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0
하나하나가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피의 동맹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대악마의 목을 베기 위해 스트라븐으로 모였던 마리난 제국의 전력 역시 대단한 수준이었으나, 이들의 명성 역시 결코 그에 밀리지 않았다. 솔직히 능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피의 동맹이 자랑하는 최고의 전사들을 읊으면서도 어딘가 부족했는지 테잔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를 불러야겠어.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그라고 해도 이런 일이라면 빠지지 않겠지.”
테잔의 분신이 은밀하게, 하지만 무척이나 빠르게 피의 동맹 각 지역으로 퍼졌다.
신뢰의 연합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반쯤 부서진 요새에서 누군가 그를 마주했고, 메신의 영역에서 몸을 회복하던 누군가 미소 지었으며, 미래의 전사들을 키우던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고, 피의 동맹에서 가장 깊고 험한 산꼭대기에서 누군가 길을 나섰다.
무스파,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첫째 아들이자 후계자. 같은 나이의 오크 로드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는 차세대 최고의 전사.
그라드발, 오크투신 타르칸의 두 번째 도끼. 피의 동맹에서 가장 용맹한 지휘관.
튀르긴, 옛 트롤왕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다는 트롤 전사.
홀로 성벽을 넘고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전사들이 테잔의 분신을 맞이하고 합류를 선택했다.
마녀, 악신, 드래곤. 하나라도 가슴이 뛰는 강한 적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껄껄 웃으면서 기꺼이 달려왔다.
그 넓은 영역에서 모두 모이는 데 겨우 3주도 걸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서두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모두 피의 동맹에 소속되었다고는 하나 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은 극히 드물었다. 어디서 둘째라면 서러울 전사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속으로 서로의 실력을 재어 보며 투기를 숨기지 않았다.
혈기 넘치고 자존심 강한 전사들이 굳이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욱 맛있는 먹잇감이 있기 때문이 었다.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벌써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
서로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모두 동료 맞소? 벌써 피부가 저릿저릿한데.”
“모두 투쟁심이 강한 자들이니까. 강자와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게다가 자네들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야지.”
얼마 전 강자의 증명을 마치고 자신의 강함을 보여 준 일행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뜨거웠다. 그 끝에 그라드발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니 호승심이 치솟는 모양이다.
“강한 자로군. 내 심장이 뜨거워지는 전사야.”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큰 오크 중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오크 전사가 씨익 웃으면서 다가왔다.
“내 동생들이 신세를 졌다고 들었다. 만나서 반갑군.”
“나도 그대의 이름은 많이 들었소, 무스파. 동생들보다는 확실히 낫군.”
얼핏 서로 신경전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반에게는 이제 필멸자인 적이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무스파 역시 같이 오크로드의 피를 타고났을 뿐, 죽고 다친 동생들에게 그리 애정이 깊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와 상처, 죽음은 오크에게 친구보다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동생들이 이리 강한 상대와 먼저 싸웠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번 붙어 보고 싶은데,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군. 조만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
“워낙 바빠서 가능할지 모르겠소. 내가 굳이 그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너는 나와 붙을 수준이 되느냐는 아이반의 오만한 눈빛에 무스파는 기분 나쁘다기보다 즐거웠다.
오크는 괜히 겸손을 떠는 자들을 가식적이라 혐오했다.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고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야말로 강자가 내보일 수 있는 품격이었다.
약하면 건방지다고 당장 목을 베어 버리겠지만, 아이반은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듣자 하니 당신은 원시 거인과도 싸우고, 드래곤과도 싸웠으며, 옛 신과 대악마와도 싸웠다지? 강한 적이 그리 넘쳐나다니 참으로 축복받은 삶이로군.”
무스파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결코 놀리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반은 속으로 울컥 화가 치솟아 올랐으나 그걸 간신히 억눌렀다.
“이제 마녀와 악신을 상대하러 가니 그대들도 적이 부족하다 말하지는 않을 거요.”
“나의 도끼로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
그런 식으로 모인 전사들과 하나씩 인사를 나눈 아이반은 그라드발에게 다가갔다. 그는 시작부터 테잔에게 붙잡혀 한참이나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아니,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먼저 달려가서 왜 그 모양이야!”
메신의 영역에서 회복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라드발은 또다시 옆구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간을 본다면서 먼저 마녀의 흔적을 쫓다가 상처를 입은 거다.
“생각보다 재밌는 적이더군. 싸울 맛이 있는 상대야.”
테잔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그라드발은 술을 들이켰다. 이 정도 상처는 독한 술로 소독하면 된다고 껄껄 웃었다.
“덕분에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나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 말이지.”
다소 호전적이라고는 해도 그라드발은 피의 동맹 내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전사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그저 피와 전투에 미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노련함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테잔의 손이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지팡이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두 번은 아니리라 믿네. 정말이야.”
“전투는 내가 더 잘 알아.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라드발은 패배자라는 딱지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지 호탕하게 웃으면서 아이반을 반겼다.
오크들 사이에서 아이반을 수식하는 칭호 중 하나가 ‘그라드발을 이긴 자’인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패배로 무너질 만큼 나약한 자가 아니었다.
“왠지 최근에는 즐거운 싸움이 잦아졌다. 다른 이들은 그걸 우려하기도 했지만, 전사라면 일단 전장이 있어야지. 언젠가 올 어둠이라면 우리 시대에 온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 손으로 이겨 낼 수가 있으니까.”
이 호전적인 문화가 오크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치열한 싸움을 앞두고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이유였고.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사나운 이빨은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런 열정적인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 모양이다.
그때 다소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일행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동맹의 전사들까지 어느 한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멀리서부터 낡은 검을 허리 춤에 달랑달랑 걸치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발걸음은 틈이 없었다. 그가 한 걸음을 다가올 때마다 이곳에 모인 쟁쟁한 전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오크와 트롤이 가득한 이곳에서 그의 작은 체구는 무척이나 왜소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검귀 카락취.
고블린이라는 종족이 낳은 절대자, 피의 동맹 최강의 검사.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 큼 조용해진 공간에서 그가 입을 열 었다.
“내가 베야 할 것이 있다고 들었다.”
조금 전까지 호승심을 숨기지 않던 전사들이 카락취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진짜 강자를 마주하고 몸이 굳어 버리거나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었다.
강자와 싸우는 것은 영광된 일이었 으나, 하찮은 실력으로 덤비는 것은 그저 강자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전사들은 들끓는 투쟁심을 속으로 억눌렀다.
그라드발이 아이반에게 패배하고 더욱 강해지기 전까지는 덤비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이곳의 모든 전사들이 그가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무척이나 자의식이 강한 전사들이 기꺼이 약함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였다.
‘정말 조금의 틈도 없군.’
꽤 오랜만에 카락취를 마주하게 된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살피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아이반이 강해진 만큼 보는 눈도 좋아졌기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경지에 있는지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그의 칼이 뽑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게 피의 동맹이 자랑하는 최강의 검사였다. 대륙 전체를 놓고도 검으로는 감히 두 번째로 꼽기가 어렵다는 절대자였다.
‘이게 한낱 고블린이 가질 수 있는 힘인가?’
던전으로 변한 불타는 산에서 부활을 꿈꾸던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봉인했던 흡혈공 아키우스.
수만이 넘는 백성의 영혼을 불태워 평범한 인간의 왕에서 신격이 되고자 했던 위신 사샨트.
신화시대가 막 끝났을 때 태어나 필멸자의 몸으로 대륙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드워프의 영웅왕 소두린.
노르드 신화에 이름을 새겼던 난쟁이 왕의 둘째 아들, 포르니.
마리난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라인 하르츠 공작.
평화의 화신 메신, 자연의 구도자 테잔, 대스승 크뮨과 같은 대주술사.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와 가장 깊은 절망.
한 번에 읊기 어려운 그들은 모두가 필멸자의 끝을 바라보거나 아예 신격이었다. 아이반은 그런 자들과 마주했고, 때로 싸우기도 했지만 카락취의 존재감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는 아이반에게 최초로 벽이라는 것을 보여 준 자였다. 필멸자가 닿을 수 있는 강함의 끝이 무엇인지 알려준 자이기도 했다.
한낱 고블린으로 태어나 세상의 위대한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비록 그보다 더 강한 존재는 있을지언정 그보다 더 인상적인 존재는 없었다.
대륙의 북부, 얼어붙은 대지에서 그가 낡은 칼 하나로 하늘을 가리던 거인의 주먹을 막아서던 바로 그때 부터 카락취가 바로 아이반이 생각하는 강함의 기준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나씩 전사들을 보던 카락취의 눈동자가 일행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의 입술이 아주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전에 보았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일행의 수준이 카락취를 만족시킨 모양이다. 제법 강인한 리자드맨 전사에 불과 했던 사나운 이빨은 이제 용의 후예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고, 크게 인상이 없었던 델피노는 성자가 되었으며, 홀로 고독하던 이레인은 다시 세계수와 연결되어 그 힘의 흐름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이반에 이르러서는 이제 거의 반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감을 품고 있으니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난 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극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