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1
카락취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아이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바짝 긴장했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꺼낼 듯이 손이 움찔하고 가슴에서 투기가 치솟았다.
아이반은 간신히 그것을 억눌러 참았으나, 그 짧은 순간 마음속에 나타난 날카로운 칼날을 카락취만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투기를 음미하던 카락취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을 보았나?”
“그렇소.”
“그랬었군.”
라인하르츠 공작에게 몇 마디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반의 기세가 그와 닮을 이유가 전혀 없었을 텐데 어째 카락취는 그 속에서 라인하르츠 공작의 존재를 느낀 듯했다.
‘내가 라인하르츠 공작을 따라 하 고 있었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아이반이 만난 창을 쓰는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라인하르츠 공작이었으니 무심코 그를 정답으로 놓고 창을 휘두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놓아준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조언이었으니 그 영향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
그런데 카락취는 신뢰의 연합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라인하르츠 공작도 초기에만 잠깐 전선에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걸까?
“라인하르츠 공작과 싸워 본 적이 있소?”
아이반이 약간의 호기심을 담아 물 으니 카락취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 했다.
“예전에, 잠깐. 베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이 정도 경지에 오른 자들이 서로를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이상했다.
비록 카락취가 전쟁 이전까지는 인간 세상에서 그리 유명한 존재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제국의 공작쯤 되면 따로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겠지.
아이반은 뒷이야기가 궁금했으나 카락취는 더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라기보다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원래부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카락취의 관심은 오로지 검이었으니, 실상 고블린이라는 종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피의 동맹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상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옛이야기 따위를 진지하게 늘어놓는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싸웠으나 베지 못했다. 그거면 그로서는 말을 다한 것이다.
다만 그 짧은 말에도 의미가 있었기에 몇 번을 되새겨 과정을 유추한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카락취의 우위, 그러나 차이는 근소해서 쉽게 결판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는 건가?’
라인하르츠 공작은 일개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공작이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싸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신분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가 움직이면 그가 직접 뽑아서 가르친 황금 사자 기사단도 함께 움 직였다. 황금 사자 기사단은 전장에 서도 라인하르츠 공작의 곁을 지킬 테니, 상황이 어떠했든 결국 카락취는 그들을 뚫고 공작과 싸웠다는 소리다. 그 후에 죽지 않고 빠져나왔으니 근소하게나마 우위였겠지.
‘목숨 걸고 싸우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카락취가 질 것 같지 않았다. 라인하르츠 공작도 물론 인간 세상에서 손꼽히는 강자지만 그만큼 카락취의 존재감이 컸다.
“흠, 그러면 이제 올 만한 사람은 다 왔군. 작전을 알려 주겠네.”
뒷짐을 지고 있던 테잔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찍으니 땅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슥-
흙과 모래, 잡초와 돌멩이가 서로 갈라지고 합치면서 입체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마치 그 지역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자연과 소통하는 대주술사가 그 지역의 땅을 훑어보고 작게 옮겨놓은 것이다.
“추정하기로 이 협곡에 화염 드래곤이 도착했어. 그걸 알아차린 마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지.”
본래라면 그 시점에서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마녀를 쓸어버려야만 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용맹한 전사, 그라드발이 잠깐 살폈는데 아주 자연스러운 결계로 가리고 있지만, 그 너머는 완전히 이계의 땅이 되어 버렸다더군.”
테잔의 시선을 받은 그라드발이 고 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본 것을 설명 했다.
“바닥에 고인 물은 그 어떤 썩은 물보다 역겨운 냄새가 풍기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만으로 폐를 찢었다. 바위가 생물의 피를 빨고, 평범했던 동물이 기괴한 괴물이 되어 기어 다녔지. 내가 본 가장 끔찍 한 전장이었다.”
그라드발이 공포스러운 풍경을 묘사했으나 전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로 겁먹을 자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다.
“나와 다른 주술사들이 그 공간을 최대한 안정시킬 테니 적어도 숨 쉬다가 폐가 찢어지는 경우는 없을 거라네. 다른 말로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장담할 수 없어. 상대는 신화시대를 끝냈던 악신과 그들을 따르는 마녀야.”
잠시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바라보던 테잔이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모두, 신을 죽인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게.”
어느 때보다 단단히 준비한 전사들이 씨익 미소 지으며 걸었다. 지금 이 길이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았다.
항상 죽음을 마주하는 전사들에게는 삶과 죽음 그 자체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한 법이었다. 그들에게 전투는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이자 방법, 또한 목적이었다.
당당히 싸우다 죽는 것은 곧 신념 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두렵지 않았 다.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이 꿰뚫리 는 고통보다 하찮고 비열한 존재가 되는 고통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비루한 삶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대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오크 전사들이 그리 소리치고는 협곡으로 들어갔다. 은밀하게 숨겨진 결계가 그들을 막았으나 테잔이 지팡이를 내리찍으니 쩍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사사삭!
찢어진 결계로 흘러나오는 독기가 바닥에 깔려 있는 새싹을 죽였다. 이제 겨울이 끝나 봄에 접어들었는데, 이곳만은 다시 겨울이 된 듯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기 있는 자들은 죄다 내성이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따끔따끔 했다. 바람에 섞여 날아다니기에는 독성이 제법 지독했다.
“저주, 흑마력, 악마의 기운도 섞여 있군.”
그냥 기분 더러운 것은 죄다 섞어 놓은 모양이었다. 사나운 이빨은 벌써부터 역겨운 냄새 때문에 코가 불편한 듯했다.
결계 안쪽, 이계로 변한 협곡은 실로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양옆에 늘어선 절벽에서 어두운 손이 수백, 수천이나 삐죽 솟았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돌바닥은 어째서인지 물컹했다.
절벽에 피어난 꽃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는 잎을 마치 이빨처럼 딱딱 거리며 역겨운 진액을 홀렸다. 어두운 하늘을 가리는 구름이라 생각했던 것은 하나로 뭉쳐진 저주와 원령이었고, 별빛이라 생각했던 것은 박쥐인지 벌레인지 모를 기묘한 생물의 눈동자였다.
단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비위가 약한 자는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냈을 거다. 정신이 약한 자들은 자신의 뇌를 긁어대는 광기에 먹혀서 미쳐 버렸을 것이다.
치치치칫!
하늘에 가득한 벌레들이 요란한 날갯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저주와 원령이 피눈물을 흘리며 붉은 비를 뿌렸다.
정령을 불러 그것을 막으려던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령이 소환되지 않는다. 희미하게 존재는 느껴지는데 다가오지 않아.”
“반쯤 이계가 되었으니 정령이 돌아다니긴 버거운 곳이지. 신의 힘도 매끄럽지는 않소.”
아이반이 그리 대꾸하자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시선을 가리고 있군요.”
이 모든 것은 마녀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건 즉 악신의 신성력이 가득한 장소란 뜻이니 외력이 순탄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화아아-
델피노가 성흔을 빛내며 신성력을 뿌리자 어둠이 훅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떨어지던 붉은 비 역시 저주가 흩어지며 사라지다가 다시 짙어졌다.
“쉽게 밀어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미 이곳에 새겨진 마녀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요.”
델피노의 신성력이 무척이나 거슬린다고 여겼는지 저 멀리서 짙은 마력이 요동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마력이 어둠에 스며들어 그것을 역겨운 이계의 마물로 만들었다. 이제 전사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길을 열어라!”
오크들은 원래 전쟁을 선언할 때 창을 던져서 시작한다. 적의 가장 앞에 있는 자를 노리는 것으로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을 위협하는 것이다.
가장 강한 자가 앞에 서는 것은 오크의 문화였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번에 가장 강한 자라면 역시 카락취겠지만, 그는 애초에 오크도 아니고 허례허식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다.
제대로 서열이 나뉘지 않았기에 각자 두 번째쯤은 된다고 여긴 오크 전사들이 창을 적에게 집어 던졌다.
쉬이익-
강력한 전사들이 힘을 가득 담아 쏘아 보낸 투창은 공성 병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발리스타도 거뜬히 버틸 이계의 마물들이 창에 꿰뚫려 쓰러졌다.
어둠을 찢고 땅을 부쉈다. 어둠의 마물들은 피조차 흘리지 않고 사라졌고, 땅은 비명을 지르면서 진액을 터트렸다.
두두두두!
땅의 형태로 숨어 있던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흙과 바위로 된 몸이었으나, 동시에 끈적이는 산성의 체액이 내부에 흐르고 있었다.
생명체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계의 마물은 평범한 상식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놈들이었다.
“신기한 녀석이군.”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첫째 아들, 무스파가 큼지막한 도끼를 휘둘렀다. 이계의 마물은 그야말로 바위로 된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스파는 그것을 마치 무자르듯 깍둑썰기를 해버렸다.
역겨운 체액이 그를 덮쳤지만, 무스파는 짧게 마력을 뿜어내는 것으로 막아냈다.
치이익-
바닥에 떨어진 녀석의 체액이 땅을 녹이고 들어갔다. 한 방울이라도 뒤집어썼다가는 영 곤란한 꼴이 될 것 같았다.
휘이익!
녀석들은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서 날리기도 했다. 닿기만 해도 뼈와 살을 녹이는 위험한 체액과 큼지막한 바위가 사방에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