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7
잠깐 사나운 이빨의 표정을 확인한 이레인이 덧붙였다.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는 않 을 거야. 이번에 육신을 되찾았으니 굳이 악신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 지.”
영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만약 뱀신 모르나가 악신과 손을 잡는 순간 신격이고 나발이고 대가리 터트리러 세계수와 아이반이 당장 달려갈 거니까.
그때 깊이 고민하던 테잔이 입을 열었다.
“신격이라면 가능성이 높아. 악신이 봉인되던 때와 지금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때 악신은 공통의 적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앙을 잃고 영락한 옛 신격이 생겼지. 그들 중 몇이 돌아버려서 악신의 부활을 돕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네.”
서쪽 바다의 옛 지배자, 깊은 바다의 폭군과 같은 오래된 신격이 제법 많았다. 몇몇은 상황이 더욱 좋지 못해서 아예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니 악신과 손을 잡을 수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드래곤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어. 얼마 전, 서쪽에서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나 동쪽으로 향했다네. 중간에 사라졌기에 어디로 간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깨어난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지.”
그 말에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어떤 드래곤을 말하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 그녀가 있었군. 하지만 그녀도 악신의 부활을 원치는 않을 텐데?”
“응? 자네들은 드래곤과도 친분이 있었나‘?”
“친분이랄 것은 없소. 잠깐 마주치기는 했지만.”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의 한쪽 날개를 자르고 그 뼈와 가죽으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었음을 고백하자 테잔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과 싸웠다고? 틀림없이 초월자였을 텐데, 어찌 살아남았나?”
일행의 실력은 얼마 전 붙어 본 테잔이 잘 알았다. 무척이나 강한 자들이지만 과연 정말로 초월자와 비견될 만한지는 의문이었다.
대악마를 처치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거야 순수하게 본인들의 역량은 아닐 터였다. 뱀신 모르나와 세계수, 엘프와 드워프, 수인, 나가 연합군이 모여서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의문 가득한 눈빛에 아이반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소. 드래곤의 영혼이 없는 육신만을 상대했으니까.”
“드래곤의 육신만 상대했다고?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하자면 무척이나 긴 이야기요.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소.”
며칠 동안 처박혀서 글만 읽으니 몸이 근질거렸다. 한때 문학도의 길을 꿈꾸던 젊은 청년은 이젠 펜보다 칼이 익숙하기만 했다.
“일단 브라움의 비밀 창고부터 찾아가지. 고대의 유물을 확인하고 드래곤의 행방을 알아봅시다.”
브라움의 가문은 혹시 몰락할 때를 대비하여 가문의 비밀창고를 그들의 영지가 있는 제국 남부가 아니라 제국 동부에 숨겨 놓았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쯤 되면 본래의 영지 이외에도 자잘한 땅을 여기 저기에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아마 비밀창고가 있는 동부의 땅 역시 남 몰래 전해지는 가문의 땅일 것이다. 요정의 숲을 통해 공간을 넘어 순식간에 도착한 일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 환경부터 살폈다. 비록 브라움이 위치를 알려 주기는 했지만, 비밀창고란 것은 외부인이 단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리 기름진 땅은 아니군. 땅에는 자갈이 가득하고 여기저기 바위가 삐죽 튀어나왔는데 경사마저 상당해. 농사를 짓기에도, 소나 양을 기르기에도 썩 좋지는 않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풍요롭지는 않은 곳. 겨우 입에 풀 칠이나 하고 살아갈 법한 척박한 산골.
그러니 보물창고를 숨겨두기엔 딱 좋을거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땅이니까.
이레인은 그렇다 치고 사나운 이빨과 테잔이 함께하는데 굳이 여기서 사람들과 마주칠 필요는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피해서 일행은 돌산을 타고 올랐다.
지형이 험하다고는 해도 일행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몇몇 특징적인 지형을 기준점으로 삼아 움직이던 끝에 테잔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마 저쪽인 것 같은데? 자연의 기운이 교묘하게 저기만 비껴가고 있다네.”
보물창고는 무척이나 잘 숨겨져 있었으나, 테잔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주술사란 곧 자연의 화신이라 세상 그 누구보다 기운의 흐름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보물 사냥꾼보다 능숙하게 길을 찾은 테잔이 어느 바위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자 아이반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아무리 봐도 열쇠 구멍이란 전혀 없었으나, 바위에 대고 밀어 넣으니, 마치 녹아내리듯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철컥! 봉인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투명하게 변했다. 공간을 겹쳐서 바위 위에 새로운 길을 만든 것이다.
실로 평범치 않은 마법이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 놓았다니 새삼스럽게 안쪽에 남아 있을 보물이 기대 되었다.
화르륵!
일행이 바위를 통과해 보물창고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횃불이 나타나 길을 밝혔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한 함정도 있었으나, 이제 일행은 그런 함정에 당할 만큼 어수룩하진 않았다.
움직이는 갑옷, 리빙 아머와 스톤 골렘이 보물을 지키는 수호자였는데, 열쇠를 통해 정식으로 들어왔기 때문인지 굳이 덤벼들지는 않았다. 물론 싸운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통로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보물창고는 그리 넓은 곳은 아니었다. 어디 까지나 최후의 최후를 위한 곳이니 평소에 아주 많은 양의 보물을 보관 할 수는 없겠지.
가문이 힘들 때마다 야금야금 빼내서 사용했다는 브라움의 말대로 드문드문 비어 있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금화와 보석이 제법 반짝이고 있었다.
일행은 그것들을 모두 지나쳐 한 상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단치 않은 듯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으나, 기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평범한 상자가 아니었다. 몇 겹의 마법적인 봉인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델피노가 상자에 저주가 없음을 확인하고, 아이반의 황금 눈이 상자의 마법적인 구조를 꿰뚫었으며, 테잔의 지팡이가 상자를 후려쳐 열었다.
쾅!
다른 이들이 조심스럽게 확인하고 있는 와중에 상자를 때려 부수고 봉 인을 파괴한다니, 일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테잔을 바라보자 그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런 건 원래 빨리 열어야 한다네. 괜히 머리를 쓸수록 어려울 뿐 이야.”
가장 머리를 많이 쓸 현자답지 않은 말이었다. 동시에 무척이나 오크다운 결론이기도 했고.
대주술사라고는 해도 결국 오크의 본성은 버릴 수가 없는 걸까, 대체 종족과 개인의 본질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아이반이 철학적인 사유에 빠져들 때 테잔이 상자의 잔해를 뒤져서 오래된 석판을 꺼냈다.
상자를 산산조각 내면서 내용물은 멀쩡하다니, 실로 대주술사다운 솜씨였다. 그 짧은 시간에 봉인을 찍어 눌러서 부수고 안쪽에 있던 물건은 보호한 모양이다. 무식한 방법이 었지만 무척이나 섬세했다.
호우-
긴 호흡으로 석판을 덮은 먼지를 털어낸 테잔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폈다.
“그냥 골동품은 아니군. 안쪽에 무언가 기운이 잠들어 있는 건 분명 해. 고대의 유물이라는 것도 확실하고.”
어떤 문자가 석판을 빼곡하게 덮고 있었다. 제법 고대의 유물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던 테잔과 이레인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낯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문자지? 오래된 것 같기는 한데 전혀 모르겠군.”
“내가 아는 문자 중에서도 이런 건 없어. 암호문이거나 아주 적은 사람만 사용하던 문자가 아닐까?”
지금은 그래도 큼직큼직한 덩치로 언어가 묶이고, 아예 대륙 공용어까지 나왔지만, 예전으로 갈수록 언어가 통일되지 않았다. 문자는 더욱 심해서 같은 종족은 커녕 부족과 마을 단위로 조금씩 차이가 있을 정도 였다.
그래도 주로 쓰이는 문자의 종류가 있는데 이건 그 무엇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대충 비슷하면 뜻을 끼워 맞추기라도 할텐데, 답이 없었다.
어쩌면 고대 요정이 거닐던 시절에 심어진 세계수나 최초의 주술사라는 대스승 크뮨, 대륙의 가장 오래된 나무만큼이나 긴 삶을 살았다는 소 두린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고문을 풀이하는게 일인 성황청의 유물해석관이라면 단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일행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가장 오래된 빛과 가장 오래된 어둠을 위하여. 그 사이에 선 존재를 위한 시련을 준비하노라.”
그 말에 일행의 고개가 휙 꺾였다. 깜짝 놀란 눈빛으로 아이반을 바라 보며 되물었다.
“설마 이걸 읽은 건가?”
“응? 뭐, 그렇소.”
“아니, 어떻게?”
테잔의 물음에 아이반이 어물거리 며 대답했다.
“뭐, 언어에는 제법 조예가 있어서. 여러 문자와 언어에 관해 공부했소. 암호문을 해석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더군.”
“허, 거참 이상하구먼. 자네는 얼핏 세상의 일을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꼭 희한한 곳에서 현자보다 더욱 깊은 지혜와 지식을 뽐낸단 말이야.”
아이반은 아주 평범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가장 오래된 현자와 요정의 후예, 신격마저도 깜짝 놀랄 세상의 비밀은 아무렇지 않게 꺼내곤 했다.
다른 일행은 그저 아이반이니까, 미래를 엿보았으니까, 그런 이유로 나름 납득하며 넘어갔으나 최근에 합류한 테잔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미래를 엿보았으니까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건 테잔도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엿본 대주술사였기에 오히려 그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자네의 지식은 어디서 오 는 겐가?”
테잔의 그런 의문에 아이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스킬 포인트로 언어학을 찍어서 그렇다는 말을 굳이 풀어서 설명하자면 경험과 업적을 쌓을 때마다 신조차 탐낼 초월적인 존재력을 얻는데, 그걸 대가로 세계의 기록에서 정보를 가져와 육신과 영혼에 새겨 넣어 온갖 기묘한 지식과 능력을 단시간에 습득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이반은 그걸 남들에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테잔도 굳이 대답을 듣고자 하진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석판에 새겨진 내용으로 넘어갔다.
“가장 오래된 빛과 가장 오래된 어둠을 위해 그 사이에 선 존재를 위한 시련을 준비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가장 오래된 빛과 어둠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그 사이에 선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가장 오래된 빛이란 단연 찬란하신 빛의 주를 말함이지요. 가장 오래된 어둠이란 역시 악신이나 파멸의 마왕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이에 선 존재는? 용사라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용사가 왜 사이에 섰다는 거지?”
“선과 악, 그 사이의 선택자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빛과 어둠을 그저 선과 악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지. 혹시……
테잔과 델피노가 석판의 문구를 두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 주술사와 성자가 만나니 짧은 문구에서 뽑아낸 신학적인 해석이 넘칠듯이 많았다.
그런 신학적인 해석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이반은 석판을 바라보며 다른 고민을 했다. 다분히 플레이어적인 입장에서의 생각이었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보통 이런 석판이 등장하면 어떤 식으로 사용할까? 어떤 제단에 설치 하나? 주문을 외워서? 피를 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