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85
거인 신이 한껏 허리를 비틀었다가 주먹으로 땅을 후려치자 세상이 기울기 시작했다. 대지가 솟구치고 하늘이 무너졌다.
“빛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화아아-
델피노가 펼친 보호막이 최대한 아군을 끌어당겼으나 너무 멀리 있던 전사 몇몇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거인 신의 균형을 무너뜨렸던 튀르긴이 눈, 코, 입 모두에서 피를 내뿜었다. 옛 트롤왕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았다는 위대한 전사였기에 겨우 버텼을 뿐이다.
“스비드리르(Svidrir: 진정시키는 자).”
아이반이 주문을 읊으며 거인 신의 권능에 저항했다. 홀로 피하려 했다면 어렵지 않았겠으나, 다른 이들까지 지키려고 하니 숨이 턱 막혔다. 보호하는 것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남들이 견디고 있는 동안 카락취가 움직였다. 그는 기울어진 땅에서 솟구친 바위를 발판으로 삼아 거인 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계속해서 집중해 완성한 검을 풀어놓았다. 평소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으나, 필멸자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신격으로 발돋움한 지금은 그동안 상상만 하던 것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착!
카락취가 검을 세웠다. 그가 처음 검을 쥐었을 때 했던 것처럼 얇은 검 너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스윽-
선을 그린다.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을 잇는 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카락취의 검이 움직였다.
무시받는 고블린으로 태어나 가장 지고한 자리에 도달한 카락취가 평생 추구했던 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기고 마침내 정점에 앉은 삶의 방식. 방금 완성된 이 검의 이름은 없었으나, 그 결과는 선명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온 카락취의 삶처럼, 땅에서 시작된 선이 하늘에 닿았다.
스걱!
땅이 쩍 갈라졌다. 거인 신의 몸이 찢어지고, 하늘은 둘이 되었다. 카락취는 검 하나로 세상을 갈라 버리고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스스로 축하했다.
– 이런 끝은, 원치 않았는데……!
거인 신의 육신이 무너져 내린다. 그 거대한 몸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오랜 세월을 넘어 돌아온 거인 신이 또다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와아아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거인 신이 쓰러지는 모습에 전사들이 크게 환호했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과 옛 신격의 퇴장. 그야말로 신화적인 전장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전사들의 심장이 두근거려다. 이런 위대한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몹시 영광스러웠다.
제법 많은 전사가 죽거나 다쳤지만,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승리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카락취는 승리에 취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았다.
카락취에 이어서 테잔, 아이반 등이 차례로 표정을 굳힌 것을 보고서야 길었던 함성이 사라졌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등골이 서늘했다. 전혀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 곳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서늘하고 축축한, 그리고 소름 돋는 악의가 느껴진다. 비틀린 시선과 갈 곳을 잃은 분노, 살의가 몸을 찔렀다.
추욱.
이레인이 만들어 낸 싱그러운 숲이 순식간에 시들고 오염되었다. 상쾌한 공기가 사라지고 다시금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이계의 땅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사들은 원래 싸울 상대가 거인 신이 아니라 악신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스윽-
카락취가 갈라 버린 하늘 너머에서 요사스러운 눈동자가 나타나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악신이었다.
신격과 요정, 드래곤에게 패해 차원 너머에 유폐된 존재라기엔 너무나 강해 보였다. 녀석을 붙잡고 있던 봉인의 사슬이 크게 헐거워진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악신도 결국 유폐에서 풀려난 거요?”
아이반이 물었으나 테잔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러나 아슬아슬하다네.”
이미 많은 전사가 죽거나 다쳤고, 남아 있는 자들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새로 탄생하신 검신께서는 어떤 생각이시오?”
아이반의 시선을 받은 검신 카락취는 태연히 낡은 검을 쥐고 대답했다.
“베어야 할 것이 있다면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그리 살았다.”
필멸자가 위대한 신격이 되었음에도 카락취의 표정에서는 한 점의 자랑스러움이나 만족감이 없었다.
신격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새로운 검을 터득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 기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초월자, 그리고 신격이라는 것조차 카락취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긴, 그는 그런 자였다. 검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그저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불과했다.
‘이런 자이기에 신격이 될 수 있었 던 건가?’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면서 창을 쥐었다. 적이 남아 있다면 나아가야만 했다. 설령 또 다른 신격이라고 해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다들 생각을 정리한 것을 확인한 카락취가 검을 휘둘렀다. 그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허공이 쩍 갈라지며 새로운 통로가 생겼다.
갈라진 통로 사이로 꿈틀거리는 촉수가 보였다. 날카로운 이빨과 잔뜩 굽어진 발톱, 흘러내리는 체액도 있었다.
역겨운 점막에 붙잡힌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녀는 힘없이 숨을 내뱉고 있었으며, 마녀들은 그녀의 힘을 뽑아 악신을 부르는 술법을 진행 중이었다.
‘쉴 시간이 없군.’
아이반은 창을 내밀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갈라진 공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후끈한 열기와 시린 차가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애써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해도 숨이 턱 막혀서 전혀 호흡이 되지 않았다.
세상 만물이 불친절하다 못해서 적대적이었다.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 끊임없이 시련을 마주해야만 했다.
우웅-
아이반이 창을 굳게 쥐고 폭풍신 오딘의 신력을 뽑아내자 겨우 호흡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삼킨 공기마저 폐를 태워 버리는 독기를 머금고 있어서 거의 모든 종류의 내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반의 육신으로도 오래 버틸 만한 것은 아니었다.
탁!
뒤이어 공간을 넘어온 테잔이 지팡이를 내리쳐 주변 환경을 익숙한 형태로 뒤바꾸지 않았다면 아마 모든 전사가 도착하자마자 목을 틀어쥐고 쓰러졌을거다.
“후우, 지독한 곳이군.”
이미 평범한 인간을 한참이나 벗어난 육체는 몇 분 정도 숨을 쉬지 않았다고 치명적이진 않았으나 아이반은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호흡의 소중함이 지금은 무척이나 절실했다.
“불쾌하다. 누군가의 입안에 있는 느낌이다.”
사나운 이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리 내뱉었다. 호흡할 수 없는 축축한 공기와 역겨운 냄새, 사방에서 내리누르는 살기가 뒤섞여 그의 예민한 감각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었다.
전사들이 하나씩 공간을 넘어 도착할 때마다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이곳은 그들이 경험한 최악의 전장일 거다.
아군이 모두 넘어오는 것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 마녀들은 마력을 흩뿌려 병사들을 불러냈다. 하나같이 역겨운 외형을 지닌 어둠의 마물이었다.
그림자 너머에서 마녀가 불러낸 어둠의 괴물들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팔이 여덟 개쯤 더 많은 거대한 사마귀 형태의 괴물이 칼날 같은 손톱으로 전사들을 찢으려 했다.
“이런 녀석들로 시간이나 벌 수 있는가!”
오크투신 타르칸의 권능을 받은 그라드발이 한층 커다랗게 변한 팔뚝으로 검을 휘둘렀다. 바위를 우습게 가르는 사마귀 괴물의 발톱이 꺾이고 상반신이 터져 나갔다.
검을 휘둘렀는데 베이지 않고 터져 나가는 기묘한 모습에 무표정하게 활시위를 당기던 이레인마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무식한 힘이네. 묠니르를 몇 번이나 얻어맞으면서 다가왔다더니.”
아이반이 휘두르는 묠니르라면 웬만한 고위급 악마조차 한 방에 피떡이 될 정도였다. 그걸 몇 번이나 버티면서 조금씩 다가올 정도라면 실로 축복받은 육신이란 뜻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따지면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는 거인 신에겐 크게 활약하지 못했으나 마녀가 보내는 자잘한 놈들은 그라드발이 아예 갈아 버리고 있었다.
“거인 신을 끌어들인 놈들이오. 놈들이 더 수작을 부리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하오.”
아이반이 그리 소리치자 전사들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지만 남은 자들은 더욱 용맹하게 나아갔다.
쿵!
실드 차지, 방패를 사용하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방법.
사나운 이빨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상대를 밀어냈다. 그의 불타는 마력을 머금은 충격파가 전방을 뒤흔들고 어둠의 마물을 멀리 날려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앞이 열리자 아이반이 달려 나가며 창을 휘둘렀다. 어두운 용의 발톱이 신창 궁니르의 권능을 담아 공간을 뛰어넘어 마녀의 목을 노렸다.
챙!
어두운 용의 발톱이 막혔다. 평범한 반응 속도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할 공격이 너무나 쉽게 가로막히자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보이는 모든 것을 해석했다.
“공간이 지나치게 꼬여 있군. 그냥 창을 찔러서는 닿을 수가 없겠어.”
눈으로 보이기는 바로 앞이었으나, 실제로는 그사이에 몇 겹이나 되는 공간이 끼어 있었다. 이리저리 공간을 잘라 붙여서 벽을 만든 것이다.
스스슥-
악신의 마력이 새어 들어오더니 역겨운 촉수가 되어 어느 전사의 몸을 붙잡았다.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첫째 아들, 무스파가 그것을 끊어냈으나 잘려 나간 촉수는 그대로 전사에게 흡수되듯 스며들었다.
“으윽! 이건……”
촉수가 파고든 전사의 몸이 빠르게 변이를 시작했다. 어깨뼈가 튀어나오고 손가락이 길어지며 촉수처럼 변했다. 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광기가 그를 덮쳤다.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를 경배하라!”
침을 질질 흘리며 아군을 공격하던 전사가 문득 이를 악물고 검을 돌려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악신의 손에 놀아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전사다운 최후를 맞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전사의 숭고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먹이삼아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 수많은 이빨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섯 개의 팔과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악신의 권속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