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4
분명 고블린으로 태어났으나 그는 고블린의 방식이 맞지 않았다. 약자의 교활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고, 강자의 오연함이 그에겐 어울렸다.
고블린 중의 최고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통의 고블린보다 커다란 덩치를 가졌기에 힘으로도 속도로도 그를 이길만한 자는 많지 않았다.
다만 평범한 고블린에게 싸움이란 적의 빈틈을 노려서 목숨을 끊고 살아남는 일이었지, 서로의 강함을 견주는 일이 아니었다.
몇이나 되는 동족과 싸워 이겼으나 영 개운하지 않았다. 제법 이름을 날린 고블린 전사를 쓰러뜨렸을 때도 그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쓰러진 전사들을 바라보던 카락취에게 늙은 고블린 주술사가 말했다.
“너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익숙한 말이었다. 이미 몇 번이고 들었고,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단지 살아남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강해지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건 고블린의 틈에서는 너무나 이 질적인 생각이었다.
“너의 강함은 놀라우나, 너무나 위험하다. 우리는 강하지 않기에 교활해졌고, 그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느니라. 약자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곳을 떠나라.”
그리 말하는 늙은 고블린 주술사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날고뛴다 해도 결국은 고블린,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나약한 육신과 나약한 정신, 나약한 종족의 한계가 그 늙은 고블린 주술사에게는 너무나 선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락취는 어둡고 축축한 고블린의 굴을 떠나 세상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세상에는 너무나 강한 자들이 많았다. 스스로 강자라 여겼던 카락취는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 깨달았다.
고블린치고 건장하고 튼튼한 육신은 다른 종족이 보기엔 그리 대단할 것 없었다. 타고난 육신이라는 것도 결국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뭐야? 겨우 고블린이 나에게 덤빈단 말이냐!”
그가 싸움을 청하면 이리 불쾌한 표정을 짓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감히 한낱 고블린이 덤벼들 만큼 자신이 하찮아 보였냐며 화를 내고는 했다.
몇 번이고 나가떨어지며 죽음의 위기를 넘긴 카락취는 조금씩 강해졌다. 하찮은 고블린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끝끝내 고꾸라질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그는 계속해서 세상의 이름난 전사들을 꺾으며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재능이 하찮은 고블린에게 깃들었다는 사실을.
그리 얕보던 고블린이 세상의 검을 든 자들을 모두 아래로 누르고 정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며 살아온 그는 거인 신조차 두렵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 그에겐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니까.
스윽-
낡은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리 보아도 거인 신에게 닿기에는 너무나 짧고 가느다란 검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거인 신의 몸에 선이 새겨졌다. 살이 갈라지고, 근육이 찢어지며, 뼈가 끊어 졌다.
거인 신이 거세게 분노하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며, 권능을 사용 했으나, 그 모든 공격이 고블린의 낡은 검에 가로막혔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낡은 검은 끝내 부러지지 않았고, 거인 신을 몰아붙였다.
비록 영락하여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들 과연 일개 필멸자가 거인 신을 이리 쉽게 몰아붙일 수가 있나?
그런 의문과 함께 아이반은 깨달았다.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검귀 카락취는, 평생 검을 쥐고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사는, 이미 좁디좁은 천상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 있는 모두는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신 카락취.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로 태어나 마침내 신화가 되어 버린 자.
카락취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거인 신의 육신이 떨어져 나간다. 세상이 요동치고 땅이 뒤집혀도 낡은 검은 흔들리지 않고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모두는 경이로움에 몸을 떨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훌륭한 전사였기에 카락취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검이 사실 너무나 아름다운 이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강한 자를 넘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초월적인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스스로 초월적인 존재로 승화하고 있었다.
그저 검밖에 모르던 고집스럽던 고블린은 이제 감히 검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는 중이었다.
신화시대가 끝나고, 실로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이 땅에 새로운 신격이 나타났다. 아마 달의 여신 셀룬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오늘 귀한 구경을 했구먼.”
테잔이 허허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본인도 필멸자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신성을 획득할 수 있을 만한 존재였으나,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도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걱정스럽군. 닫혀 있던 천상의 문이 이리 열리다니.’
흡족한 미소를 짓던 테잔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새로운 초월자의 탄생을 억누르고 있던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옛날 대전쟁 이후 차원방벽이 새로운 초월자의 탄생을 어렵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외계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목적이었지만 동시에 내부의 존재가 성장하기 어려워졌고, 심지어 이 세상의 정당한 신격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러다 최근에 차원방벽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났고, 카락취는 위대한 재능과 노력으로 그 틈을 찢어 버리고 스스로 신격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제 곧 뱀신 모르나가 육신을 가지고 완전히 부활할 예정인 것도 그렇고, 방금 싸웠던 거인 신도 그렇고, 대악마가 둘이나 소환되었던 것이나 대륙 각지에서 옛 신격이 깨어 나는 것까지.
아직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늘 신격이 천상에서 내려와 지상을 돌아다니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세상은 이제 진정으로 새로운 신화시대를 맞이해야만 했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에 큰 감동을 받았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았기에 테잔은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검신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신명을 얻었군.”
검신 카락취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신성이 그가 무엇을 상징하는 존재인지 전해주었다. 그렇기에 아이반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신격이 많지만, 그 누구도 검을 대표하는 신격은 없었다. 전신이나 투신, 무신으로 분류되는 자들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님에도 감히 검신을 자처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 고귀한 칭호를 한낱 고블린이 가져갔으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다.
우웅-
아이반은 감탄하는 중에도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막 새로운 신격이 탄생했으나 적은 한때 신격이었던 초월자, 원시 거인이었다.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카락취가 녀석의 몸을 잘라내고 피를 뿌리니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았으나 그러고도 단번에 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우드득!
테잔이 불러낸 거대한 나무뿌리가 거인 신의 발을 붙잡았다. 아이반은 다시금 브리카를 타고 날아올라 녀석에게 향했다.
쉬이익!
하늘 높이 올라간 아이반이 바람을 가르고 거인 신에게 달려들었다. 거인 신은 그게 무척이나 거슬렸으나, 당장 자신의 몸을 잘라내는 카락취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
“오딘!”
아이반이 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그에 답하듯 신력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비록 이계로 변한 공간이라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예전처럼 막대한 양은 아니었으나, 오딘의 신력은 이미 아이반이 품고 있는 기운과 섞여 크게 증폭되었다.
휘이잉!
아이반을 등에 태우고 날고 있는 브리카의 주변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거센 바람이 사방으로 쏘아지고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회오리가 거인 신으로 뻗어갔다.
마력이 주입되니 어두운 용의 발톱이 점점 커진다. 일반적인 창의 길이를 넘어 공성병기에 가까운 모습이 되자 아이반은 그것을 거인 신에게 집어 던졌다.
아이반의 완력과 마력, 브리카를 타고 날아가던 속도와 주위에서 몰아치는 폭풍이 하나로 모여 어두운 용의 발톱을 거인 신에게 밀어 넣었다.
쿠구궁!
폭풍을 휘감고 날아간 창이 거인 신의 가슴에 박혔다. 거인 신은 몸을 뒤틀어 그것을 피하려고 했으나, 카락취의 검이 움직임을 막았다.
쾅!
세상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막대한 충격이 밀려왔다. 흩어지는 폭풍이 뿜어낸 바람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거인 신의 몸짓이 땅을 뒤흔들었다.
– 너희들이 막을 수 있을 듯싶으냐!
거인 신이 소리치며 손을 내미는 것을 트롤 전사 튀르긴이 막았다. 그는 트롤 특유의 뛰어난 재생력과 신체 능력을 극도로 발휘해 한껏 몸을 부풀리고 숨겨 두었던 비기를 꺼내 들었다.
“나에게 산을 밀어낼 힘을!”
튀르긴의 온몸을 가로지르며 새겨진 주술 문신이 빛을 뿜었다. 그의 부족이 대대로 섬기는 조상신과 자연령이 힘을 전해 주었다.
쾅!
튀르긴이 주먹을 휘둘러 거인 신의 발을 후려치자 녀석이 균형을 잃고 자세가 비틀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으로 아이반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조화로움이 이 땅에 임하리라.”
이레인이 낮게 중얼거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최초의 일곱 요정 중 하나, 팔라시온이 후손을 위해 담긴 활이 유려하게 휘어지며 빛으로 된 화살을 만들었다.
엘프의 결전 병기, 고대 요정의 무기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레인의 등 뒤로 흐릿하게 세계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이계화가 되어 버린 땅이라 선명하지는 않았으나 세계수에 축적된 엘프의 힘이 이레인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피우웅-
낮고 조용한 발사음과 함께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빛의 화살이 거인 신의 팔을 꿰뚫었다. 그리고 빛의 화살에서 뻗어 나온 사슬이 거인 신의 육신을 묶고 그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다.
거인 신의 힘을 빨아들인 빛의 화살이 잘게 부서지며 이 암울한 땅에 생명을 자아냈다. 빛의 가루가 땅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싹이 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라나 숲을 이루었다.
이계의 공간이 세계수의 힘으로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역겹고 매캐한 냄새가 싹 사라지고 상쾌한 숲 냄새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 분노가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다!
비쩍 말라붙던 거인 신은 자신을 묶어 놓던 나무뿌리와 빛의 사슬을 모두 끊어내고 이리저리 베이고 꿰뚫린 육신을 순식간에 회복했다.
상처 입고 약해지던 것이 착각이라는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뿌리며 세상을 위협했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