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2
속으로 그리 비웃은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악신들을 마주했다.
“기다리지 마시오. 이제 내가 찾아 갈테니.”
악신 아발로크가 사라지며 그의 힘을 사용하던 마녀들이 크게 약해졌다. 악신의 권속들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잔당들을 처리하고 나서야 아이반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까지 강한 척을 하며 버텨보려 했지만, 온몸의 피가 다 뽑혀나가는 것 같은 탈력감에 무릎이 절로 굽혀 졌다.
남아 있던 에인헤랴르가 아이반을 바라보며 껄껄 웃다가 인사하고는 발할라로 돌아갔다. 그들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아이반의 기력이 바닥나서 건어물처럼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스가르드의 신력을 한껏 뽑아 썼더니 영적 용량이 과부하 되어 정신이 간당간당했다. 그동안 쌓아온 업과 격으로 반신이나 다름없는 영적 용량을 가지고 있는 아이반이 한계를 말할 정도니 다른 이들이야 오죽 하겠나.
지금도 혹시 모를 악신들의 개입을 막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테잔과 메신의 얼굴은 핼쑥했고, 델피노는 아룬이 강신한 후유증으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 역시 무척이나 지친 모습이었고, 심지어 온전히 신격이 된 카락취 역시 초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의 동맹 최정예 전사들이 죽고 다쳤다. 원래 소수로 출발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서 있는 자가 한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악신 하나 처리할 때마다 이런 식이면 오래 못 버티겠군.’
퉤!
시뻘건 핏물을 뱉어내고 나니 답답하던 가슴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눈이 감기고 정신이 아득하지만 아이반은 어두운 용의 발톱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에 신격을 둘이나 썰었군. 기분이 어떠시오?”
아이반이 묻자 카락취가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지상의 존재만 바라보던 카락취의 호승심이 초월자를 향하니 새롭게 불타오르는 모양이다.
하긴, 신격을 둘이나 베고도 부족하다 여기니 검신이 된 것이겠지.
“우리는 승리했다!”
살아남은 전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격렬한 전투 끝에 피의 동맹에서 고르고 고른 최정예 전사들이 죽고 다쳤으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신화적인 싸움 끝에 신격을 둘이나 물리쳤으니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죽고 다친 자들은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상을 위해 싸웠고, 오래된 악을 쓰러뜨렸다. 최고의 전장에서 숨을 거뒀으니 전사로서 아쉽지는 않을 거다.
휘이잉-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알 수 없겠지만 죽은 자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다들 자신이 모시는 신격이 보낸 사자를 따라 각자의 천국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 싸움이 정녕 신들이 감격할 정도로 훌륭한 싸움이었던 모양이군.’
물론 차원 방벽이 무너지고 신계가 가까워진 영향도 있겠지. 본디 지상에 있을 수 없는 신격이 천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버티고 있을 정도니 천상의 사자들이 내려오기도 쉬우리라.
그 와중에 발키리도 몇 나타나 혹시 영원한 전장에 관심이 없느냐며 영업을 뛰었지만, 결과가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세상은 신이 실존하는 곳이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체로 신앙이 튼실했다. 죽고 나서 갑자기 찾아온 낯선 신격의 사자에게 홀라당 넘어갈 자는 많지 않았다.
예전에 대악마들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성과가 별로였던 모양이니 발키리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아이반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돌아가서 고기나 실컷 뜯읍시다. 오늘은 반찬 투정을 해도 이해하겠지.”
일행이 복귀하자 난리가 났다. 어딜 가나 무력으로는 밀리지 않는 강대한 전사들이 줄초상을 치렀다는 것에서 한 번, 그들이 기어이 신을 죽이고 돌아왔다는 것에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살아남은 자들은 죄다 메신의 영역으로 가서 상처를 회복했는데, 그 조용한 곳에서도 시끄럽게 소식이 전달될 만큼 세상이 떠들썩했다.
처음 며칠간은 그 위대한 승리를 기리는 축제가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 골골거리는 자들이 고기를 뜯고 술을 퍼붓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었지만, 또 그런 식인데도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술과 고기가 체력 회복 효과라도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아이반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 고기를 먹으면 피가 차오르고 포션을 들이켜면 즉시 활력이 솟아 나는 곳. 아이반이 가끔 잊고 있었을 뿐이다.
때때로 개입하던 시스템 역시 오래도록 침묵하고 있었다. 그게 따로 지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이반이 이 세계에 동화되었다는 뜻인 것 같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나저나 며칠 지났는데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는군. 또 무슨 일이 있소?”
다른 이들이 회복에 전념하고 있을 때 바깥을 오가며 바쁘게 돌아다닌 테잔이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악마에 이어서 악신이 나타났다가 퇴치되었으니 조용할 수가 없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시끄러운 것은 차원 장벽이 완전히 무너졌음이 알려져서야.”
이 세상을 보호하던 차원 장벽이 사라지니 대륙 곳곳에서 온갖 이상 현상이 다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예전 던전 대량 발생 정도는 전조현상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세상이 바뀐 것이다.
오래전에 사라진 옛 마물이 나타나 날뛰거나, 봉인된 신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미 서쪽에서는 깊은 바다의 폭군이 모습을 드러냈고, 남쪽에서는 새롭게 마계의 게이트가 발견 되는등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다행이라면 그 덕분에 전쟁은 소강상태야. 동맹도 연합도 서로 싸울 여유가 없으니.”
대악마의 습격으로 이미 크게 힘을 잃은 신뢰의 연합은 물론이고, 전선에서 강자들을 대거 빼내고도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존재감으로 연합을 압박하던 피의 동맹도 이번 사태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각자 닥친 사건이 너무 크니 따로 휴전 협약을 맺지 않았음에도 전쟁이 흐지부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차원 장벽이 무너진 영향이 너무 컸다. 온갖 초월자는 물론이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마저 슬그머니 끼어들 정도였으니.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아스가르드의 신들 역시 이계의 신격이 아닌가. 아스가르드가 본격 적으로 이 땅에 자리 잡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결국은 차원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성황청에서 다른 악신을 따르는 마녀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차원 너머에 악신을 유폐하던 결계가 무너졌으니 언제고 그들을 이 땅에 불러오기 위해 수작을 부리겠죠. 안타까운 말이지만, 미리 막기는 어려울 겁니다.”
메신의 도움을 받아 성황청과 연락을 주고받은 델피노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하나 조용한 곳이 없으니 신화시대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이 틀림없었다.
물론 차원 장벽이 무너진 만큼 천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격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가 있으니 마냥 전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벌써 성황청에 아홉 신격이 보낸 천사들이 자리 잡았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이 땅의 생명이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신화시대처럼 초월자들이 치고받는 싸움을 한다면 평범한 자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래서 신화시대가 다시 돌아오는 걸 그토록 경계했던 것이지만…….”
테잔이 아쉬운 소리를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건 시대의 흐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와 시기의 차이일 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족이 긴 수면을 끝내고 깨어났다.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혼돈의 무리가 마음대로 날뛸 수는 없 을 것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자가 끼어들자 일행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혀들었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던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함께하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맨발, 낡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았으나 사브리나를 천 년이나 봉인하고 있던 대주술사의 육신과 똑같았다. 특별한 감정은 없고 단순히 이 모습이 익숙해서라고 했다.
“마침내 어둠이 다가왔으니 우리는 이 땅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해야 할 역할을 다할 것이다.”
사브리나의 말에 따르면 이 땅에 남은 드래곤은 모두 열넷이라고 했다. 신화시대와 비교하자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숫자지만, 그 모두가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의 권한을 공유하고 있으니 신격이라 한들 가볍게 볼 수가 없었다.
드래곤 몇이 용언으로 선언한 것만으로 악신 아발로크가 아주 잠시나마 지닌 신격을 박탈당하지 않았던가.
비록 초월자의 초월성을 훼손할 수는 없었으나, 짧은 시간 뒤흔들고 약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나는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깨어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많은 권한을 동족에게 나누었다. 부디 나를 보고 드래곤의 힘을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노라.”
대주술사에게 천 년이나 봉인당한 것은 반쯤 자신의 의지가 있었던 바였지만, 위신 사샨트에게 육신을 빼앗길 위험을 겪고, 또 악신에게 농락당하기까지 하니 그 당당한 드래곤의 말투가 영 힘이 부족했다.
‘드래곤을 무시할 자들은 아무도 없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차마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게 오히려 오만한 드래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이 될 터였다.
끼이잉-
브리카가 모처럼 작은 용의 형상으로 사브리나의 발치에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본디 다른 이들을 하찮게 여기는 드래곤이지만 영혼의 일부가 흘러든 브리카는 특별한 모양인지 사브리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턱을 긁어 주었다.
“드래곤이 움직인다고는 했지만, 그들은 우리가 강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니 어찌할 방법이 없군. 우리는 다른 쪽에서 움직여야만 하오.”
드래곤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였다. 태초부터 이어진 의무를 제외하고는 그들을 얽매는 그 어떤 제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홀로 태어나 홀로 완성된 자들이었다. 동족의식조차 극도로 희미하니 실상 사브리나조차 그들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이반은 사나운 이빨을 바라 보았다.
“따로 전해진 말은 없소?”
“뱀신께서는 말이 없으시다.”
뱀신 모르나가 육신을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신화시대의 부활을 알렸다. 그러니 뱀신 모르나가 어떤 신탁을 내렸을 법도 한데 조용한 것이 영 수상했다.
아군은 아군이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아군이 뱀신 모르나였다. 워낙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우선으로 여기기에 변덕스러워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또 한번 찾아가야 하나?’
아이반이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메신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몇 번이나 봤지만, 분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여기 모여서 또 작당 모의나 하고 있었군.”
자신의 영역을 꽉 채우고 있는 부상자들을 치료한다고 홀로 바쁜 메신이 괜히 못마땅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먹을 것을 하나씩 챙겨 주는 게 마치 김첨지를 보는 듯해서 어딘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행은 다행히 설렁탕을 받아먹을 수가 있었다.
평소라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타박했을 메신이 멀뚱히 보고만 있으니 뭔가 이상한지 테잔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르신?”
“거, 무슨 일은 아니고. 누가 자네들을 보고 싶다고 찾아와서 말이야.”
내 짬에 전령 노릇이나 해야 하느냐고 투덜거리던 메신이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카르타크가 직접 찾아왔어.”
오크로드 카르타크.
천만 오크의 군주, 피의 동맹의 지도자, 오크투신 타르칸의 대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