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2
쾅!
사나운 이빨의 방패가 바위를 막아 냈다. 뼈와 살을 녹이는 체액은 뜨거운 용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불길을 넘을 수 없었다.
“이곳에 내가 있다!”
사나운 이빨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벽을 세우자 후방에 모여 있는 주술 사들이 손을 내저었다. 날아오던 돌덩이가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역으로 돌아가고 거칠게 날뛰던 이계의 마물들이 평범한 흙과 바위가 되어 무너졌다. 이계의 마력에 물들었던 세상을 본래의 자연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러나 주술사들을 이끄는 테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 효율적이지가 못해. 이 땅은 너무나 우리에게 적대적이야.”
들어간 주력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이계에 침식된 공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도 곧 이계의 땅으로 변했다. 대주술사의 술법으로도 단번에 밀어낼 수 없을 만큼 이 땅의 오염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테잔이 열두 번째 대주술사라면 상대도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악한 지혜를 쌓아왔을 악신의 제사장이었다. 준비가 허술할 리가 없었다.
캬아악!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하늘을 날아와 불을 내뿜었다. 박쥐의 날개와 늑대의 머리, 뱀의 몸통과 새의 다리를 가진 괴물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악마가 틀림없었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악마로 만든 키메라, 마녀는 모두 저런 것이 취미인가.’
악마조차 실험체로 삼아 제멋대로 몸을 찢어서 붙이는 게 바로 마녀였다. 그런 상대와 악마가 잘도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저런 지독한 모습이 실로 악마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하긴 악마들에게 동족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을 거다. 어차피 악마들끼리도 저런 짓을 하고 있을 테니까.
피우웅-
이레인의 화살이 녀석을 노리고 쏘아졌다. 키메라 악마는 화살을 불태우겠다는 듯 불꽃을 내뿜었으나, 이레인의 화살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 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꺾이며 녀석의 몸을 꿰뚫었다.
캬아악!
녀석의 옆구리에 큼지막한 구멍이 생겼다가 빠르게 아물었다. 실로 놀라운 수준의 재생력이었으나 이레인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며 활시위를 당길 뿐이었다.
“잡았어.”
팅!
높고 가느다란 소리와 함께 시위에 걸려있던 화살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떻게 날아갔는지도 모르게 키메라 악마의 몸에 박혀 있었다.
악마의 날카로운 감각으로도 그걸 제대로 알 수 없었는지 녀석은 당황한 신음을 흘리며 마구 몸을 비틀었다. 실로 악마다운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악마의 노력에도 회피 할 수가 없었다. 이레인이 기계적으로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녀석의 몸에 하나씩 화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웅-
이계의 땅으로 변해서 정령들의 도움을 얻기 어려웠으나, 그것을 채우듯 세계수의 가호가 이레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손놀림 하나하나를 세계수가 보조했다. 그동안 엘프라는 종족이 쌓아 올린 기술이 세계수에 새겨져 있다가 이렇게 흘러 나오는 것이다.
세계수의 가호가 가진 힘은 이런 것이었다. 단순히 막대한 신력으로 고대 요정의 무기를 백업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엘프 최고의 기술을 담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평범한 엘프라면 그걸 감당하기 힘들겠지만 이레인은 가능했다. 그동안 조금씩 쌓아 올린 격이 그녀의 속에 잠들어 있던 가능성을 깨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세계수의 무녀가 될 자격이 있었다. 모든 엘프가 나눠 가진 세계수의 신성을 잠깐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용량이 커졌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세계수의 가호를 받아 그 힘을 발휘하는 순간만은 이레인이 엘프 역사상 최고의 궁수였다.
후두둑!
키메라 악마를 시작으로 아군을 노리고 날아오던 적들의 몸이 몇 갈래로 찢어져 땅에 처박혔다. 이레인이 홀로 수십의 사수와 같은 몫을 해내고 있었다.
“예전에 뛰어들었을 때와는 다르군. 훨씬 수월해.”
한번 이곳에 들어왔다가 다른 전사들을 모두 잃고 패퇴한 적이 있는 그라드발이 허탈한 듯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도 강한 전사들이 함께한다는 것이 든든하고, 또 그 자리에 자신이 같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런 위대한 전장에서 싸운다는 것 만으로 영적으로 충만하게 차오르는 듯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이게 전사의 행복이었다.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를 위해!”
오크투신 타르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그라드발이 달려들었다.
때로 실체를 가진 저주가 앞을 막고, 지독한 원한을 가진 악령이 나타났으며, 뭐라 설명하는 것이 좋을 지 알 수 없는 역겨운 마물이 덤벼 들었으나 그 모든 적을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테잔이 고르고 고른 전사들이라 상처 입은 자들은 있어도 목숨을 잃은 자들은 없었다. 전사들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그 모든 전사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단순히 용맹하기만 한 전사들이 아니라 노련하고 현명한 전사들이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군. 뭔가 올 때가 되었어.’
이리 쉽게 밀고 나갈 것이라면 쟁쟁한 멤버들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테잔이 몇 번이고 경고할 리가 없었다.
무언가 있다. 논리보다 강력한 전사의 감이 먼저 위험을 알렸다.
쉬이익!
쾅!
창이라기보다는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기둥에 가까운 것이 전사를 공격했다. 다급히 몸을 날려 피했으나 그 충격파만으로 몇 번이고 땅을 구르기에 충분했다.
흙더미가 솟구쳐 올랐다.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마녀의 마법이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쉬이익!
다시 한번 공격이 쏘아졌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고, 귀로도 들을 수 없었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왔기 때문이다.
오로지 뛰어난 기감과 전사의 본능 만으로 그것을 회피하고 막아냈다. 통나무가 떨어지는 각도만으로 적의 위치를 예상해 역으로 창을 날리기도 했다.
휘이잉-
테잔이 손을 내저으니 시원한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마녀의 마법도 흩어졌다.
그러자 저 멀리서 거대한 자들이 달려오고 있음이 보였다. 거인족의 출현이다.
“저들이 왜?”
거인들은 태생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마력을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그저 강대한 육신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력을 혐오하고 마법과 주술, 온갖 이능을 증오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들이 마녀와 함께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물론이고 그의 일행과 얼어붙은 대지에서 거인의 군세와 싸워 본 적이 있는 몇몇 전사는 코웃음을 쳤다.
“마녀가 뭔가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던져 줬나 보지.”
거인의 혐오감이란 상대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질투였을 뿐이니 전사의 당당함이 아니라 비열한 소인배의 투정일 뿐이다.
그들이 악마의 추종자, 오래된 리치와 손을 잡은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마법과 주술을 혐오하는 전사의 종족이라는 말은 그저 헛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거인은 신념이 강한 자들이 아니라 욕망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짙고 깊은 욕망의 덩어리인 원시 거인의 영락한 후손이었으니 태생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사슬에 얽매여 있었다.
쿵!
커다란 덩치로 성큼성큼 뛰어 빠르게 다가온 거인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기둥 같은 창으로 찌르고, 벽 같은 검으로 내리쳤다.
과연 육신의 힘만은 비할 바가 없이 뛰어난 자들이라 강하고 억센 전사들이 거인의 공격을 받아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억!”
덩치가 큰 만큼 공격 범위도 넓어서 피한다고 피해도 완전하지 않았다. 거대한 검에 스치듯 부딪힌 전사 하나가 짧은 비명과 함께 완전히 짓눌려 사라졌다.
치지직!
쾅!
아이반은 다리에 천둥을 머금고 오히려 달려들었다. 거인의 품을 파고 들어 녀석의 무기를 피했다. 그리고 어두운 용의 발톱을 살포시 밀어 넣듯이 내밀었다.
푸와악!
그 간단한 동작에 거인의 심장이 꿰뚫렸다. 약간 짧지 않았나 싶었지만, 어두운 용의 심장은 아이반의 마력을 머금고 쑤욱 길어져 녀석의 심장을 헤집어 놓았다.
아이반이 창을 뽑아내고 녀석의 몸을 발판 삼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거인의 육신이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땅을 울렸다.
쿵!
꿰뚫린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덩치만큼이나 피도 많아서 작은 연못을 만들 정도였다.
그사이 그라드발이 하나를 죽였고, 또 무스파와 튀르긴이 하나씩 더 쓰러뜨렸다. 강대한 거인이라고 해도 이 위대한 전사들을 막기엔 어려워 보였다.
그때 짙은 어둠 너머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둥!
두둥!
뿌우우우!
긴 뿔피리 소리와 함께 바닥을 적신 핏물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마법진을 그렸다. 불길한 마력이 그것을 따라 휘몰아쳤다.
“막아야 해!”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전사들이 각자 무기를 휘둘러 땅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핏물은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테잔이 지팡이를 내리찍고 공간을 뒤흔들었으나 거인의 핏물로 된 마법진은 사라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날 뿐이었다.
“늦었네. 이미 준비는 끝났고 이건 시작을 알리는 것뿐이야. 어마어마한 것이 오는군.”
테잔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이 쩍 갈라지며 공간의 틈을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무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