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2
둥둥, 탁!
옛 세계의 기억에서 길 잃은 영혼을 인도하던 발키리가 검과 방패를 두드리며 왕을 환영했다. 발할라의 에인헤랴르가 술잔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아이반! 우리의 왕이여!
아이반은 그 모든 환영 속에서 출진을 명했다.
“이제 우리는 전장으로 돌아간다. 적을 쓰러뜨리고 우리의 깃발을 휘날려라.”
뿌우우-
긴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발할라가 전쟁을 준비했다. 칼날을 새로 갈고 갑옷을 닦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동료를 바라본 아이반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같이 갑시다.”
그렇게 왕과 그 일행이 당당히 빠져나가는데, 사나운 이빨이 머뭇거리다가 슬쩍 볼바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혹시 나의 짝은 언제쯤 만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나?”
그 소리를 들은 일행은 하나둘씩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215화 겨울잠을 끝내고
거울 동굴에서 돌아온 아이반이 볼바를 만나 예언을 들었음을 알렸다.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되어 노르드를 이끌 것이라 선언했다.
모든 노르드가 그에 호응했다. 정당한 왕이 돌아왔음을 축복하고 그를 따라 위대한 전장으로 향할 것을 결의했다.
“어찌어찌 목적은 달성했군.”
또다시 술판이 벌어지려는 것을 세상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슬쩍 빠져나온 아이반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치도 않은 왕 노릇을 하려니 쉽지 않소.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하고 떠나지.”
“이들은 이제 진심으로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왕으로 군림할 수도 있죠.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이곳에 군림하고자 온 것이 아니오. 싸움을 준비하러 온 것이지.”
아이반은 본디 누구를 이끌거나 나서서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르드를 하나로 묶기 위한 명분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굳이 왕을 자처하며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한 조각 권력에 취해 부모도 자식도 버리고 내달리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또한 세상 모든 산해진미와 부귀영화도 귀찮다 손을 내젓는 것도 인간이었다.
안 그래도 필멸자를 반쯤 벗어나 초월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산 위에 오른 이의 눈에 아래에 있는 것들이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처럼 세속의 영광이 그에게는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반이 곧 떠날 것이라 알리자 노르드인들이 그를 말렸다. 이곳에 머물며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노르드의 왕이기 전에 영원한 전사요. 신께서 투쟁을 명하시니 언제나 가장 험한 전장을 향해 나아갈 뿐이오.”
그 말을 들은 노르드인은 아이반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신을 위해 싸우겠다는 전사를 어찌 가로막는단 말인가. 그저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리며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이 명하신 대로 전쟁을 준비하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내고 당당히 신들의 전당으로 향하겠습니다.”
“용맹한 자에게 축복을. 아스가르드의 화신이자 에인헤랴르의 지휘관으로서 선언하는데, 위대한 전쟁에서 자신을 증명한 전사들은 발할라에 갈 수 있을 것이오.”
싸우다가 죽으면 영혼을 뽑아 다시 싸우도록 하겠다는 소리다. 실로 악독하고 잔인한 말이었지만 모든 노르드 전사가 감격에 몸을 떨었다.
과연 싸움 그 자체를 축복으로 생각하는 광전사 집단이었다. 창칼로 몸을 무장하고, 신앙으로 정신을 무장했으니 그 무엇보다 강인한 전사들이다.
“발할라! 용맹한 전사의 전당! 우리의 위대한 신과 노르드의 왕 아이반을 위해!”
수십만 노르드가 아이반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으려 전쟁에 참여했다.
엘프, 드워프, 나가, 수인에 이어 노르드가 합류했다. 4자 연맹은 5자 연맹이 되었고,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은 이전보다 연맹을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반은 멀리서 은밀하게 스며드는 어둠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다를 거야.’
노르드 신화의 종말은 라그나로크(Ragnarǫk)였다. 뜻은 신들의 운명. 곧 종말이야말로 정해진 신들의 운명이라는 소리다.
종말을 피하려 노력하는 만큼 멸망의 순간이 가까워졌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세계의 마지막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창조주이자 신들의 왕인 오딘이 가장 초라한 행색으로 떠돌아다니고, 법의 신이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장난의 신에게 장난기가 사라지며, 적과 맞서 싸워야 할 풍요의 신이 검을 잃어버렸다.
노르드 신화는 온통 모순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원할수록 잃어버리며, 바랄수록 멀어졌다.
아스가르드 신들이 아이반에게 바라는 것은 그 모순된 운명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신들조차 강제하는 냉혹한 운명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반은 그를 받아들였다. 아스가르드 신들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하는 세계를 위해서. 살아남은 모든 자를 위해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휘이잉-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었다. 생명을 얼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냉혹하고 시린 바람이었다.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혹독했다.
그러나 이 겨울이 끝나면 봄이 찾아올 것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꽃이 피어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 * *
대륙 북부, 노르드의 땅을 떠난 일행은 붉은 계곡으로 향했다. 최근 리자드맨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사나운 이빨은 다소 흥분한 기색이었다.
“우리 부족의 대욕탕만큼 훌륭한 곳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다들 감탄할 것이다.”
몇 해가 지났으나 고향의 지리가 아직도 선명한지 사나운 이빨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고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나운 이빨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델피노가 조심스럽게 물으니 사나운 이빨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쯤이면 마을의 냄새가 나야만 하는데…….”
그 말에 테잔이 턱을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이쪽에 부족이 있다고? 리자드맨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이제 막 도착했으니 자연과의 동화가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주술사의 말이었다. 테잔이 틀릴 리가 없다는 뜻이다.
“…일단 계속 가보지. 가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겠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은 별일 없을 것이다. 모두 강인한 자들이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불안감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끊임없이 방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움직인 흔적이 거의 없는데?’
레인저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 주변을 훑던 아이반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에 누가 지나갔다면 흔적이 남아야 할 것인데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것은 죄다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숙련된 사냥꾼인 사나운 이빨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익숙한 자신의 고향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꼈으리라.
마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나운 이빨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다.
그러다 마을을 발견한 그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물가에 아름답게 세워진 마을이 통째로 불타서 폐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도대체 왜?”
델피노가 깜짝 놀라서 그리 소리칠 때, 사나운 이빨은 오히려 더욱 침착하게 변했다. 그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고 흔적을 살피면서 냉정히 판단했다.
“그리 놀랄 것 없다. 외부의 공격은 아니다.”
마을이 불타기는 했지만, 그 외 파괴의 흔적은 없었다. 집기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거나 무기의 파편이 보이지도 않았다. 시체는 물론 전투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사라도 한 것 같군.”
그러했다. 마을이 새로운 곳으로 이전한 모양새였다.
“하루 이틀은 아니고, 이곳을 떠난 지 적어도 몇 달은 된 듯하오.”
“혹시 난폭한 호수로 간 것은 아닐까요? 그곳에 뱀신의 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뱀신 모르나와 나가가 버리고 간 옛 도시. 예전 델피노와 아이반, 사나운 이빨이 몰아치는 오크 부대에 맞서 함께 싸웠던 곳.
“그럴 수도 있겠군. 규모가 작지 않으니 부족이 살기에 적절하겠지.”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나운 이빨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단은 하나의 부족이 온전히 차지할 수 없다. 마을을 버리고 이전할 리가 없을 텐데…….”
“글쎄,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그게 최근의 상황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득 사브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자가 있구나.”
뒤이어 테잔도 발견했는지 턱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리자드맨 전사 몇이로군. 그리고 저건, 나가인가?”
그 말에 아이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가? 확실하오?”
“하반신이 뱀인 종족은 몇 있지만, 그중에서 뱀신 모르나의 신성력을 가진 자들은 나가 말고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