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0
우웅-
그가 비어 있는 손을 내밀어 검을 쥐는 듯 오므리자 은은한 빛을 뿌리는 검이 잡혔다. 그건 방금 부러진 그의 애검을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평생 검을 쥐고 살았기에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 형태와 무게대로, 그가 원하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검신 카락취. 이 세상에서 가장 검을 잘 쓴다고 세계가 인정한 자.
마침내 신격이 되어 버린 최강의 고블린은 새롭게 쥔 검으로 하늘을 베었다.
스걱!
막대한 에너지를 토해내고 그 반동으로 굳어있던 악신의 육신이 쩍 갈라졌다.
처음 나타났을 때 하늘을 가릴듯 이 거대한 육신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초라할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결국 악신을 여기까지 끌어내렸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녀석을 베고 또 베어서 이렇게 눈높이를 맞췄다.
“…신도 별거 없군.”
카락취의 검이 움직였다.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부드럽게 뻗어 악신을 꿰뚫었다. 날카롭게 정제된 마력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스스슥-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던 악신의 육신이 잘게 베어졌다. 마치 껍질이라도 깎듯이 바깥에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탁!
그때 지금까지 보았던 징그러운 촉수와 전혀 다른 매끈한 팔 하나가 나타나 카락취의 검을 막았다. 그 모습이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폭하게 이리저리 튀어나올 듯 부글거리던 막대한 마력이 차분해졌다. 방향성 없는 분노와 맹렬한 악의만 가득 몰아치던 것도 모두 사라졌다.
힘의 크기는 줄었으나 더욱 섬뜩했다. 카락취가 반원을 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팅!
무언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 카락취의 검에 튕겨 나갔다. 대부분의 전사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새하얀 자가 알을 깨고 나왔다. 악신의 잔해를 마치 오물처럼 털어 버리고 전장에 섰다.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칼과 하늘을 닮은 눈동자, 새하얀 날개를 지닌 자가 나타나자 델피노의 육신을 빌려 강림한 아룬이 긴 탄성을 내뱉었다.
“…그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구나.”
– 너희가 나를 저 오물 속에 처박은 후로는 볼 수가 없었을 테지.
이 새하얀 자야말로 지금껏 싸우던 악신의 본질이었다. 세상의 온갖 사악함에 물들기 전, 지독하게 비틀려서 광기만이 가득하기 전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
이계에 처박혀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역겨운 육신이 되었다가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품은 광기는 변함 없었다. 잠시 정말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 아닐까 했으나, 돌아온 것은 결국 외형뿐이었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찬란한 자였거늘.”
아룬이 낮게 중얼거리자 악신이 차 갑게 대꾸했다.
– 영원히 빛나는 별은 없는 법이다. 어둠이야말로 세상의 본질인 셈이지.
“그렇다면 홀로 고독한 어둠으로 돌아가라, 아발로크.”
아룬이 손을 펼치자 하늘이 갈라지 며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그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신격, 시대의 주인이었다. 비록 화신이라고는 하나 그를 모시는 대륙의 수많은 자가 바치는 신앙의 힘 덕분에 악신 아발로크를 억누를 수가 있었다.
쿵!
악신 아발로크의 등이 굽었다. 하늘에서 내리누르는 빛의 기둥을 못 이기고 무릎이 점점 내려갔다.
그러나 악신 아발로크는 끝내 고개 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태로 아룬을 비웃기까지 했다.
– 나를 다시 이계에 처넣으려면 멀리서 구경만 하지 말고 직접 내려 와라. 그 모습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대로 아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룬의 힘이 부족한 것 이 아니라 그가 강림한 델피노의 육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악신 아발로크를 처리할 기회였으나 모처럼 나타난 성자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캉!
묠니르로 악신 아발로크의 머리를 후려친 아이반이 소리쳤다.
“그만 하면 충분하니 올라가시오.”
“아발로크를 놓칠 수는 없다.”
“내 망치가 녀석을 으깨 놓을 거요.”
치지직!
쾅!
하늘에서 두꺼운 번개가 마치 채찍질을 하듯 악신 아발로크를 때렸다. 악신 아발로크가 무릎이 꺾인 상태로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룬이 아이반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의 앞을 비출 것이다.”
“내 앞길은 알아서 잘 보고 다니겠소.”
“그대에게는 그게 어울리기는 하지.”
피식 웃으면 감정을 보인 아룬이 델피노의 육신에서 빠져나갔다. 막대한 신력이 사라지자 델피노의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비틀비틀 쓰러질 것 같았으나 신성의 증명을 붙잡고 당당히 섰다. 신께서 지켜보시는데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수고하셨소. 뒤는 맡기시오.”
“…부탁드립니다.”
사나운 이빨이 얼른 다가와 델피노를 붙잡고 후방으로 빠졌다. 그사이 카락취가 악신 아발로크의 날개 하나를 조각내고 있었다.
– 으윽……!
자신을 억누르던 빛의 기둥이 사라지자마자 악신 아발로크가 카락취를 후려쳤다. 바닥에서 솟아난 쇠사슬이 카락취의 손발을 묶어서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도 카락취는 악신 아발로크를 바라보았다. 손 하나 움직일 수 없어도 마음의 검은 악신 아발로크를 베었다.
푸슉!
악신 아발로크의 가슴이 길게 찢어졌다. 카락취는 뒤로 한참이나 밀려나 바닥에 피를 토했다.
빠르게 상처를 회복한 악신 아발로크가 하늘에 날카로운 가시들을 만들어 카락취를 노렸다. 빼곡한 가시가 카락취의 육신을 꿰뚫으려 했다.
휘리릭!
그것을 막아서며 무언가 악신 아발로크를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마력의 흐름이 끊어져 하늘에 나타난 가시들이 사라졌다.
악신 아발로크가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이반이 축 늘어진 오른팔을 덜렁거리며 웃었다.
“괴물을 붙잡을 때는 역시 글레이프니르지.”
– 겨우 그걸로 나를 묶을 수는 없다.
글레이프니르에 묶여 힘의 흐름이 순탄치 못해도 신격을 완벽히 봉인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아이반마저 마력을 쓰지 못하고 육신의 힘만 남게 되니 악신 아발로크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탕!
그러나 아이반은 아발로크가 쏘아 보낸 가시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걸 꺾어 버리며 소리쳤다.
“글레이프니르가 끊어졌다! 뿔피리 를 울려라!”
뿌우, 뿌우우- 어디선가 길고 긴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이 열리고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가 나타나 지상에 닿았다.
발할라가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최고의 전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처음에는 아홉, 그다음은 아흔아홉, 또다시 천에 하나가 부족한 수가 되었다.
오딘의 가호를 받아 결코 죽지 않으며, 토르의 축복을 받아 천둥을 몸에 두르고, 헤임달의 권능을 받아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으며, 티르의 선언 아래 가장 명예로운 자들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온갖 신들이 힘을 내렸고,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스스로 갈고 닦은 전사 중의 전사였다.
뿔피리 소리와 함께 에인헤랴르가 나타났다. 또다시 멸망을 막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신들의 이름으로!
우리의 대장, 아이반을 받들라!
멸망을 막기 위해 오딘이 심혈을 기울여 모집한 전사들, 에인헤랴르가 비프로스트를 넘어 지상에 내려 왔다.
비록 한 번은 실패했으나, 옛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나타났다. 아직 멸망하지 않은 세계를 위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다.
치지직!
쾅!
에인해랴르 중에서 특히 토르를 따르는 전사들이 번개를 뿌렸다. 천둥이 울려 퍼지고 하늘이 떨렸다.
티르를 따르는 전사들은 가장 앞에서 악신의 권속을 밀어냈고, 헤임달을 따르는 전사들이 사악한 결계와 저주를 뚫고 길을 열었다.
뒤에서 화살을 쏘아 보내는 자들은 활의 신 우르를 믿는 자들이었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자들은 이둔의 전사들이었다.
– 혹독한 겨울의 무서움을 보아라!
뼈가 시린 냉기가 퍼지고 땅이 얼어붙었다. 이미 여름이 가까운데 때 아닌 폭설이 쏟아졌다.
본디 거인이었으나 아스가르드에 합류한 겨울의 여신, 스카디의 권능이었다.
아스가르드가 본격적으로 이 땅에 자리 잡기를 결심하고 그동안 아껴 두었던 신력을 마구 뿜어내니 에인헤랴르의 전투력이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반은 실상 천에 달하는 에인헤랴르를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호하는 아스가르드의 신격마저 불러낸 것이다.
라그나로크 이후 이 땅으로 우연히 넘어오게 된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아이반을 닻으로 삼아 그 힘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챔피언, 아이반 에시르손.
신들의 아들이라는 그의 성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 증명하고 있었다. 아이반이 그것을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땅에서 눈을 뜬 이후 그는 항상 아스가르드와 이 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