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4
“그래서, 인간들의 반응은?”
공식적으로 아이반과 이레인,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은 중재역이었고 무스파와 테잔, 그 외 몇몇 자들은 피의 동맹을 대표하는 사신단이었다.
행동이 크게 제약된 사신단과 달리 아이반과 델피노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협상 테이블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신뢰의 연합에서는 아직 조심스러운지 동맹의 사신단과 직접 마주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자잘한 상대와 만날 필요는 없지. 결정권을 가진 자들과 마주해야 하오. 그들이 오려면 시간이 필요해.”
피의 동맹과 비교하면 신뢰의 연합은 무척이나 느슨한 구조였다. 지휘권도 통일되지 않아 중구난방이니 제대로 된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정치적인 고려는 물론이고 거리의 문제도 있어서 서두른다고 해도 며 칠 만에 대충 처리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창을 휘두르는 것이 낫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입 터는 것은 못하겠소. 영 적성에 맞지 않는군.”
그래도 그동안 아이반이 쌓은 명성이나 성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자인 델피노의 말이 가벼운 것은 아니어서 진행이 아주 더디지도 않았다.
사실 신뢰의 연합이 밀리는 처지니 피의 동맹에서 협상하자고 하면 울며 겨자 먹기라도 나와야만 했다. 그나마 아이반이 중간에 끼어있으니까 아주 굴욕적인 결과는 피할 수 있겠지만.
“그나저나 장소가 문제인데, 어쩌시겠소? 동맹의 영역으로 하자고 하면 결국 연합도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반발이 많을 텐데.”
장소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 자체로 강약을 보여 줄 수도 있을뿐더러 정치적으로 미묘한 갈등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당장 사신단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마리난 제국 쪽이 아니라 로만 왕국 쪽으로 온 것도 괜히 둘로 쪼개진 마리난 제국의 정통성 문제를 건드리면 귀찮아지니까 그런 거였다.
피의 동맹이 누구를 중심으로 협상 하느냐에 따라 마리난 제국 내부 정세가 요동칠 텐데, 그러면 괜히 상황이 복잡해져서 일만 늦어질 터였다.
최대한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자 하는 카르타크와 동맹의 생각과는 달라지는 셈이다.
“우리가 인간의 영역으로 가도 상관없다. 자잘한 절차 따위는 관심이 없으니.”
“시원하군. 부디 연합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이반이 딱히 동맹에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연합이 빠르게 휴전협상을 마무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진 힘 전체로 놓고 보자면 연합이 동맹보다 강하면 강했지 부족할 것도 없었지만, 힘의 집중도가 전혀 달랐다. 계속 싸워 봐야 이길 것 같지도 않았고, 또 악마나 악신이 날뛸 걸 생각하면 그럴 여유도 없었다.
“결국은 연합도 휴전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과연 과정이 순탄할지 모르겠군.”
그리고 아이반의 그 걱정은 얼마 뒤 현실이 되었다.
탁!
“우리는 결코 저 잔혹한 놈들과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소!”
협상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못마땅 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저들에게 당한 것이 무엇인데 이리 넘어갈 수가 있단 말이 오? 나와 내 병사들은 마지막 하나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결의했으니, 그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 이오!”
누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헛기침하며 그를 말렸다.
“험험,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고…….”
“이야기를 들을 것은 무엇이오! 어차피 싸울 터인데! 우리 모두 그리 하기로 하지 않았소? 설마 다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거요?”
남자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잘 못했다가는 칼부림이라도 벌일 기세 였다.
“라스 백작, 자중하시오.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지 않소?”
서부 연합 왕국을 대표해 나온 후작이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자 라스 백작은 거친 콧김을 내뱉더니 고개를 돌렸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참는다는 뜻이다.
신뢰의 연합에서 나온 자들이 서로 떠들어대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무스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이야기를 해도 좋은 건가? 보는 맛이 있기는 했다만.”
광대놀음이라도 보았다는 식의 말에 연합의 사람들이 표정을 굳혔다. 무스파가 완전히 우위에서 내리깔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합을 대표해서 나온 자들 이라면 나름 노련한 구석이 있어서 대놓고 불쾌하다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게 인간들의 외교 예법이었다. 대신 즐겨 쓰는 외교적 어법으로 반격했다.
“이해하시오. 알다시피 우리는 연합 구성원의 생각을 존중하는지라. 아, 동맹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우리의 불찰을 용서하시오.”
어차피 너희는 야만적인 놈들이라 의견이 다르면 줘패서 같게 만들 테니 존중과 배려는 모르지 않느냐고 돌려 말했지만 무스파는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그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우리의 제안은 하나다. 더 큰 싸움을 위해 작은 싸움을 멈추자. 피차 신경 쓸 곳도 많은데.”
“조건은?”
“현재 경계선에서 각자 같은 거리 만큼 물러날 것.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 적대적 군사 행동을 멈출 것. 대륙의 미래를 위해 건설적인 방향으로 협력할 것.”
그 말에 연합의 외교관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동맹에 너무 유리하오. 지금 점유한 영토를 온전히 삼키겠다는 뜻이잖소?”
“우리가 싸워서 얻은 땅을 내줄 이유가 있나? 더 요구하지 않은 것만 해도 참으로 관대한 제안이거늘.”
“연합은 패배한 것이 아니오. 그런 식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소.”
“그렇단 말이지? 더 싸웠을 때 지금보다 상황이 좋으리라 여기는 건가?”
“그쪽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힘을 보았다 생각하는 거요?”
서로 기 싸움이 대단했다. 피의 동맹에서 대표로 보낸 자들은 모두 대단한 전사라 압박감이 장난 아닐 텐데도 연합의 외교관들은 그들을 똑 바로 바라보며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연합에서 고르고 고른 최고의 인재들이 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할 말은 할 수 있는 대찬 자들이다.
명목상 중재역을 맡아 중간에 앉아 있던 아이반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외교관들은 멀쩡한데 오히려 기사들이 불편한 모습이군.’
힘이 없는 외교관은 흔들림이 없는 데 기사들은 극도로 날카로운 태도였다.
어쩌면 상대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느낄 수 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전선에서 직접 무기를 맞대고 싸우는 자들과 후방에서 보고를 듣는 자들의 차이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협상 첫날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열두 시간이나 이어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피의 동맹이 내민 조건이 제법 가혹하기도 할뿐더러 신뢰의 연합 내부에서도 제대로 의견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움직이는 피의 동맹과 여러 나라와 세력이 느슨하게 힘을 합치고 있는 신뢰의 연합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연합이 동맹만큼이나 빠르게 결론을 내리길 바라는 건 너무한 일이다.
“중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군요.”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황청의 성자라는 신분으로 양쪽을 조율하던 델피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대하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못한 아이반 때문에 델피노가 중간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더 힘들었으리라.
협상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말은 하나하나가 모두 날카로운 검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정해지는 문구 하나에 수천, 수만의 목숨과 땅덩어리가 오가기 때문이다. 그걸 조율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오. 영 적성에 맞지 않아. 차라리 직접 창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편하지, 말로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아이반이 협상장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는데 누군가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협상장에서 끝까지 휴전을 반대한 라스 백작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 쉬시지 않고 이리 나와 계시오?”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라스 백작이 몹시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지금도 내 귀에 영지민들의 비명 이 울려 퍼지는데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소?”
그는 피의 동맹에 영지를 잃어버린 영주를 대표해 협상장에 참여한 자였다. 당장 라스 백작만 하더라도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영지가 불타고 소수의 병사만 데리고 항전을 계속하던 중이라 했다.
“그대와 성자께서는 휴전을 원하시니 내가 답답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결코 저들과 평화를 논의할 수 없소. 내 평화를 부순 것이 대체 누구인데 감히 그런단 말이오?”
“이해합니다. 하나 현재 상황이 좋지 못하잖습니까? 대륙 곳곳에서 불길한 사건이 벌어지니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델피노가 애써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내뱉었으나 라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대륙의 미래? 세계 평화? 그런 건 이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소. 우리의 미래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의 평화도 불탔으니 평온함이란 영원히 우리의 것이 아니오.”
신뢰의 연합 전체로 보면 당장 휴전을 맺는 것이 이득이라 해도 라스 백작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대의를 들이밀어도 그에게는 헛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세계 멸망을 걱정하기 전에 이미 그의 가문이 무너졌고, 영지가 무너졌으며, 백성과 병사가 쓰러졌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 멸망의 위기는 악마나 악신, 오래된 신격과 같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있는 그린스킨이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들과 부하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영지민에게 복수를 약속한 그는 결코 물러설 수 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상황이 변했으니 포기하 자고, 복수가 아니라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고 외칠 자신이 없 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서 복수를 멈춰서는 안된다.
“미련하다 여겨도 좋소. 그러나 내게는 대륙의 미래보다 불타 버린 영지가 더 소중하고, 세계의 평화보다 죽어 버린 영지민이 중요하오.”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그런 감성적으로 그 선택이 틀렸다 말할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의 선택이 세상의 평화를 위협할지라도 싸울 수밖에 없다는 라스 백작의 말을 아이반과 델피노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리 떠들어 봐야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오. 복수를 돕겠다며 분개해서 나서던 자들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하긴, 이미 불타 버린 남의 집보다 자기 집을 지키는 게 중요하겠지.”
약간의 경멸을 담아 그리 중얼거리던 라스 백작이 아이반과 델피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눈과 귀가 있으니 결국 어떤 결론이 날지 모르지 않소. 그러나 그 결론이 우리를 강제할 수는 없을 거요.”
그 후로 며칠간 협상이 이어졌다. 그사이 라스 백작은 눈을 감고 듣고만 있었다. 더는 싸움을 부르짖지도, 휴전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이미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몇 가지 수정된 조건으로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이 공식적으로 휴전을 결의하는 순간, 라스 백작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이 순간부터 연합을 탈퇴하겠소. 이는 나만의 의견이 아니라 고향을 잃은 스물여섯 개 영지민과 병사, 영주의 뜻임을 알아두시오.”
로만 왕국에서 마리난 제국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사라진 스물여섯 개의 영지 이름을 하나하나 읊은 라스 백작은 신뢰의 연합과 별개의 새로운 세력으로 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했다.
“아니, 라스 백작!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연합의 사람들이 크게 당황하며 그를 말렸으나, 라스 백작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사실 투쟁 세력의 마음이 확고하니 지금에 와서 라스 백작 한 사람을 설득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