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8
그때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빛나며 타들어 갈 듯이 고통스러웠다. 지켜만 보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이 그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급하기는.’
아이반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는 묠니르에 굳이 신력을 담지 않고, 정말로 평범한 망치처럼 휘둘렀다.
깜짝 놀란 테잔이 그걸 막으려 할 때 델피노가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의 시련이라면 부수고 넘어가야죠. 빛과 어둠이 섞이면 곧 혼돈이니, 믿는 자의 눈을 어지럽힐 뿐 입니다.”
성자가 된 이후 훨씬 더 신실해진 델피노는 그 짧은 순간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었는지 눈을 감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물론 아이반의 망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석판을 때려 부수고 그 안에 봉인된 기운을 풀어헤쳤다.
우웅-
석판이 파삭 무너져 내리며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신성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악한 마력도 아닌 힘이었다.
그 힘이 일행을 둘러싸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간을 왜곡하고 저 먼 옛날을 비추었다.
신화시대의 끝, 신격과 고대 요정, 드래곤과 악마가 뒤섞인 오래된 전쟁.
고귀한 요정이 피를 뿌리고, 위엄 가득한 드래곤이 쓰러졌다. 위대한 신격이 무너지고, 가장 위험한 악마가 쫓겨났다. 거인이 짓눌리고, 악신이 추방되었다.
전쟁의 결과 승자는 없고 패자만 가득했다. 광활한 하늘의 문은 닫히고, 지하 역시 막혔다. 가장 생동감이 넘치던 어린 세계는 강제로 어른이 되었다.
발전보다는 유지, 도전보다는 안정.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던 세계가 전쟁의 끝에 닫힌 세계가 되었으니 실로 비통하기만 했다.
오래된 석판은 품고 있던 막대한 기운을 넘겨주었으나, 또한 날지 못한 자들의 슬픔도 전해주었다. 그러나 일행은 그 짙은 감정을 코웃음 하나로 털어냈다.
“하찮은 수작질이군. 이깟 힘을 주면서 정신을 주무르려 하다니.”
폐쇄적인 세계가 된 것은 또한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많은 자들이 이 세계를 노리고 있었고, 도저히 개방한 상태로는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도전을 억압하고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하는 것을 막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면이 있었다.
그건 초월자를 앞두고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강자의 불평이었다. 대다수의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옳은 의견이었으나, 옳기만 한 의견은 아니었다. 그것을 강요하듯 머리에 새겨 넣으려다 실패하기까지 했으니 아이반은 그저 불쾌할 뿐이다.
“이건 제법 위험한 물건이었군요.”
부서진 석판의 잔해를 바라보던 델피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력이 강하지 않았다면 감정에 물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석판의 제작자는 개방되어 있던 세계가 폐쇄적으로 변한 것을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천상으로 가는 문이 좁아지고,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충분히 격을 쌓아 초월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이 필멸자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무너진다. 안 그래도 어려운 일인데 하늘의 문을 닫아 그걸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것을 비난하고 있었다.
제작자는 현재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신격을 원망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델피노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유물이었던 셈이다.
설마 브라움의 가문이 이 내용을 알고 수집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동안 이 힘을 그들이 얻지 못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칫 이 짙은 감정에 물들었다가는 이단으로 몰렸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고대의 술법에 대해 알 수 있었소. 여기까지 온 소득이 없지는 않았군.”
석판이 품고 있던 힘이라고 해봐야 이미 평범한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나, 이게 고대 술법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옛 전쟁의 풍경을 보고, 직접 고대의 술법을 경험하면서 이질적인 감각에 적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이렇 게 순수한 형태로 고대의 술법을 저장하고 있는 경우는 지금 시대에 거의 없었다. 불쾌한 경험이기는 했으나 기연이라면 기연인 셈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마냥 낯설지는 않군요. 과거에 몇 번쯤 세상을 휩쓸었던 내용입니다.”
그때도 이런 석판이 영향을 준 걸까? 아니면 우연? 이것이 혹시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던 델피노가 덧붙였다.
“어쩌면 이들이 악신의 부활을 지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
말을 하던 델피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깥을 노려보았다.
저열한 살기와 음습한 시선, 뒤틀린 존재가 내뿜는 역겨운 마력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들을 노리고 다가 오고 있었다.
“마녀의 공격입니다!”
마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대지의 심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그들을 까다롭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요정의 숲을 통해 공간을 뛰어넘어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쉽게 추적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어떻게 이곳까지 꾸역꾸역 쫓아온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찾아갈 것을 굳이 이리 나타났군.”
아이반이 코웃음을 흘리며 통로 너 머를 노려보았다.
쾅!
멀리서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비밀창고의 수호자, 리빙 아머와 스톤 골렘이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를 막아섰다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곳에 깔린 함정과 리빙 아머, 스톤 골렘이라면 웬만큼 실력이 있는 모험가라도 크게 낭패를 볼 수 있을 정도지만 지금 이곳으로 다가오는 자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상대는 온 세상을 적으로 두고도 수천 년을 넘게 버텨온 악신의 제사장, 마녀였다. 이곳이 아니라 황실 보물창고라고 해도 마녀를 막을 수 는 없었다.
스스스-
보물창고를 숨겨두고 있던 결계가 삐걱거렸다. 천장에서는 돌가루가 떨어지고 벽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위치가 좋지는 않군.”
인벤토리를 한껏 열어서 남아 있는 물건을 다 쓸어 담은 일행은 빠르게 전투 준비를 마치고 통로로 들어갔다.
출구는 따로 없었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만 했다. 반드시 적과 마주한다는 뜻이다.
‘당당히 나타났으니 믿는 구석이 있겠지. 솜씨나 확인해 볼까?’
아이반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있을 때, 복도를 밝히던 횃불들이 차례로 꺼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왔다.
화아-
델피노가 빠르게 빛의 구슬을 불러 시야를 밝혔으나, 그 찰나의 순간 어둠을 타고 다가온 괴물이 아이반을 덮쳤다.
캬아아악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질감, 마치 어둠을 멋대로 뭉쳐서 역겨운 외형으로 아무렇게나 다듬은 것 같았다.
쿵!
사나운 이빨이 방패로 녀석의 몸을 후려쳤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녀석이 그대로 나가떨어져 불타올랐다.
녀석은 정말 어둠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단번에 깨달은 사나운 이빨이 낮게 경고했다.
“손맛이 얕다. 방패에 막힌 게 아니다.”
물리적 타격은 거의 먹히지 않았다. 놈을 막은 것은 사나운 이빨이 지닌 화염 드래곤의 마력이었다.
사실 일행은 모두 마력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으니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리적 타격에 면역이라는 특성은 꽤 신경 쓰였다. 이게 어떤 식으로 허를 찌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슈우욱!
천장의 구석진 틈새에서, 일행의 그림자에서 어둠이 뭉쳐 몸을 일으켰다. 새롭게 나타난 어둠의 괴물들이 일행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하나하나는 약했지만, 수가 많았다. 물리 면역이라는 것을 경계했지 마력으로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너무 수가 많아서 흘러나가는 마력이 만만치 않았다.
보통의 존재라면 이미 마력이 모두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졌을 거다. 웬만큼 단련된 자라고 해도 버거워서 헉헉거리겠지.
일행은 모두 평범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이제 슬슬 거슬렸다.
“녀석들은 그저 마력에 약한 것이 아니라 쓰러지면서 그 마력을 어딘가로 보내고 있다네. 적이지만 아주 효율적이고 현명한 방법이야.”
주위의 마력 흐름을 유심히 살피던 테잔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미간 을 찌푸렸다.
“그러면 이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마녀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 다는 뜻이오?”
“이놈들을 불러오는 데 들어가는 힘도 있으니 완전히 이득이라고 말 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지.”
유지만 한다면 일행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영원히 가능할 것이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 와중에 조금씩 얻어가는 마력도 쌓이면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마녀가 본격적으로 공격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면 치고 나가는 수밖에.
아이반은 창을 쥐고 강하게 발을 굴렀다. 발바닥이 바닥을 때리는 충격이 천둥소리가 되고, 뿜어지는 마력이 번개가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치지직!
쾅!
푸른 번개를 뿌리며 아이반이 길을 열었다. 앞을 막고 있는 어둠의 괴물을 찢어발기고 통로를 따라 달렸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공기가 끈적거리고 온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빠져나오고도 남았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마녀의 마력에 물들어 이 공간이 이질적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겠지.
분명 단순했던 길이 복잡하게 변했다. 이리저리 꼬이고 갈라져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그냥 걸어서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던전화가 되어 버렸군. 그 짧은 시간에 이리 바꿀 수 있다니 마녀의 마력이 아주 지독해.”
테잔이 쯧쯧 혀를 차면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꼬여 있던 길이 바로 펴지며 원래의 모습을 잠깐 되찾았다가 다시 요동치며 미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