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96
“나는 재료가 아니다!”
일행은 요정의 숲을 통해 단번에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대륙 북부가 아니라 서부와 남부의 경계였다. 노르드인들을 설득 하는데 도움이 될 자를 찾아온 것이다.
깊은 숲 속, 마치 폐허와 같은 유적 앞에 서니 누군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일행을 환영했다. 예전에도 그들을 맞이했던 파라스의 지인이었다.
“누가 밖에서 얼쩡거리는 건가 했더니 자네들이군. 파라스는 보이지 않고 대신 낯선 이들도 끼어 있네.”
은빛 용광로의 드워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테잔과 사브리나를 바라보자 아이반이 설명했다.
“파라스는 난쟁이 곁에서 그의 기술을 배우고 있소. 이자는 새롭게 동료가 된 테잔이라고 하오. 저쪽은 사브리나.”
“뭐? 난쟁이? 그건 혹시 파라스가 뒈져서 저승으로 갔다는 걸 돌려 말한 건가?”
“아니, 진짜로 난쟁이를 만났소. 괴팍하기는 해도 실력은 확실하더군.”
“허어, 평생 난쟁이, 난쟁이 떠들기에 헛소리나 하는 줄 알았더니 성과가 있었군. 난쟁이의 솜씨가 진짜라면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감탄하듯 턱을 긁적인 드워프가 옆을 힐끔 살피며 말했다.
“이들의 동료가 그저 평범한 자는 아닐 테고, 테잔이라면 그 주술사 테잔이겠지? 흠, 오크를 안으로 들이기란 처음이지만, 환영하오.”
그러면서도 차마 사브리나를 바라 보면서 환영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면서도 선뜻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아니,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 건가? 어쨌든 안으로 들어오시게.”
그의 말이 끝나자 낡고 부서진 유적이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화려한 모습을 되찾았다. 깔끔하고 웅장한 아치형 문을 통과하니 아름다운 은빛 용광로의 풍경이 보였다.
차원을 겹쳐서 같은 공간에 덧씌운 고도의 결계였다. 예전에는 완전히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이반의 눈에 그 구조가 제법 선명하게 들어왔다.
대주술사 테잔과 드래곤 사브리나도 그걸 꿰뚫어보고 있는지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깡!
깡!
망치로 쇠를 내리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예전보다 훨씬 활동적으로 작업하는 모양이다.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드워프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영혼으로 망치를 휘두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드워프라면 어찌 그것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나? 최근에는 다들 어디서나 작업하느라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야.”
은빛 용광로 최상단을 폐쇄하고 소두린이 영혼을 깎아 망치질하고 있었다. 한때 종족신이 될 수도 있었던 자가 진심으로 열중하는 소리에 은빛 용광로의 모든 드워프가 감격해서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고 했다.
소두린의 망치 소리를 들으면 사라진 열정과 메마른 영감이 솟구친다고 그는 설명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브리나가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일행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불꽃처럼 타오르는 영혼의 울림이 마지막 심지에 매달려서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어야 겨우 며칠이었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삶을 살았다는 드워프의 영웅이 죽음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떠날 터였다.
안내를 맡은 드워프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말을 아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위대한 소두린의 죽음을 알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행은 예전에 묵었던 숙소로 안내 받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차를 들이켰다. 신화시대가 끝나는 순간 태어나 신화시대가 시작되는 순간 눈을 감는 위대한 영웅에 대해 생각하느라 대화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그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기감으로 알아차린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
난쟁이의 기술을 잇는 노르드의 장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반을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오, 아이반. 얼핏 소식은 듣고 있었소. 아주 큰일을 겪었다지?”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큰일을 겪는 중이겠지.”
“그도 그렇지만 그대는 그 험한 세월의 가장 선두에 있잖소?”
은빛 용광로에 머물며 기술을 가다듬고 자신을 돌아본 피알라르는 예전보다 한층 밝고 부드러웠다. 내면이 크게 성장한 모양이다.
“오자마자 나를 먼저 찾았다고 들었소. 바쁠 텐데 설마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내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소?”
아이반이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 키며 답했다.
“노르드의 힘이 필요하오. 도와주시오.”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내뱉는 아이반을 보면서 피알라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정당한 노르드의 왕이 탄생하겠구려.”
본디 노르드인들의 운명은 옛 세계가 멸망하며 끝났어야 했다. 오딘과 토르, 로키와 헤임달 같은 수많은 신도 같이 사라졌어야 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불타고 아홉 세계가 무너지던 라그나로크 이후 그들이 옛 세계에 있을 자리는 없었고, 그렇게 죽고 잊힌 상태로 사라지는 것이 본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 정말로 세계가 멸망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있었으니, 그 미약한 생존 의지가 그들을 이 땅으로 이끌었다.
불타고 부서진 세계 한 조각에 몸을 실어 간신히 탈출하여, 그전까지 전혀 존재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이다.
정해진 운명대로 죽음을 맞이한 신들은 새로운 세상의 법칙에 따라 불멸자의 생명을 되찾았고, 억센 노르드인들은 가장 척박한 북부를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 이곳에 뿌리내렸다.
그런 신들의 사랑을 받고 노르드인들을 이끈 것이 에시르손이었다. 아사신족의 아들, 신의 피를 이은 자, 정당한 노르드의 왕.
예로부터 노르드의 왕은 신의 핏줄 을 자칭했다. 라그나로크 이전에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성으로 그것을 증명했다면 이 땅에서는 자신의 위대한 업적과 신의 관심으로 그것을 뽐내었다.
이 땅에 나타난 최초의 에시르손은 노르드인을 하나로 묶어 낯선 땅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주변에 가득한 괴물을 물리치고, 혹한이 몰아치는 땅을 신의 힘으로 안정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신의 피가 흐려지면서 최초의 에시르손에 비견 되는 자가 더는 없었다. 스스로 에시르손이라 자칭하는 자들은 많으나, 그들의 용맹은 노르드를 하나로 만들 수가 없었고, 신들의 관심을 받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하나가 되었던 노르드는 잘게 찢어졌다. 위대한 옛 영웅의 피를 모두 나눠 가져 노르드의 절반은 그 후손일 것이라 농담처럼 내뱉으며 에시르손의 존재감마저 극도로 옅어졌다.
여전히 위대하고 신성한 이름이었으나, 그렇기에 그저 그리워할 뿐이 었다. 지난 수백 년간은 그 누구도 에시르손을 자칭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한동안 잊혔던 에시르손의 이름이 세상을 떨쳐 울리고 있었다. 새로운 영웅이 스스로 에시르손이라 외치며 나타난 것이다.
아이반 에시르손, 현재 노르드인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다.
“간간이 고향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덜하지는 않았소. 당신을 만나겠다고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도 제법 많다더군.”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의 말에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랬나? 그럴 줄은 몰랐군.”
“당신의 존재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니까. 노르드의 전사라면 한 번쯤 만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물론 그렇게 열정이 끓어올라 떠난 젊은이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도 아이반을 만나지 못했다. 평범하게는 도저히 아이반의 행적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험한 산맥이나 몬스터 둥지를 거쳐서 움직이고, 심지어 요정의 숲으로 대륙을 가로지르며 돌아다니니 열정만으로 뒤를 쫓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상급 술사인 마녀들도 아이반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서 고생했는데 달랑 무기 몇 개 들고 발로 뛰어다닐 노르드의 전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노르드의 정당한 왕이 돌아왔으니 이제 흩어진 노르드가 하나가 되어 세상에 진출할 때가 되었소. 무식한 북부 야만인 놈이라고 욕을 먹는 세월도 이제 끝이로군.”
피알라르가 흐흐 웃으며 중얼거리자 아이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왕이라니,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목상 고향일 뿐 아이반은 제대로 노르드인들이 사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친분도 없고 인연이 없는데 그저 에시르손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왕 노릇을 할 수 있겠나.
도움을 요청하고 제대로 말이 안 먹히면 적당히 줘패서 말을 듣게 하여야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왕이라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왕관은 필요 없소. 그저 말 잘 듣고 잘 싸우는 자들만 있으면 충분하오.”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의 자리를 응당 되찾아야지! 에시르손이 바로 노르드의 왕이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노르드를 이끌 수 있단 말이오?”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은 아이반이 노르드의 왕이 되는 날 가장 먼저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겠다며 소 리 쳤다.
그는 순수한 장인에 가깝기에 권력을 신경 쓰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리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이반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반이 왜 그러는지 물으니 피알라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르드인 중에서 어릴 적 에시르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자가 어디 있겠소? 그 이름의 무게를 아는 자라면 모두 같은 반응일 것이오.”
그 말에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가장 실감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노르드의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에시르손에 관한 전설이나 옛이야기에 대해서도 잘 알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용병 시절에 가끔 노르드 인을 만나면 비웃음이나 실컷 당하다가 한두 마디쯤 들어 본 정도일까.
그래도 옛 전설만으로 노르드인이 환영할 것 같지는 않았다. 명성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결국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왕으로 삼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긴, 피알라르도 순수한 면이 있으니 그게 중요할지도 모르겠군.’
제대로 된 영웅이 자신의 무기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대륙을 돌아다니던 피알라르였다. 그에게 영웅이란 무척이나 신성하고 대단한 존재였으니 영웅이 왕이 되는 이야기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전형적인 옛 영웅담의 완성이 아닌가.
“당신은 정당한 왕이니, 응당 그런 태도를 보여야만 하오. 부디 내 말을 명심하시오.”
피알라르의 말이 영 부담스러웠지만 노르드를 끌어들이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그깟 광대놀음 못 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온 것처럼 오만하고 당당하게.
태생이 고귀하지 못해서 과연 얼마나 위엄이 흘러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반은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