료만 보고 걸러내면서 쓸 만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왠지 흡혈공 아키우스의 기록을 검토하던 때가 떠오르는군.”
아이반이 다 읽은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면서 중얼거리자 델피노가 어색 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때 기록을 검토하던 것이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죠.”
“그랬지. 결국 포르니가 직접 불러 들였으니.”
생각난 김에 아이반은 피의 검 브 리카를 뽑아들고 그를 불렀다. 피의 검 브리카는 그와 연결되어서 대륙 어느 곳에서나 난쟁이의 솜씨로 장 비를 정비할 수가 있었다.
– ···무슨 일이야? 평소에는 이 나간 도끼나 대충 던져놓더니.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소. 혹시 마녀와 악신에 대해 아시오?”
포르니는 이 땅으로 넘어온 이래 대륙에 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 여행을 다녔다. 심지어 흡혈공 아키우스에게 검을 만들어주었던 그였으니 마녀와 악신에 대해서도 알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물었으나 포르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그 지독한 놈들과는 엮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피해 다녔으니까.
“당신이?”
악신은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아니야. 그저 비틀린 증오와 파괴 욕구로 가득한 괴물이지. 차라리 니드호그가 나을걸.
니드호그는 노르드 신화에서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갉아먹어 세계를 위협한다는 거대한 용이었다. 포르니가 얼마나 악신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엮인적이 없는데도 그리 싫어할 수는 없지. 무슨 일이 있었소?”
– 옛날에 마녀가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악신이 유폐된 차원을 열고 그들을 묶고 있는 봉인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달라더군.
“설마 만들어 줬소?”
– 그럴 리가. 그건 나라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귀한 재료들이 필요한데다 설령 있다고 해도 완성한다는 보장이 없지. 그래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한참을 쫓아와 괴롭혔다 면서 포르니가 떨떠름한 말투로 덧 붙였다.
“어쨌든 악신의 유폐를 풀 방법이 있기는 있다는 소리군. 그게 뭐요?”
– 악신을 봉인한 것은 다른 신격과 고대 요정, 드래곤이야. 봉인을 풀려면 그 셋중 적어도 둘의 동의가 필요해.
“다른 신격이 악신의 해방을 인정 할 리 없고, 고대 요정은 이미 이 땅을 떠났으며 드래곤은 모두 잠들었소. 전부 가능한 일이 아니군.”
– 하지만 지금 마녀와 악신에 대해 불어보는 것은 그놈들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슨 방법을 찾았을 거다. 그 신중한 놈들이 생각 없이 움직일 리가 없어.
“···알겠소.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지. 고맙소.”
아이반이 포르니와 대화를 마치자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신격, 고대 요정, 드래곤이라……. 어느 하나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요.”
그가 이레인을 바라보자 이레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고대 요정은 하나도 없어. 모두 머나먼 고향으로 떠났으니 완전히 사라졌지. 비록 우리가 그들의 후손이지만, 고대 요정을 대리할 수는 없는 법이야.”
“가능한 존재가 둘이 있지 않습니까?”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 세계수는 악신의 부활을 용인할 수 없어. 뱀신 모르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