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3
“역시 뱀신이 움직였군.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전에는 잘만 몸을 뺏어서 나타나더니 자신의 육신을 새로 만들어 부활한 이후에는 어째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입 다물고 그동안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옛 신도들을 다시 품으로 안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델피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다른 리자드맨 부족의 움직임이 영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행이 이곳에 온 것은 리자드맨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무리가 창칼을 들고 다른 종족을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뱀신 모르나가 비록 종잡을 수 없는 신격이나 아군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가 리자드맨을 시켜 다른 종족을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리자드맨을 움직인 것이 뱀신 모르나가 아닌 모양이지. 그걸 수습하기 위해 뒤늦게 손을 뻗었을지도 모르고.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아이반이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자 깊이 고민하던 사나운 이빨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안타깝지만 모든 부족이 신앙을 유지한 것은 아니니까.”
뱀신 모르나가 리자드맨을 버리고 침묵한 세월이 길었다. 수백 년을 넘게 대답하지 않는 신을 모신다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니 그녀를 따르지 않는 부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버린 신이 수백 년 만에 돌아와 다시 신앙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고 모든 이가 따르지는 않겠지. 균열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외부의 개입이 전혀 없었을까?’
대답도 없는 신에게 수백 년을 넘게 방치되고도 투철한 신앙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다시 돌아온 신을 거부하는 것이 간단하냐면 또 그건 아니었다.
이게 단순히 뱀신 모르나에게 실망한 리자드맨 부족들이 이탈했기 때문인지, 악마나 악신, 또 다른 옛 신격의 손길이 닿은 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자들이 있으니 길게 걸리지는 않겠어.”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리자드맨 전사 몇 명과 나가 전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자드맨들은 사나운 이빨의 부족인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의 전사였고, 나가는 예전에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같이 싸웠던 자였기에 얼굴이 익숙했다.
“저희가 조금 늦었습니다.”
그들은 일행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채 인사했다. 마치 이곳에 당연히 있으리라 여긴 듯했다.
“그분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저희는 그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들이 그분이라 부를 존재는 뱀신 모르나 외에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뱀신 모르나가 이들을 보내 안내하려는 모양이다.
“다들 제단으로 간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 또한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누구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아이반이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그럼 안내하시오. 뱀신 모르나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봐야겠소.”
그러자 나가 전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분께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분께 안내한다. 그건 곧 뱀신 모르나가 나가 왕국을 떠나 이곳에 직접 와 있다는 말이었다.
‘뱀신이 직접 움직일 정도의 일이라고?’
살짝 표정이 굳은 아이반이 발을 옮겼다. 이번 일도 역시 심상치는 않았다.
216화 뱀신의 아이들
안내를 받아 서북쪽 난폭한 호수로 향했다. 예전에 한번 왔던 곳이기에 주변 풍경이 얼추 눈에 익었으나 그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약간 구석진 자리는 어김없이 병사가 숨을 수 있는 진지가 되어 있었고, 길은 모두 교묘한 함정으로 덮여 있었다. 보기에는 평범한 숲길로 보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투에 최적화된 전장이었다.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모양이군. 분위기가 아주 살벌해.’
아이반은 걸어가는 동안 주변을 살피며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려 보았다.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는 의미가 없겠으나 다수가 부딪치는 전장에서는 이러한 준비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신격이 있구나. 정말로 뱀신 모르나가 여기에 있는 모양이야.”
사브리나가 난폭한 호수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몇 개나 되는 결계로 가리고 있었으나 드래곤의 눈에는 신격의 강대한 존재감이 그대로 보였다.
난폭한 호수 한가운데 입을 쩍 벌린 동굴로 들어가자 음습하고 축축한 뱀굴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동시에 웅장하기도 했다.
뱀신의 제단. 오랜 세월 방치되어 여기저기 부서져 있던 지하 도시는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었다. 리자드맨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보수한 모양이다.
그 가장 깊은 곳,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성에서 뱀신 모르나의 신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진실로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모두 깨달았다.
쉭쉭-
지하 도시를 휘감고 흐르는 수로에서 커다란 바실리스크가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예전에 보았던 녀석이다. 오크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었는데 지금은 모두 회복된 듯했다.
한번 오크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인지 날카로운 눈으로 테잔을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리던 녀석은 휙 고개를 돌리고 물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뭔가 싶어서 나가 전사를 바라보니 그가 설명했다.
“바실리스크가 이곳의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뱀신의 제단에 들어오려는 자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죠.”
바실리스크의 감각은 특별했다. 보통의 뱀처럼 뛰어난 후각과 열 감지, 진동감지를 지니고 있을뿐더러 마력의 흐름마저 잡아낼 수가 있었다.
이 바실리스크는 뱀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지능도 평범한 바실리스크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웬만큼 은신에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녀석을 속이고 몰래 지나갈 수는 없을 거다.
“제법 믿을 만한 문지기로군.”
테잔이 흘흘 웃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성문이 절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왔으면 얼른 들어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가고 있는데 거 재촉이 너무 심하군. 따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면서.”
낮게 투덜거린 아이반이 발걸음을 옮겼다.
뱀신 모르나는 뱀신의 제단 깊은 곳에 있는 성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로로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도시를 살피며 고고하게 와인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묶어 올리고, 유려한 몸의 곡선을 드레스로 휘감았다. 태생이 고대 요정이 남긴 욕망이니 얼핏 엘프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교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뇌를 비집고 강제로 스며드는 것 같은 매력이 느껴졌다. 나가 특유의 매혹의 힘이 극대화된 것만 같았다.
당장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필멸자의 정신을 뒤흔들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행은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다들 평범함을 한참이나 넘어선 자들이기에 겨우 그런 것에 매혹당할 리가 없었다. 신격의 존재감은 이제 익숙했다.
“이게 새로 만든 나의 육신이다. 어떠한가?”
“확실히 육신을 가지고 온전히 지상에 자리 잡으니 신력이 안정적이군.”
“…감상은 그게 전부인가?”
“근육이 부족하니 근접전에는 불리하겠군. 적이 어떻게든 파고들어 주먹을 내지르면 반응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 말에 뱀신 모르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매혹의 마력을 거둬들였다. 상대에게 강제로 호감을 끌어내고 매력을 쑤셔 넣는 권능이었으나 아이반이 헛소리만 늘어놓으니 흥이 떨어진 모양이다.
“참으로 눈치가 없는 자로고. 내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니거늘.”
“그럴 거면 매혹의 마력은 뿌리지 말았어야지. 상대의 감정과 인식을 건드려서 홀리려고 하니 반발심만 생기는 것 아니오.”
“쯧쯧, 그렇게라도 칭찬을 듣고 싶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참으로 재미가 없는 사내야.”
그 말에 아이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육신을 새로 만드는 데 제법 공을 들였나 보오. 실로 뱀신의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이로군.”
님, 정말 커마 장인이네요. 영혼을 갈아 넣으신 듯.
아이반의 억지 칭찬에 뱀신 모르나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나의 매력은 끝이 없으니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은 옛 모습과 그리 다르지도 않구나.”
와인 홀짝 들이켠 뱀신 모르나는 잔을 옆으로 치우고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것은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였다. 창조주가 남긴 화신, 세계의 조율자.
“이리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용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군. 그래, 내 성은 어떠한가?”
“축축한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니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다.”
“…하여간 마음에 드는 대답이 하나 없구나.”
언제나 욕망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이 오히려 말린 느낌이었다.
뱀신 모르나는 그런 떨떠름한 마음을 털어내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모래가 흘러들어와 지도가 되었다.
“보면서 느꼈을 것이다. 나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노라.”
“당신을 따르지 않는 리자드맨 부족이 그 대상이오?”
“일단은 그러하다. 뒤에 숨은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뱀신 모르나의 눈빛에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공간을 지배한 신격의 기분에 따라 마력이 요동쳤다. 지하 도시에 있는 모든 리자드맨과 나가가 고개를 숙이고 뱀신의 분노가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당신이 몰래 이곳에 온 것은 역시 리자드맨을 다시 품으로 들이기 위해서였겠지. 무엇이 당신을 방해하고 있소?”
“이계에 유폐되었던 녀석이 감히 나의 것을 노리고 있다.”
힘을 모아 겨우 쓰러뜨렸던 아발로크가 아닌, 또 다른 악신.
차원 장벽이 무너지고 그들을 묶어두던 이계의 봉인마저 풀렸으니 언제고 녀석들이 다시 이 땅에 나타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마 그중 하나가 리자드맨에게 손을 뻗은 모양이다.
“악신이 상대라면 홀로 감당하기는 어렵겠군.”
아이반의 말에 뱀신 모르나는 차마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으나, 힘이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