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
“싸움을 피하다니 오크답지 않군.”
“나는 전사가 아니니까. 오크가 모두 그러하리라 생각하지 말게. 주술사에겐 주술사의 방식이 있는 법이니.”
흘흘 여유롭게 웃던 테잔이 말했다.
“테잔. 나의 이름을 그대도 기억하게. 그래야만 할 테니 .”
쉬이익! 퍽! 아이반이 던진 창이 그대로 테잔의 몸을 꿰뚫었다.
분명 아직 주력이 충분히 남아있을 텐데도 그는 자신의 분신을 재생시키지 않았다. 그건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쓸데없이 주력을 소모하지 않고 아끼겠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당했어,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서둘러 달려갔다.
먼저 도망친 부대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쉬이익!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지만 아이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탁! 마침내 부대원들을 발견한 아이반이 멈춰 섰다.
숲을 벗어나기 직전, 얼마 남지 않은 거리.
그곳에 바닥을 뒹굴고 있는 시체가 가득했다. 사지중 하나가 떨어져나가 흙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사람들. 방금 전까지는 살아있었을 부대원. 뜨거웠던 피가 차갑게 식어가고 그저 고깃덩어리가 되어 흩어져있었다.
“으윽, 오, 셨소?”
피가 흐르는 복부를 부여잡으며 케빈이 힘겨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방패가 반으로 쪼개지고 검조차 부서져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케빈은 연신 포션을 들이키더니 조금 상처가 나아진 듯 나무에 등을 기대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그대가 오기 직전 오크전사들이 몸을 빼더군. 그래서 살았소.”
거기까지 말한 케빈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덧붙였다.
” 나만.”
분노, 공포, 절망, 좌절.
온갖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서 몰아쳤다.
잔뜩 솟아오른 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주르륵
“나마아아안!”
그 절망스러운 울부짖음을 가리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띠링! [퀘스트: 높아지는 긴장감(완료)] [당신은 자신의 용맹을 증명 .] 이 타이밍에 퀘스트 완료 표시가 뜬다고? 아이반은 마치 자신이 놀림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하던 것을 얻었으나 개운하기는커녕 속이 답답해서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메시지창의 글귀를 다 읽어보지도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하하! 흘흘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이세계. 빌어먹을 놈들.
아이반은 이곳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슥, 슥! 숫돌로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웠다. 기름칠을 해서 닦아내고 손잡이를 다시 고정시킨다. 슬쩍 세워서 날을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비를 꺼내 손질한다.
아이반은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들고 다니는 무기가 많았고, 때문에 전투를 한 번 벌이고 나면 손질해야 될 것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게임에서야 대충 쓰다가 부서지면 버리거나 내구력 떨어지면 대장간 가서 수리를 맡기면 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수는 없었다. 돈만 주면 ‘짜잔, 내구력이 회복되었습니다!’하면서 그 자리에서 쉽게 수리가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짓을 하면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장비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아내고, 무뎌진 날을 세우고, 기름칠을 해서 닦아내는 등 자잘한 일들은 본인이 해야만 했다.
그런 잡일까지 다 해주는 종자가 있는 고위기사도 아니었고.
“젠장, 해도 해도 끝이 없군.”
도끼와 검, 이참에 같이 손볼 화살과 단검, 가죽 갑옷까지.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그걸 혼자 다 하려니 솔직히 더럽게 귀찮았다. 슥, 슥! 아이반이 날을 세우는 소리만이 숙소에 울려 퍼졌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죽어버렸기에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걸 기뻐할 수는 없겠지만. 으드득! 그렇게 며칠쯤 더 장비손질을 마치고서야 마침내 허리를 펼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굽히고 있었더니 몸이 잔뜩 뻣뻣해졌다. 그때까지도 숙소는 채워지지 않았다. ‘ 먼저 찾아가봐야 하나?’ 배치되자 첫 임무에서 부대가 개박살이 났다.
임무에 참여했던 인원은 모두 죽고 생존자는 겨우 두 명. 임무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원도 있었으나 그들은 원래 부상자로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 그냥 부대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같이 복귀한 케빈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라 후방으로 후송되고 이곳에 아이반 홀로 남아있는 것이 며칠째. 아직 용병 계약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다니, 사령부가 그렇게 배려심이 넘치지는 않을 텐데.
이대로 날로 먹으면서 시간이나 보내고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반은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놀고 있는 것은 아이반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경험치가 간당간당한 것이 레벨업이 머지않았기도 했고.
“던전에서 레벨업을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경험치가 이만큼이나 채워진 거지?”
아이반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시점이 되니 퀘스트가 늘고 경험치 퍼주는 것이 후해졌다.
그동안은 씨부럴 별 짓을 해도 더럽게 안 오르더니.
그게 다 미끼에 목줄, 사료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반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빌어 처먹을 곳.
“아, 그래.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찾아왔군.”
아이반이 작전관에게 찾아가자 그가 크게 반기며 말했다. 처음 아이반이 도착했을 때는 그냥저냥 대하는 것 같더니 케빈의 증언으로 아이반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친절해진 모양새였다.
“싸울 준비가 되었소. 일거리를 주시오.”
“허, 그런 거친 전투를 벌이고 나면 좀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역시 노르드 전사로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
작전관이 그렇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반은 굳이 그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경험상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자네 실력이라면 자잘한 전투에 내보내기보다는 중요한 곳에 투입하는 것이 낫지. 이제 그때가 되었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불안한데.
아이반은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사령부에서는 숲을 포기하기로 했어. 나무정령이 그렇게나 많이 돌아다니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지. 노력을 해봤지만 결과가 참담해.”
아이반이 숲에서 복귀한 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그것에 대해 증언을 했었다. 주술사들이 토템을 숲에 뿌려서 꾸준히 주력을 나무에 먹이고 있었고, 그것으로 나무정령을 깨웠다고.
지난 며칠간 그 증언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확인을 해본 결과 사령부는 직접적으로 숲에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다.
“이쪽이 막혔으니 다른 쪽으로 뚫어봐야지. 지금 다른 쪽은 전투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어. 자네는 그곳에 투입이 될 거야.”
“미리 말하지만 나는 장기계약이 아니오. 계속 전장에 붙들려있을 생각이 없소.”
“알고 있네. 우리도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은 없어. 짧고 굵게 치고 끝내야지.”
그게 가능할까? 아이반은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시적인 상황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린스킨은 앞으로 더욱 덩치를 불려서 완벽히 인간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될 테니까.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으로 나뉜 진영싸움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이반이 보았던 이 세계의 미래였으니.
몇몇 소소한 변화는 있어도 대국적인 흐름마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한 작전내용은 그쪽에 가서 듣게. 나는 잘 모르니까.”
“알겠소.”
새로운 명령서를 받아든 아이반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등 뒤로 작전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숲에서 빠져나올 때 자네가 후방에 혼자 남았다지?”
“돌아서 덮쳤던 오크전사들은 못 막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한 손으로 열 손을 모두 막을 수는 없으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케빈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닌가?”
” 내가 늦어서 다른 이들이 모두 죽었지.”
“전장에서는 누구나 죽어. 자네는 죽인 것이 아니라 살렸네. 적어도 한 명의 목숨은.”
흐흐흐, 그렇게 웃음을 지은 작전관이 덧붙였다.
“고맙네.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생각해보니까 아무도 자네에게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돈 받은 만큼 일을 했을 뿐이오. 감사 인사는 돈으로 받았소.”
“흐, 글쎄? 듣기로는 받은 성과금을 유가족들에게 모두 나눠주라고 했다던데 .”
“부정 탄 돈이라 재수 없어서 안 받겠다고 했을 뿐이오.”
이래저래 목숨 값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아이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다그닥, 다그닥! 탈탈탈탈! 마차가 움직인다. 이것도 아주 고급 마차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전에 탔던 그 싸구려 개조 짐마차보다는 훨씬 엉덩이가 편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은 아이반 혼자뿐. 마부역할을 맡은 병사가 있었으나 승객은 그밖에 없었다. 아이반을 다른 전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령부에서 내어준 마차였다. 오직 그를태우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마차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무리 실력이 괜찮다고는 하지만 용병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예상 밖의 호사였다. 기쁘다기보다는 불안하기만 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느낌이었다.
“젠장, 자대배치를 받던 그때가 갑자기 떠오르네.”
눈을 감아봐. 앞이 보이나? 안보입니다! 그게 네 남은 군 생활이야! 빠른 년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빠른지 연병장이나 돌아봐! 어제 너 몇 끼나 먹었어? 세끼 먹었습니다! 뭐 이 새끼야? 선임에게 욕을 해? 아닙니다!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이야? 이게 뭐로 보여? 도토리 아닙니까? 아니, 이건 드래곤볼이다.
가서 사성구를 찾아와.
찾아라, 드래곤볼! 세상에서 제일 신비로운 비밀!
” 씨부럴. 김 상병 엿 같은 새끼.”
예상치 못하게 기억 폭력을 당한 아이반이 고개를 휘휘 내저어 잡념을 쫓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이틀을 달린 끝에 새로운 전장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왔더니 피로한 느낌도 별로 없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숙소로 안내되었는데, 이것 역시 일반적인 용병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훨씬 좋은 곳이라 영 떨떠름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불안한 마음을 기껏 진정시켜놓았더니 병사 하나가 찾아와 지휘실에서 그를 부른다며 알렸다. ‘어째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다 더 불편하군.’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지휘실에 도착한 아이반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영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드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