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79
쿠구궁-
통로가 쩍쩍 갈라지면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땅이 떨리고 불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억지로 마녀의 마력을 밀어내고 공간을 되돌리고자 하면 안될 것은 없으나, 그랬다가는 아예 무너질 것 같았다.
원래 던전은 그 자체로 현실에 잠깐 나타난 이세계라 던전이 무너진 다고 해서 본래의 공간이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없으나, 지금은 마녀의 마력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곳이기에 구분이 애매했다.
“내가 다시 공간을 덮어씌우기는 어렵겠어. 아직 이 땅이랑 그리 친하지도 않고 말이야. 일이 제법 까다로워졌군.”
그리 말하는 테잔의 표정은 전혀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굳이 공간을 덮어씌우지 않더라도 싸워서 질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곳이 마녀의 땅이라면, 원래 계획되어 있던 함정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녀의 준비도 완벽하지 않았다. 서로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렵겠지.
“…그러면 왜 이렇게 나타난 걸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리 중얼거리던 테잔이 문득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생겼군. 새로 나타난 성자가 거슬렸던 게지.”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악신들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역시 성황청 아홉 신격이었다. 그들은 명실공히 지금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신격이었고, 악신의 앞을 가로막을 가장 거대한 벽이었다.
지금껏 마녀는 몇 번이나 악신의 유폐를 풀고 이 땅으로 불러오려 했으나 그때마다 성황청에게 방해를 받았다. 그러니 성황청에 나타난 새로운 성자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무리해서라도 그 역량을 알아보려는 게 분명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 이레인의 분위기가 조금 거칠어졌다.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고 델피노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단 말인가?
“마녀와 악신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리 오만한 줄은 몰랐소. 전에 하나 목을 자른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아이반이 이를 갈면서 어두운 용의 발톱을 들어 올렸다. 오른쪽 눈이 마치 타오르듯 황금으로 빛나며 주변 마력과 이리저리 꼬인 공간을 읽어 나갔다.
그가 마력을 듬뿍 담아 창을 던지려고 할 때, 아이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보고자 한다면 보여 주어야지요. 저는 부끄러운 것이 없으니 원하는 모든 이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인간 델피노는 숨을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었다. 때로 거짓을 말하거나 죄를 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자 델피노는 그럴 수 없었다. 지상에 나타난 신성대리인이기에 언제나 당당해야만 했다. 이 땅에서는 그가 곧 신의 뜻이었으니까.
악신의 제사장, 마녀가 성자를 보고자 한다면 그리해야만 했다. 빛의 신 아룬은 결코 악신이 두려워 피하지 않는다.
화아아-
델피노가 신성력을 더욱 짙게 내뿜어 가까이 다가오던 어둠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녀가 마력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지직!
델피노가 뿜어낸 신성한 빛과 마녀의 어둠이 서로 반발하며 스파크를 내뿜었다. 마녀의 마력은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자의 신성력에도 밀리지 않았다.
차라리 악마의 힘이었다면 쉽게 결판이 났겠지만, 악신의 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정당한 신격의 권능이었다.
서로 닮은 것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아룬의 신성력과 악신의 힘은 아주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유사한 종류의 기운인 셈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크게 반발하는 것 같아도 어느 한쪽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힘의 성질에서 우위는 없고, 절대적인 양으로 찍어 누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찬란한 빛의 신과 가장 지독한 악신,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자와 적어도 수백 년을 살아온 제사장이 맞붙었다.
우웅-
공간이 떨리면서 이리저리 시야가 왜곡되었다. 강력한 신성력이 서로 부딪히며 파동을 흩뿌렸다.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기에 가장 순수한 형태로 서로를 밀어붙였다.
한참을 그렇게 힘겨루기를 하다 마력이 요동쳤다. 마녀가 델피노를 억누르기 위해 제단을 쌓고 악신의 힘을 불러왔다.
벽이 꿈틀거리고 바닥이 움찔거렸다. 천장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쥐어짜 핏물을 뿌렸다. 붉고 시커먼, 누군가의 핏물이 천장과 벽면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공기부터 이질적으로 변했다. 사악한 마력이 차오르고 현실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법칙이 스며들 었다.
차원 너머에 유폐된 악신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전히 두꺼운 사슬로 온몸이 묶여 봉인되어 있었지만, 단순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 봉인과 차원을 꿰뚫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역겨운 촉수를 흔들고 변이를 시작했다. 공기는 가장 지독한 독을 품었고, 영혼을 할퀴는 듯한 바람과 정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가 몰려왔다.
태초에 그 근원을 이 세상에 두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힘이었다. 세상이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끼에에엑!
이 세상이 낳은 가장 지독하고 사악한 어둠은 투철한 신념으로 온몸을 감싼 영웅마저 타락시키고 가장 신실한 사제가 신을 버리게 할 정도 였다.
스스로 내버리고 세상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 어둠 앞에서 성자 델피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 땅에 나타난 신성대리인으로서 엄숙히 선언했다.
“이 땅에 비틀린 어둠이 돌아올 장소는 없노라. 빛이 그것을 막을 것이다.”
성자의 선언에 따라 하늘이 없는 통로에 빛이 내려왔다. 어두운 마력과 사악한 권능을 꿰뚫고 성자를 밝혔다.
그의 등 뒤에 나타난 후광이 천상의 문을 열고 빛의 천사를 불러오는 것을 빤히 지켜보던 악신이 눈을 감았다.
어둠이 물러났다. 차원 너머에 유폐된 악신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온 사방에 가득하던 사악한 마력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억지로 차원의 틈을 벌려 불러낸 악신의 힘으로 성자를 누르려던 마녀는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눈으로, 귀로,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리저리 얽혀있던 공간이 풀어지고, 미로 같던 공간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야를 가리던 장막이 사라져 죽어가는 마녀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리 한심하게 갈 것을 왜 그리 덤볐는지.”
아이반이 혀를 차며 창을 들고 다가가자 마녀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게 이 땅의 빛이라면, 너희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구나.” 마녀는 자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저주를 날렸으나, 아이반은 그 조차 조롱하며 창을 휘둘렀다.
“그래, 악신의 뚝배기도 그리 튼튼 해 보이진 않더군.”
스걱!
마녀를 처리한 일행은 대충 현장을 수습한 후 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 곳은 인간의 영역이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테잔의 모습이 보이면 상당히 곤란했기 때문이다.
테잔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 거렸다.
“쯧, 대륙의 미래가 어두운데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가 된다니. 이 또한 우리의 원죄로구나.”
동맹과 연합의 싸움은 서로가 그런 이름으로 뭉치기 이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지금은 아예 종족으로 편을 갈라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으니, 공통된 적이 있다고 하여 쉽게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비록 얼마 전에 성황청과 느슨한 정보 공유 협약을 맺었으나, 그게 정말 완벽하게 돌아가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굳이 하나가 되어 싸울 필요는 없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위해 싸우면 충분한 거지.”
슥슥-
아이반은 단검의 날을 갈면서 테잔의 한탄에 대꾸했다.
대부분의 정비는 피의 검 브리카와 연결된 난쟁이 포르니가 해 주지만 그는 굳이 단검이나 도끼 한두 개는 직접 날을 세웠다.
칼날이 숫돌을 타고 움직이는 그 소리가 묘하게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반의 솜씨가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 무기의 날을 세운다기보다는 마음의 날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모두가 다른데 그걸 하나로 묶는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요. 그렇게 억지로 손을 잡아 봐야 호흡이 맞을 리도 없고.”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어둠이 너무 깊고 깊어서 그런 식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할 수 있소. 지금껏 그랬듯이.”
헝겊으로 날을 닦아 마무리한 아이반은 단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녀를 추적하던 것은 어찌 되었 소?”
“의심스러운 장소가 있네. 내가 대지의 심장에 있을 때부터 이것을 조사하던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소식이 끊어진 장소가 있거든.”
그러나 테잔의 표정이 영 개운치 않았다. 어딘가 거슬리는 것이 있다는 소리다. 아이반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드래곤이 걱정스러운 것이군.”
드래곤은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전의 천 년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던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명성은 쇠하지 않아서 대주술사조차 경계하는 상대였다.
드래곤은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들이 이 땅에 남기고 간 분신이었다.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격이 상승하여 결국에는 당연한 듯 초월자가 되는 대륙 최강의 종족이었다.
단순히 파괴력만이라면 대악마의 권능이 더욱 위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계의 침략자이기에 세계의 저항을 감수해야만 하는 대악마와는 달리 드래곤은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라 세계의 반발은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신화시대 이후 그 길고 긴 대륙의 역사 속에서 드래곤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한 손으로 여유롭게 셈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마녀가 동쪽으로, 동맹의 땅에 찾 아와 음모를 꾸민 것이 정말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 때문이라면 그들은 과연 드래곤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 는 말인가?
“나는 몹시 우려스럽다네. 도대체 마녀는 어떤 것을 준비했고, 무엇으로 드래곤이 악신의 유폐를 풀도록 하겠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어.”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악신이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을 거요. 그녀와는 몇 마디 나누지 못했으나, 무척이나 현명하고 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드래곤이 잠든 것은 앞으로 다가올 어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했으니 오히려 악신에게 적대적이겠지.”
“그걸 마녀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눈을 감고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던 테잔이 생각을 정리한 듯 아이반 에게 말했다.
“수를 불리는 것은 필요 없어. 정 신력이 약한 자는 그대로 마녀의 노예가 될 뿐이니까. 악신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치게 만드니 정신이 굳건한 강자만 필요하네. 적은 수로 마녀의 군세와 악신, 어쩌면 드래곤까지 상대해야만 하니 최고의 전사들이 필요하겠지.”
“오크로드라도 불러올 생각이오?”
“카르타크는 전선을 지켜야 해.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연합이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니까.”
테잔은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는 전사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그라드발, 튀르긴, 무스파, 그 후로도 몇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