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3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이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는 소식에 이레인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이반 역시 놀라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맹의 영역에 있으면서 주인의 얼굴 한번 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인사를 해야겠군.”
그러면서 아이반은 저 멀리 시선을 날렸다. 강대한 존재감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화의 화신 메신의 영역이 움찔 떨릴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었다. 이 지역에서만큼은 신격이나 다름없는 그의 힘이 잠깐이나마 흔들릴 정도의 존재라는 것이다.
온몸에 힘을 주지 않아도 꿈틀거리는 근육, 떡 벌어진 어깨와 굵직한 허벅지.
힘을 육체로 형상화한 듯한 오크가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그대가 아이반이군.” 아들 하나를 죽이고, 하나를 폐인으로 만들고, 하나를 영웅으로 만든 아이반을 바라보면서 카르타크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아이반이 그 손을 바라보다가 마주 잡았다.
“나도 그렇소.”
오크는 약한 자를 따르지 않는다. 현명한 자를 존중할 수는 있으나, 결국 그들을 이끄는 것은 강인한 힘 이었다.
카르타크가 천만 오크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강한 오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은 그와 마주하면서 그 강함을 선명하게 느꼈다. 카르타크의 기운은 무척이나 패도적인 것이어서 숨길 수가 없었다.
지상에 강림한 오크투신 타르칸의 화신이라는 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아이반은 타르칸을 직접 마주 한 적이 없지만, 만약 그가 육신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강한 전사라는 말은 익히 들었으나 놀라운 수준이군. 한 번쯤 무기를 마주하고 싶을 정도야.”
아이반이 그에게 감탄한 만큼 오크 로드 카르타크도 아이반을 보며 감탄한 모양이다. 투쟁심이 치밀어 오른 듯 기운이 거칠어졌다.
카르타크 역시 필멸자의 끝자락에 닿아 반쯤 그것을 넘으려 하는 존재이기에 순간적으로 주변 환경이 요동쳤다. 그것을 본 아이반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힘을 끌어올리려고 하자 메신이 끼어들어 진정시켰다.
쿵!
“내 집에서 웬 행패야? 그 지랄 할 거면 오지를 말아야지!”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메신이 소리치자 카르타크가 거칠어진 기운을 진정시켰다.
비록 천만 오크의 군주이자 피의 동맹을 이끄는 맹주라고 해도 대주술사 메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르타크가 지금의 위치가 되기 전부터 신세를 졌던 자이기에 더욱 그러 했다.
“나이가 들면 진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혈기가 끓는구먼.”
메신이 그리 말하자 카르타크가 피식 웃었다.
“혈기 없는 전사가 어찌 전사라 할 수 있겠소? 노련함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지.”
피에 취하고 전투에 흥분하는 것이 오크투신 타르칸의 법칙이었다. 강자를 만나고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면 강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어쨌든 투쟁심을 가라앉힌 카르타크가 차분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지금껏 세상의 어둠과 치열하게 싸웠다고 들었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겠지.”
대악마가 나타나고 악신이 날뛰는 상황에 피의 동맹이 손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앞으로 주된 적은 신뢰의 연합이 아니라 다가올 어둠임을 깨달은 것이다.
신뢰의 연합과의 전쟁이 대륙의 패권과 오랜 은원이 엮인 싸움이라면 대악마나 악신, 이계의 습격자와 오래된 신들은 세계의 존망이 달린 싸움이었다.
수만의 인간을 쓰러뜨리고 수십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그 하나가 더욱 위험한 적이었다. 지금껏 전쟁을 이끌고 있던 오크로드 카르타크도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어둠과 싸워온 일행이 동맹의 영역에 있으니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일행을 부르지 않고 직접 움직인 것은 위대한 전사들에 대한 예우였다. 신과 싸워 신을 쓰러뜨린 전사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다른 원로는 물론이고 테잔과도 이야기를 나눴으나, 나는 그대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다.”
“어떤 말을 원하시오? 대악마가 전설보다 더욱 위험하고, 악신이 상상 보다 더욱 끔찍하다는 말?”
아이반은 지금껏 경험한 모든 끔찍한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악마 추종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대악마를 불러오고 어떤 지옥을 만들었는지, 마녀가 무엇을 했고, 악신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
“하나는 괜찮소. 둘도 이겨냈지. 그러나 아직 남은 적이 한가득하오. 파멸은 어둠의 틈에서 노려보고 있고, 악신들은 오랜 감옥에서 풀려났소. 신화시대 대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소.”
그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오크로드 카르타크는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장에서 최초로 누군가의 목을 베었을 때, 나는 위대한 아버지를 만났다. 타르칸께서는 나에게 축복을 내리고, 가장 위대한 오크가 되리라 예언하셨다.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덜덜 떨던 한심한 녀석이 용맹함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은 순간 이었지.”
갑작스럽게 옛이야기를 내뱉은 오크로드 카르타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를 떠올리던 아득한 눈을 선명하게 바꾸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타르칸께서 예비한 전장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이것이었군. 그래, 인간들과 아웅다웅 싸우는 정도로는 영 개운치 않았지.”
아이반은 최대한 적이 위험하게 느껴지도록 설명했으나, 카르타크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세계의 끝을 논할 전쟁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우리가 진심으로 싸울 전투라면 그런 가치는 있어야지.”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면 지금이 나았다. 먼 미래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정하는 편이 좋았다.
다른 오크 전사들처럼 오크로드 카르타크 역시 주체적인 자였다. 주어진 것보다 쟁취하는 것을 원했다.
그 와중에 생길 피해를 모르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절망적이고 슬픈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슬픔조차 투쟁심으로 바꾸는 것이 오크의 방식이었다.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절망스러운 패배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를 향해 달리는 것이 오크의 문화였다.
“세계의 미래를 내 손으로 정한다니, 그 얼마나 영광인가! 참으로 영광스러운 시대에 태어났구나!”
호기 가득한 오크로드 타르칸이 외침에 주변에 있던 전사들이 모두 동조하여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에는 거인 신을 보았고, 악신 아발로크를 마주했던 자들도 있었 다.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느꼈음에도 승리를 소리쳐 불렀다. 초월자 앞에서도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의 전쟁을 멈추고,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한다.”
오크로드 카르타크가 신뢰의 연합과의 휴전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더 큰 전쟁을 대비하기로 했다.
화끈한 매운맛을 경험하고 나면 다른 것들이 밍밍해지는 것처럼 신뢰의 연합과의 전투는 이제 그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 못했다.
대악마, 악신, 오래된 신격과 이계의 침략자.
하나만으로도 가슴 뛰는 새로운 적과 싸우기 위해 전력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인간들에게 우리의 뜻을 전할 사자를 보내겠다. 그대들이 도와줄 수는 없겠는가?”
휴전 중재를 맡아 달라.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그런 것들을 무척이나 번거롭게 생각하는 아이반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 양쪽을 조율할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눈빛으로 뜻을 주고받은 아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자리를 만들어 보겠소.”
로만 왕국. 동부 지역 대부분이 피의 동맹에 점령당해 훌쩍 물러난 접경 지역에서 동쪽을 노려보던 병사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자들을 보고 세차게 종을 울렸다.
땡땡땡!
최근 들어 다른 쪽이 시끄러워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전선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비상에 긴장감이 치솟았다.
타다다닥!
뒤에 물러나 밥을 먹고 있던 병사 들이 음식을 내팽개치고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벌써 저기까지 왔다고? 수색조는 저것도 발견 못하고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마법사는 멀리 있는 풍경을 확대해서 벽 한쪽에 비추었다. 그러자 떠들어대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공격이라 하기에는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리자드맨? 인간도 있는데?”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들 고민에 빠진 가운데 화면 너머의 인간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이 확대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입 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 문을 열어라, 협상하러 왔다.
펄럭!
깨끗한 흰 천으로 만든 백기가 흔들렸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동맹에서 협상하러 왔다는 소 식이 빠르게 퍼졌다.
“인간의 음식도 제법 괜찮군.”
로만 왕국이 급히 만들어 준 임시 숙소에 털썩 앉은 무스파가 닭다리를 뜯으며 우물거렸다.
악신 아발로크를 토벌하며 큰 상처를 입었지만 메신의 권능 덕분에 멀쩡히 회복한 그는 이번 협상의 대표를 맡았다.
무스파는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첫 째 아들이자 공공연히 후계자로 불렸으니 동맹의 뜻을 전하는 사신단의 대표로 격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거, 식사들 좀 하시지. 나만 먹 나?”
비록 피의 동맹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하지만 그래도 사신으로 온 자를 홀대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갇혀 있어서 감옥이나 다름없지만, 숙소는 꽤 고급이었고, 음식도 제법이었다.
다만 아이반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도 음식을 손대지는 않았다. 겉이 멀쩡하다고 정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 찝찝하군. 동맹에 대한 적의를 생각하면 침이라도 뱉었을지 모르지.”
아이반이 손을 내저으니 무스파가 껄껄 웃었다.
“침 좀 바른다고 못 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독만 없으면 충분하지.”
그 자리에서 닭을 후딱 해치우고 닭 뼈로 이를 쑤시던 무스파가 표정 을 가다듬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