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5
협상 대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맡겨 놓고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던 무스 파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사가 싸움을 결의했으면 그런 배짱이 있어야지. 우리는 그대의 싸움이 정당한 복수임을 인정한다. 얼마든지 덤벼라. 동맹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도전을 거부하지 않는다.”
씨익 웃는 무스파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싸움이라면 피할 자가 아니었다.
라스 백작은 무스파의 얼굴을 노려 보며 말했다.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우리의 칼날이 너희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그거 재미있겠구나. 얼마든지 기다리겠다.”
“너희의 가죽으로 깔개를 만들고, 너희의 핏물로 쓰러진 자들의 넋을 위로하겠다.”
“가능하다면, 그리하라!”
“너희의 마지막 하나가 쓰러지는 날까지, 우리의 복수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 나의 목은 가져갈 수 있겠나?”
무스파가 보란 듯이 목을 들이밀자 라스 백작이 빠르게 달려가 품에서 흉기를 꺼냈다. 그가 마력을 불어넣으니 손바닥만 한 작대기에서 칼날이 솟구쳐 무스파를 노렸다.
쉬이익!
순식간에 품을 파고든 라스 백작이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둘렀으나 무스파가 한 손을 뻗어 날을 붙잡았다.
라스 백작도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무인이었으나 같은 나이의 오크 로드 카르타크보다 낫다는 평가를 듣는 무스파와 비교하면 부족하기만 했다.
거인 신과 악신을 마주하고 한층 강해진 무스파는 손바닥이 약간 찢어지는 것만으로 라스 백작의 공격을 막아내고 카운터를 날렸다.
큼지막한 근육이 꿈틀거리며 오른쪽 주먹이 날아갔다. 주먹질에 마력이 듬뿍 담겨 있어서 사람의 머리통을 우습게 터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날이 붙잡힌 라스 백작은 재빨리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났으나 무스파의 주먹이 너무나 빨랐다. 휘두르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쾅!
충격파가 퍼지고 준비한 집기들이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라스 백작은 멀쩡한 상태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중간에 끼어든 아이반이 무스파의 주먹을 막았기 때문이다.
“내가 중재를 맡은 회담장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소.”
아이반이 차분한 눈빛으로 무스파를 바라보자 무스파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내가 그대의 명예를 더럽힐 뻔했군.”
무스파가 쥐고 있던 검을 휘릭 던져 주자 라스 백작이 이를 악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끝까지 무스파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려 회담장을 벗어났다. 본래라면 회담장에서 습격한 그를 붙잡아 벌해야 하겠지만, 그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휴전협상은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신뢰의 연합과 피의 동맹의 휴전, 새로운 적을 향한 공동 대응, 연합을 탈퇴한 자들의 투쟁 선언까지.
대륙을 뒤흔들 소식이 널리 퍼져 나 갔다. 그리고 하나의 전쟁을 마무리 한 세력들이 악마와 악신, 오래된 신격을 향해 창칼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이 휴전을 결의하고 대륙에 아주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 평화로 느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둘 사이에 생긴 골이 얕지 않았고, 대륙 곳곳에 터져 나오는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만 했다.
더 큰 전쟁을 위한 숨 고르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렇게 대륙을 반으로 나누어 싸우던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서로 노려보는 틈으로 새로운 세력이 존재를 알렸다.
엘프와 대수림의 수인 연맹, 나가 왕국, 강철 모루의 드워프가 서로 손을 잡아 대륙 정세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4자 연맹은 땅따먹기나 대륙의 패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나 존재만 으로 다른 세력을 긴장하게 했다.
“실로 솥발의 형세로군.”
천하 삼분지계. 뒷짐을 한 상태로 그리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려 테잔을 바라보았다.
“어찌어찌 대륙의 세력들이 균형을 맞췄소. 자잘한 충돌은 있겠지만, 이전처럼 크게 싸울 수는 없겠지.”
“뭐, 그렇지. 불안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 인가 싶구먼.”
“모두의 힘이 컸소.”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황청의 성자, 델피노.
뱀신 모르나가 인정한 대전사, 사나운 이빨.
일곱 요정의 직계 후손, 이레인 팔라시온.
피의 동맹을 이끄는 원로, 테잔.
따지고 보면 이들 모두가 하나의 세력을 대표할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력하지 않았다면 대륙의 균형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얼추 틀은 갖췄으니 이제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어느 하나 쉽게 무너질 리가 없어. 전부 저력이 있는 세력이니. 그러면 우리는 약한 곳을 보수하러 가야지 않겠나?”
대륙의 동쪽은 피의 동맹이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서쪽의 서부 연합 왕국은 그동안의 정세에 한발 뒤로 물러나 있어서 전력을 유지했고, 남쪽의 마리난 제국은 대악마의 침략으로 영토가 불타고 심지어 나라가 둘로 쪼개졌으나, 부자는 망해도 3 대는 간다고 그 저력을 무시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성황청이 자리 잡은 중앙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아홉 신격이 천상의 문을 열고 지상으로 천사를 내려보냈기에 어느 때보다 강력한 상태이기도 했다.
다소 불안한 곳이 있다면 북쪽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대륙 북부는 제대로 패권을 쥐고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니안이 북부 왕국으로 불리고는 있었지만, 엄밀히 따졌을 때 스페니안은 서북쪽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강철 모루의 영역 역시 아주 넓은 것은 아니었고.
대륙 북부의 가장 넓은 부분은 제대로 된 나라조차 없는 야만의 땅이 었다. 여러 부족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테잔은 그동안은 대륙 정세에 소외되어 있던 그들을 끌어들일 것을 건의했다. 다가올 어둠과 싸우기 위해 티끌만큼의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이건 자네가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테잔이 빤히 바라보자 아이반이 험험 헛기침을 했다.
“뭐, 그렇지. 내가 무심했군.”
아이반, 그러니까 아이반 에시르손의 공식적인 고향이 바로 대륙 북부였다. 옛 세계, 이그드라실과 아홉 세계가 불탄 이후 노르드인들이 차원을 건너와 새로운 미드가르드로 삼은 땅.
명색이 아스가르드의 화신이고 에시르손이라는 성을 쓰고 있다면 가장 먼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바로 노르드인이었다.
그동안은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으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는 해도 언제까지나 미뤄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감한 일이로군.’
물론 실제로 아이반은 대륙 북부, 새로운 미드가르드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실제로 고향도 아니었고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낯선 땅인 셈이다.
지금에 와서 숨길 것은 또 뭔가 싶지만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보는데 잘 모른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라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으나 한번 찾아가 보지. 그들이 아직도 신앙을 잃지 않았다면 내 말이 제법 귀하게 들릴 것이오.”
아이반 스스로 원치는 않았으나 어쨌든 그는 아스가르드의 화신이고 살아있는 에인헤리였다. 노르드의 삶에서 신앙이란 따로 떨어질 수 없으니 아스가르드의 화신이 하는 말을 아예 모른 척하지는 않으리라.
‘아니면 몇 놈 잡아서 줘 패면 말을 듣겠지.’
아이반의 머릿속에서 노르드 부족은 오크 무리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대충 힘자랑하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그러면 당신은 어쩔 생각이오?”
그 말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브리나가 눈을 돌려 아이반을 보았다.
“왜? 내가 곁에 있는 것이 불편한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엄밀히 따져서 동료나 일행이라 하기가 어려웠다. 비록 완전성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초월자인 것은 틀림없었고.
세력을 중재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메신의 영역에 남아 있더니 일이 끝나자 어느새 슬그머니 나타나 있는 것도 무슨 생각인지 영 껄끄러웠다.
‘혹시 브리카가 가져간 영혼의 한 조각을 되찾을 생각인가?’
홀로 오롯하여 완전하다는 창조주의 화신이 완전성을 잃고 그 치욕을 겪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으니 되찾겠다고 하면 아주 명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피의 검 브리카는 아이반과도 영혼이 이어졌기에 순순히 건네 줄 수가 없었다. 주변의 기운을 흡수해 순수한 마력으로 바꾸는 피의 검 브리카의 보조가 없다면 전투력이 급감할 것이 뻔했고.
그러면 싸워야 하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사브리나가 눈치를 채고 고개를 저었다.
“잃어버린 완전함에 대한 집착은 없노라. 천 년의 변화 역시 그 불완전함의 결과이니 내가 응당 감당해야 할 것이지. 그러나 영혼의 허함이 나를 이끄는구나. 내가 온전히 권능을 발현하려면 이 녀석이 곁에 있어야만 하니 부득불 너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리 말한 사브리나가 지그시 바라 보며 물었다.
“혹, 나의 존재가 방해되는가?”
저렇게 말하는데 어찌 그렇다고 답할 수가 있을까. 아이반 역시 그녀가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고초를 겪은 것에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는 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좋도록 하시오. 다만 우리 와 함께하려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때로는 나의 명을 들어야 하겠지. 과연 드높은 드래곤의 자존심으로 가능한 일 이겠소?”
“오만함이 족쇄가 되어 나를 치욕으로 이끌었다. 부족함을 알았으니 어찌 함부로 행동하겠느냐? 완전함을 포기한다면 불완전함의 고통도 응당 감내해야 할 것이니라.”
드래곤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남긴 분신이자 화신이기에 허언은 하지 않았다. 말로 세상을 조율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말의 무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리 말했다면 지킬 것이다. 드래곤의 한마디는 세상의 법칙이나 다름없었다.
“정녕 그런 각오라면, 나 또한 그대를 환영하오.”
아이반이 손을 내밀자 사브리나가 그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악수하는 와중에 아이반이 그녀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드래곤도 손톱을 깎으면 다시 자라오? 전에 보니까 날개가 잘려 나가도 금방 회복하던데.”
아이반의 물음에 사브리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