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1
“이번에는 꽤 짧았군요.”
델피노가 그리 말하자 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 거인들에게 포위된 때보다는 나아.”
얼음 골짜기를 지나 거울 동굴로 들어온 그들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지독한 환영 속에 던져지고 있었다.
때로 얼어붙은 거인이 덤벼들었다. 단단한 얼굴의 전사가 창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하늘이 요동치고 불길이 치솟았다.
그 모든 것이 옛 세계가 멸망하던 때의 풍경이었다. 현재의 것이 아님에도 파괴적인 환영은 계속 나타나 일행을 덮쳤다.
그들은 멈춰진 세계의 기억 속을 걷고 있었다. 멸망의 기억이 아무렇게나 나타났다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헛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이반은 어둠 너머, 동굴 가장 깊은 곳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볼바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녀는 굳이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아서 점점 더 선명하기만 했다.
“흘흘, 초월자의 시련이란 본디 알 수 없는 법이지.”
사실 일행이 마음먹고 환영을 벗어 나고자 하면 흘러간 세계의 기억쯤은 단숨에 부수고 나올 수가 있었 다. 그러나 이것이 볼바가 그들에게 내린 시련임을 알기에 꾹 참고 있을 뿐이다.
한 조각 미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니 볼바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정녕 볼바가 신격조차 미래를 묻던 예언자라면 이 정도 시련에 불만을 토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들을 덮치는 멸망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흔적에 불과해서 아주 위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과정이 지루하고 귀찮을 뿐이다.
그래도 멸망하는 세계가 보여 주는 처절한 모습은 일행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누군가는 감동했고, 누군가는 슬퍼했으며, 누군가는 분노했다.
지금의 세계도 멸망을 앞두고 있기에 그 모든 전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남의 이야기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옛 세계의 기억이 보여 주는 비극을 마주하며 일행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각자 생각에 잠겨서 고민을 거듭할 뿐.
아이반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옛 기억을 보며 같이 침묵하고 있었다.
‘옛 아픔을 마주한다는 것은 신격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지.’
마침내 길고 긴 멸망의 기억을 통과하고 불타는 위그드라실을 바라보며 모두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세계수 네트워크에 합류하며 감정이 옅어졌던 이레인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아마 불타는 위그드라실이 그녀에게는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때 불타는 위그드라실의 환영 너머로 누군가 나타났다. 한때는 고급스러웠을 낡은 옷을 걸치고, 한때는 아름다웠을 머리카락에 재가 가득한 여인이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동굴 자체가 어둡고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것을 꿰뚫어 볼 능력이 있었다. 몇 번이고 손톱으로 할퀴고 회복된 흔적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녀의 회백색 눈동자는 초점이 없이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무척 가녀리고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품고 있는 기운이 그녀가 초월자임을 알려 주었다. 호수처럼 잔잔하고도 바다처럼 깊었다. 그 그림자 만으로도 웬만한 자들은 무릎 꿇었으리라.
적대적인 기운은 아니었으나 초월자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필멸자를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온전히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사브리나를 제외한 일행은 알게 모르게 그들을 내리 누르는 압박감에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반. 아스가르드의 화신, 멸망한 세계의 대리인이여.”
볼바가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아이반을 환영했다. 오랜 세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뱉은 적이 없는 것처럼 탁했으나 고개를 살포시 숙이 며 인사하는 모습이 퍽 공손했다. 초월자가 필멸자를 대하는 태도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를 아는군.”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볼바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보는 것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과연 볼바였다. 오딘조차 기꺼이 찾아가 세계의 운명을 물었다는 옛 세계 최고의 예언자.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세상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에 통달한 어둠의 현인.
“이 땅에 어둠이 찾아온 것을 알 것이오. 파멸이 가까워진 것을 보았겠지. 나에게, 우리에게 그대의 예언이 필요하오.”
아이반의 요청을 들은 볼바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세계의 운명을 읽는다는 것, 미래를 본다는 것은 결코 즐겁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멸망의 기억을 보고도 알지 못하였습니까?”
“무엇을?”
“옛 세상은 미래를 몰랐기에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볼바는 깊은 회한이 담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오히려 예언이 멸망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항상 후회하고 있습니다.”
본디 볼바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섬기는 이 없는 무녀이며, 세상의 뒤편에 존재하는 현자로서 남모를 세상의 비밀을 탐독하고 미래를 엿보는 것만이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오딘이 그녀를 깨워 억지로 예언을 듣는 순간, 은둔자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세상의 운명에 책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일찍이 신들의 운명을 노래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누설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자신이 아는 바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즐거움도 분명 없지는 않았지요. 저는 더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예언은 그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나와 누군가의 귀로 들어가는 순간, 예언은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족쇄가 되어 대상을 얽매게 되었다.
위대한 예언자의 말은 운명을 강제 한다. 미래를 보았기에 예언이 정확한 것이 아니라, 예언을 들었기에 미래가 그런 식으로 흐르게 된다.
오딘은 한낱 예언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리라 믿지 않았으나, 볼바는 자신이 예언함으로써 세계의 멸망을 확정 지은 것이 아닌지 지금껏 후회하고 있었다.
위대한 오딘이 영광스러움을 누리지 못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스스로 학대하며 멸망을 막기 위해 돌아다닌 것.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로키의 아이들이 버림받고 학대당한 것.
그리하여 유쾌한 장난의 신이 결국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은 전쟁을 알린 것.
그 모든 것이 예언 때문이었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었다.
“라그나로크 이후 저주받은 눈을 스스로 없애려고 했으나, 오히려 더욱 선명하기만 하군요.”
스스로 손톱으로 긁어 멀어 버린 그녀의 눈은 언제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파멸의 그 순간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래가 보이냐고 물었습니까? 예, 보입니다. 제 눈에는 이 땅의 미래 역시 보입니다.”
그 누구도 세계의 멸망을 두 번씩이나 보지는 못했으리라. 두 번이나 예언한 자도 없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차마 입을 열어 미래를 내뱉지 못했다.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하는 저주받은 권능은 미래를 보여 주었다. 파멸적인 미래가 이 땅을 불태우는 것을 비추고 있었다.
“아이반! 아스가르드의 화신, 잃어 버린 옛 세계의 후계자여. 그대는 정녕 내가 본 미래를 듣고 싶으십니까? 그리하여 오래된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자 하십니까?”
차분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과거를 보는군.”
“예, 더없이 선명합니다.”
“그대는 미래를 보는군.”
“예,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보지 못한다.”
우웅-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변했다. 왼팔에 불길이 휘감기고 오른팔에는 번개가 내리쳤다. 그 무엇보다 감각이 예민해졌으며 강인한 힘이 차올랐고, 또 단단해졌다.
아이반은, 아스가르드의 화신은, 옛 세계의 후계자는 손을 뻗어 볼바의 눈을 만졌다. 상처 가득한 두 눈에 생명력을 가득 쏟아 넣었다.
잃어버린 눈이라도 회복시키려는 것일까? 아직 필멸자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자가 초월자가 스스로 버린 눈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가?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담담히 말을 내뱉던 볼바가 입을 다물었다.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슥-
눈가의 상처가 아물었다. 회백색으로 죽어 버린 눈에 빛이 돌아왔다.
주르륵
한쪽 눈으로, 입과 코로 피를 흘리면서 아이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신으로 힘을 내뿜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런가? 나의 뒤에 파멸이 보이는가?”
아이반, 아스가르드의 화신, 옛 세계의 후계자. 그리고 이 세상 유일하게 그 어느 운명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특이점.
한낱 씨앗이 발아하여 어느새 뿌리를 내렸다. 오랜 세월과 거친 바람을 견뎌온 거목과 비교하면 아직 작기만 하나 이제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운명의 주체, 세계의 주인공이 스스로 걷고자 하니 온 세상이 그 의지에 호응했다.
한 걸음, 단 한 걸음.
그 앞에 서서 아이반이 볼바를 보 았다. 세계의 멸망을 예언했던 무녀 에게 물었다.
“나의 파멸이 보이는가?”
볼바가 눈을 떴다. 빛을 찾은 눈동자로 아이반을 마주했다. 짙은 과거와 진한 미래에서 벗어나 현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다가올 시대의 왕이여.”
그 순간 아이반을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피눈물도 사라지고 슬픔과 분노의 감정마저 흩어졌다. 오로지 환희만 가득했다. 오랜 기다림을 견딘 신들의 환호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이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예언은 들었다. 실현은 나의 몫이다.”
아이반의 당당한 선언에 델피노가 미소를 지었다. 사나운 이빨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고, 이레인은 활을 들어 올렸다. 테잔은 축하한다는 듯 박수를 쳤으며, 사브리나는 용언으로 축복했다.
노르드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을 본 하늘 망치 부족의 대전사 로그니르는 아예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노르드에 영광을! 우리의 왕을 찬양하라!”
둥둥,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