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
고오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은 자세를 낮게 잡아 하체에 힘을 집중하고 단번에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실로 전광석화, 번개 같은 움직임.
[천둥걸음!] 푸른 번개가 터지고, 어느새 아이반은 나무정령의 눈높이까지 뛰어올라있었다. 부웅- 나무정령이 아이반을 후려치려했으나 그런 느릿한 움직임으로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몸을 틀어 가뿐하게 피한 아이반이 검을 내려쳤다. [뇌룡참(雷龍斬)!] 치지직, 쾅! 벼락에 맞은 나무가 쪼개지듯 나무정령이 쩍 갈라졌다.속살이 시커멓게 타버리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으어어어! 나무정령이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내질렀다. 성대를 통하지 않은 목소리가 정신파의 형태로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것이 다른 나무정령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앞으로 달리시오! 뒤돌아볼 시간에 달려서 숲을 빠져나가라고!”
그렇게 소리를 치고 나서야 움직이는 부대원들을 보면서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태생이 아싸라 그런지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래야 숨겨놓았던 것들을 마음껏 쓸 수 있기도 하고.
스으윽! 쥐고 있던 검 대신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 어느 노르드 출신의 전사가 사용했다는 창이었고, 등급은 유니크급, 소유자의 강함에 따라 성능이 상승하는 성장형 아이템. 우웅- 창이 떨리고 온몸에 미약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직 봉인된 상태임에도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평범한 철검보다는 훨씬 나았다. 역시 이래서 템빨이 최고였다. 그 만큼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하기는 더럽게 어려웠지만. 게임이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풀강화 신화급 장비세트만 있었으면 이미 옛날 옛적에 깽판치고 돌아다녔을 텐데.
고등학생이 아닌 게 문제였나? 휘익! 휘이잉! 아이반의 몸을 감싸고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고 돌멩이가 부서지는 거칠고 파괴적인 폭풍이 나타났다.
망할 아스가르드의 신, 염병할 영웅적인 업적.
아이반은 그렇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나의 용맹을 증명하겠소!”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고, 그들을 후퇴시키기 위해 홀로 남아 적을 상대한다.
이것보다 더욱 용맹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 실로 천상의 신들이 좋아할만한 시나리오였다. 하하하하! 아이반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폭풍 같은 바람소리가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성격 나쁜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며 진짜로 웃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오딘, 당신에게 이 전투를 바치겠소!”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아이반은 그런 환청이 들렸다. 아니, 어쩌면 그런 뜻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라고.
바치겠다고 했으면 얌전히 받아 처먹어야지.
신을 모시는 전사가 하기에는 실로 오만불손한 생각이었으나 피와 죽음, 용맹한 전투와 비참한 운명이라면 환장해서 못 견디는 전쟁의 신은 기꺼이 힘을 내려주었다.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힘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기다린 것처럼 나무정령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푸슈욱! 쾅! 나무정령들이 바닥을 후려치자 땅이 뒤흔들린다. 땅을 붙잡고 있던 큼지막한 나무들이 모두 나무정령으로 변해 뿌리를 들어 올려서 지반이 한껏 불안해진 상태였다. 어디는 커다란 바위가 튀어나오고, 어디는 갑자기 구멍이 뚫려 아래로 꺼졌다. 수맥이라도 건드렸는지 물이 콸콸 쏟아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이반이 날아올랐다. 슈우욱! 쾅! [천둥걸음!] 푸른 번개가 번쩍이고 아이반의 몸이 쏘아진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터져 나오는 천둥소리, 그의 몸 주변을 돌고 있던 거센 바람.
그 모든 것이 합쳐지니 지금의 아이반은 그야말로 폭풍을 닮아있었다. 쾅! 아이반이 창을 내지르자 나무정령의 몸이 터져나간다. 강한 바람이 고목을 꺾듯 나무정령을 꺾어버리고 한낱 장작더미로 만들었다.
쉬이익! 아이반이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닥에 골이 파이고 나뭇가지가 부러진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나무정령들의 몸을 조금씩 베어 가른다.
탁, 타닥! 두껍고 단단한 나무정령들의 피부, 나무껍질이 벗겨진다.
속살을 파고들어 마치 피 같은 수액들이 흘러나왔다. 수십이 넘는 나무정령과 그를 상대하고 있는 한 남자.
주변을 둘러싸고 공격을 가하는 나무정령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숲 전체가 덮쳐드는 것 같았지만 아이반은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적이 상처를 입었다. 마치 홀로 자연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위대함. 실로 영웅적인 모습.
성격 나쁜 폭풍의 신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전사에게 조금 더 많은 힘을 내려주었다. 아이반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바람이 조금 더 거세게 변했다.
아이반은 그것을 그저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기꺼이 신의 이름을 외쳤다. 이 전투를 그에게 바치기로 했으니까.
“오디이인!”
쾅! 아이반이 소리치며 창을 던지자 전방의 적들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그 커다란 덩치의 나무정령을 셋이나 꿰뚫었음에도 창은 완전히 힘을 잃지 않고 바위 깊숙이 꽂혀 거세게 흔들렸다.
스윽! 탁! 손을 뻗자 바위에 박혀 떨고 있던 창이 공간을 뛰어넘어 아이반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지금 아이반은 오딘의 가호를 받아 그의 힘을 끌어 쓰고 있는 상태, 이 정도 잔재주는 어렵지 않았다.
“후우 .”
아이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을 굳게 쥐었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정령 수십을 모두 캠프파이어하기 딱 좋도록 만들어놓았으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숲속에 흐르는 주력은 여전히 강대했고,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강자의 시선 역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스슥, 스스슥! 주변에 널려있던 나무정령의 잔해 일부가 한 곳에 모여 형태를 갖추었다.
나뭇가지는 뼈가 되었고, 바닥에서 솟아오른 흙이 살이 되어 그것을 뒤덮었다.
마지막으로 나뭇잎이 피부가 되어 달라붙자 어느새 그것은 지팡이를 쥐고 있는 오크 주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흘흘흘, 강한 전사로 .”
쾅! 오크 주술사가 기묘한 웃음을 터트리다말고 머리가 터져나갔다. 아이반이 얼른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도끼가 그를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 푸드득! 오크 주술사는 피와 살점 대신 나무 수액과 흙을 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곧 움찔거리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또 다시 나무와 흙더미에서 오크 주술사의 모습이 되었다. 슈우욱! 캉! 이번에도 아이반의 도끼가 날아갔으나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흙더미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 너머로 오크 주술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성질 급한 놈이군. 명예도 모르는 자식.”
낮게 중얼거리는 말은 오크어였다. 아이반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겠지.
하지만 아이반은 삐딱하게 창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적이 나타났는데 잡담을 듣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니오?”
아이반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창한 오크어. 심지어 그는 북동부식 오크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오크들의 언어를 이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정말 오크가 아니라면 피의 동맹 내에서도 흔치않았다. 하물며 인간이 그럴 줄이야. 오크 주술사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크들의 말을 할 줄 아는군?”
처음 아이반이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제일 난감했던 것이 바로 언어였다. 요상하게 생긴 놈들이 쏼라쏼라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체계에 최적화된 인물이었고,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이세계 기본 회화 같은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반에게는 스킬 포인트가 있었다. 언어학 스킬을 습득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스킬을 익히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언어학은 단순히 대화를 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의 지식을 주입해주더라.
여러 종족이나 지역별 언어, 고문 해석과 암호학, 기호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쓰임새가 많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언어학 스킬은 부가직업 중 하나인 언어학자 루트를 타기위한 기초 스킬이었으니.
단순히 외국어를 쉽게 익히는 것으로 끝난다면 스킬 포인트가 아까웠다.
하지만 적에게 그런 사정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이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단순해서 익히기 쉽더군. 멍청한 오크 대가리로 배우려면 언어 구조가 어려울 수가 없지.”
아이반이 도발하듯 그렇게 내뱉었지만 오크 주술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노련한 그가 적의 입담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흘흘, 그러한가? 나는 다른 언어를 익히는 것이 어렵던데.”
“그건 그대가 빡대가리라서 그런 거요.”
이 말에는 오크 주술사도 잠깐 당황했다.
“뭐, 뭣?”
주르륵 그렇게 짐짓 여유로운 척 하고 있었지만 아이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적의 정체를 알아차렸기에 한 치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
그린스킨이 자랑하는 네임드 주술사이자 후일 열두 명의 대주술사 중 하나로 추대되는 인물.
‘네임드라도 이건 너무 네임드인데?’ 물론 시기상으로 아직 대주술사가 된 시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놀라웠다. 대주술사도 아니면서, 본신도 아니고 분신으로 이 정도의 압박감이라니.
“얼마 전부터 인간들이 내가 깔아뒀던 토템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숨겨뒀던 수까지 꺼내들었는데 설마 전사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다니, 전혀 예상 밖의 일이야.”
테잔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아이반은 크게 불편함을 느꼈다. ‘무슨 꿍꿍이지?’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창을 붙잡았다.
처음과 달리 그의 정체를 알게 되니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괜히 카운터를 당할 것 같기도 했고.
할 수 없이 아이반은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오래된 나무들을 단번에 나무정령으로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꽤나 속이 쓰리겠어.”
“흘흘흘, 걱정해주는 겐가? 꽤나 마음이 따뜻한 전사로군.”
“그대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소. 배에 칼을 쑤시면 보통 화끈하다고 느끼더군.”
그 말에 테잔이 오크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놈. 인간들은 예의도 없나? 그렇게 따뜻해질 거면 자기 배나 찔러서 뒈질 것이지.”
” 오크어를 다 알아듣는다니까.”
“알고 있네. 들으라고 한 소리야.”
흘흘 웃으며 아이반을 놀리던 테잔이 이내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의 이름은?”
그 질문에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 아이반, 아이반 에시르손.”
아이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망했군.’ 하필이면 이 전투를 오딘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한 뒤라 이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건 영웅답지 못했으니까. 신들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아이반 에시르손.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겠네. 지금은 이렇게 보내주지만 다음은 쉽지 않을 거야.”
“보내준다고?”
아이반은 먼저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직도 주력이 남아있는데 그를 순순히 보내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분신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닐 .
무언가를 깨달은 아이반이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 추적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군.”
아이반이 이곳에 홀로 남아 시선을 끌고 있는 것처럼, 테잔도 아이반을 붙잡아 시간을 벌고 있었다. 쉽게 막을 수가 없는 강력한 전사와 굳이 싸움을 하는 대신 시간을 끌고 다른 오크 전사들로 하여금 도망간 인간들을 계속 추적하는 것. 오크 전사들은 충분히 강한 자들이었다. 아이반이 아니라면 부대원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나름 숨기고 있던 나무정령들까지 부서진 상황에서 그저 분신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말 몇 마디로 그것을 해냈으니 참으로 간교한 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