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4
이계에 유폐된 악신들은 하나하나가 신화시대를 뒤흔든 거물이었다. 애초에 뱀신 모르나는 싸움에 능한 신격이 아니기에 서로 맞붙어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힘으로 우위를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우아하지 못한 방식이니라. 그러나 또다시 힘의 시대가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뱀신 모르나가 육신을 되찾는 것으로 새로운 신화시대를 불러왔으니 어느 정도는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누구를 원망할 처지는 못 된단 뜻이다.
“요동치는 세월이라 내 조용히 움직이려 했으나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단순히 리자드맨이 상대라면 끝까지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옛 신도를 수습하는 일에 남의 손을 빌린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악신이 끼어 있다면 더는 집안일이라 할 수 없으니 도움을 받아도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 맺은 연맹이었다.
“악신에 물든 리자드맨이 얼마나 되오?”
“십만이 조금 넘는다.”
“제법 수가 많군.”
“내가 너무 오래 침묵한 탓이지. 쯧, 조금만 빨랐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을.”
뱀신 모르나가 다시 리자드맨에게 응답한 것이 겨우 몇 년 전이고, 본격적으로 존재를 알린 것은 육신을 되찾은 이후였다.
악신이 유폐에서 풀려난 것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순식간에 세를 불린 것을 보면 그전부터 마녀가 손을 썼음이 분명했다.
“비록 악신의 수작 때문이라고는 하나 감히 나를 저버린 녀석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는 않겠다. 그들의 피로 나의 부활을 알리겠노라.”
뱀신 모르나의 말을 들은 아이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신이 실존하는 세계인 만큼 배교는 지독한 죄악이었다. 비록 수백 년을 넘게 방치한 신이라고 해도 신앙의 근원이었으니 그녀를 외면한다면 배교를 한 셈이다. 심지어 그것이 악신 때문이라고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십만의 죽음, 벌써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까악- 까악-
멀리서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으나 지금은 마치 녀석들이 전쟁을 알아차리고 썩은 시체를 뜯기 위해 몰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너는 이곳에 남아라.”
적진을 살피기 위해 길을 떠나려는 순간, 뱀신 모르나가 사나운 이빨을 불렀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사나운 이빨의 육신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육신의 균형이 맞지 않다. 용의 심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친히 그것을 조정하겠노라.”
용의 육신을 가진 이후 사나운 이빨은 몇 번이나 성장하며 무척이나 강해졌으나, 뱀신 모르나의 눈에는 영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나의 대전사를 칭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육신의 잠든 가능성을 끌어올려 주마.”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사브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용의 심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동의한다. 용의 심장은 그저 불꽃이나 토해내고 마력을 내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
사나운 이빨의 가슴에 박혀 있는 심장은 사브리나와 같은 화염 드래곤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브리나 역시 몇 번이고 조언을 하곤 했다.
“용의 심장은 무한한 마력의 근원이며 권능의 정수다. 용이 아닌 자가 그것을 활용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우나, 자신의 심장으로 삼았다면 최소한의 힘은 끌어내야지.”
사나운 이빨의 용맹은 물론 대단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적이 초월자라면 거의 무력했기 때문이다.
초월자와 싸우기엔 그의 격이 부족했다. 그걸 억지로 용의 심장으로 채우고 있었으나 여전히 모자라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방패를 들어 후위를 지키는 데 집중하는 식으로 변화를 시도했으나 초월자를 상대로는 그 또한 버거운 일이었다.
반신이나 다름없는 아이반, 빛의 신 아룬을 강림시킬 수 있는 성자 델피노, 엘프라는 종족의 결전 병기를 들고 여차하면 세계수를 끌어들일 수 있는 이레인, 대주술사 테잔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까지.
지금의 사나운 이빨로는 다른 일행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 뱀신 모르나는 그리 여기고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깜짝 놀랄 만큼 바뀌겠지.”
뱀신 모르나의 명에 따라 사나운 이빨은 육신의 조정을 위해 남았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그것을 돕기로 했다.
순식간에 일행이 둘이나 빠지니 어딘가 허전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던 사나운 이빨은 물론이고 사브리나 역시 자리가 컸다.
‘길어야 몇 주일 텐데 어딘가 마음이 허하군.’
한때는 혼자가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영 쓸쓸했다. 그동안 자신도 많이 바뀐 모양이라며 아이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줄었으니 더 힘내야겠군. 잠깐 적진을 둘러보고 옵시다. 최대한 충돌은 피하겠소.”
푸드득!
컹컹!
아이반의 그림자에서 후긴과 무닌이 날아오르고 게리와 프레키가 뛰쳐나왔다. 녀석들을 길잡이 삼아 일행은 숲으로 들어갔다.
쏴아-
어두워진 하늘에서 겨울비가 내렸다. 쌀쌀한 입김이 빗물에 씻겨 흩어졌다.
217화 거짓된 모습
일행은 숲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대주술사가 숲과 감응하여 주변을 파악하고, 까마귀 정령과 늑대 정령이 경계를 맡으니 적의 영역이라 해도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숲 여기저기에는 심장이 꿰뚫린 동물의 사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건 적에게 경고하는 리자드맨들 특유의 방식이었다.
“아직은 특별히 악신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는데.”
함정을 피해 발걸음을 옮기며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테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이 바보가 아니라면 단서를 쉽게 흘릴 리가 없지. 아주 깊숙이 들어가야만 할 걸세.”
악신을 추적하는 것은 그들 일행만이 아니었다. 한번 호되게 맛을 보고 귀한 전사들을 몇이나 잃어버린 피의 동맹이 이를 갈고 있었으며, 성황청은 애초에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아홉 교단이 뭉쳐서 만들어진 곳이었다.
최근 대륙이 혼란스럽다고는 해도 악신이 대놓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할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특기이기도 했고.
“리자드맨을 끌어들여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뭘까요?”
조용히 따라가던 델피노가 입을 열자 일행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글쎄, 세력 확장?”
“그렇다면 온전히 리자드맨을 끌어들이는 것에 집중했을 겁니다. 리자드맨이 반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기 직전이 아닙니까? 굳이 로만 왕국이나 오크의 영역을 침범해 도발할 이유가 없죠.”
악신이라고 뱀신 모르나가 부활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옛 권속들을 뺏어가고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그런 상황에서 로만 왕국과 오크의 영역을 들쑤신 이유가 뭘까? 뱀신 모르나를 무시했기 때문일까?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이간질이군.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고 싶은 거야.”
악신과 악마, 두 세력이 원래 계획했던 대륙의 흐름은 이렇지 않았다.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은 끝까지 서로 노려보며 싸우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수많은 종족이 다양한 사정으로 흔들렸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의 왕국을 내부에서부터 파먹겠다는 계획은 크게 손상되었고, 요정의 숲을 잃어버리고 세계수가 불탔어야 할 엘프는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악에 완전히 물들어 달의 여신을 배신했을 라이칸스로프는 다시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고, 피의 동맹을 휩쓸어야 할 거인 신과 악신 아발로크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던전에 의해 부활한 화염 드래곤들에게 심각한 손해를 입었어야 할 강철 모루는 건재했다. 얼어붙은 대지를 한번 휩쓴 거인의 군세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그나마 대륙 남부를 박살 내고 마리난 제국을 둘로 쪼개버린 대악마의 힘은 대단했으나, 결국 대악마가 둘이나 넘어오고도 오히려 퇴치되었으니 실패한 셈이다.
마계의 교두보로 요정의 숲을 반드시 확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 빠르게 몰아쳐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이 계속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는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찔러보며 음모를 꾸미기도 쉬운데 갑자기 등장한 연맹 탓에 대륙의 힘이 셋으로 나뉘어 균형을 맞추니 환장할 노릇이겠지.
하나부터 열까지. 악마와 악신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구석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바꾸려면 틈을 만들어야 했다.
“단순히 세력을 모으는 게 아니라 대륙에 불신을 심어 주는 것이 목표요. 세 세력이 서로 반목하여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분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악신의 계획이겠지.”
이대로 악신의 흔적을 지우고 리자드맨을 움직여 로만 왕국과 오크의 영역을 몰아친다면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악신을 핑계로 세력을 넓히는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이것이 뱀신 모르나나 연맹의 뜻은 아닐까 의혹이 생겨나겠지.
비록 일행이 각자 신뢰의 연합과 피의 동맹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세력 모두를 완벽하게 설득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약간의 의심은 불신이 되어 반목으로 향하게 될 터였다.
“이런 일이 이곳에서만 벌어지지는 않겠지. 대륙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겠군.”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와 악신의 수를 어찌 막아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불신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이었다. 본디 절친한 사이라도 누군가 작정하고 이간질을 하고자 하면 흔들리는 것이 세상 이치였다. 수백, 수천 년을 넘게 치고받고 싸워 온 자들 사이에 불신을 심어 놓는 것은 간단한 일이겠지.
“이게 악신의 짓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찾아야겠구먼. 숨어 있는 악신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내야겠어.”
“그 수밖에 없소.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일이야 어찌 마무리한다고 해도 다른 곳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일행은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보다 더욱 과감하게 적진 깊숙한 곳을 훑어보기로 했다.
테잔이 일행을 숲의 기운으로 감싸고 이레인이 엘프 특유의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이끌었다. 아이반은 까마귀 정령과 늑대 정령이 전해주는 정보를 분석하며 일행이 움직인 흔적을 지웠다.
“…여기서부터 변화가 있기는 하구먼. 감시가 아주 촘촘해.”
테잔이 슬쩍 지팡이를 움직이자 앞에 펼쳐진 결계가 시각화되어 잠시 눈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꽤 수준이 높은 결계라네. 제대로 숲에 동화되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야.”
“형태가 낯선 것 같은데, 혹시 이것도 마녀의 솜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