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5
“알 수 없지. 확실한 악신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아. 하지만 마녀 역시 오래된 자들이니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수법은 몇이나 있겠지.”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수준 높은 결계를 만들 수 있는 리자드맨 술사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또한 리자드맨이 사용하는 술법에는 어쩔 수 없이 뱀신 모르나의 권능이 엮여있는데 이건 전혀 계통이 달라 보이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레인이 주변에 머무는 정령들을 불러 확인해보았으나 이 결계를 펼친 자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제법 꼼꼼하게 모습을 숨긴 모양이다.
“더 들어가면 들킬 거야. 어떻게 할래?”
이레인의 물음에 아이반은 어두운 용의 발톱을 뽑아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무슨 맛인지 찍어 먹어는 봐야 하지 않겠소?”
웬만하면 충돌을 피하고 싶었으나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서야 반응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다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만한 술사의 영역에서 싸울 수는 없어.”
“틈을 만들어야지. 저들을 밖으로 끌어내겠소.”
“어떻게?”
“이렇게.”
스읍-
한껏 숨을 들이켠 아이반이 단단히 발을 딛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의 몸 내부에 잠들어 있는 신성이 깨어나 호응하고 아스가르드의 신력이 흘러들어왔다.
장난의 신 로키, 세계 하나를 홀라당 잡아먹은 신격의 권능을 끌어와 화끈한 불장난을 시작했다.
화르륵!
결계를 태우고 뻗어 나간 불길이 저 멀리 우뚝 솟은 나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으로 번졌다. 거대한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숲을 불태운다고?”
일행이 황당한 얼굴로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불을 지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자연의 화신인 대주술사와 숲의 요정이라는 엘프 앞에서 이리 당당하게 방화를 저지르다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 따끔한 눈빛에 아이반이 손에 불꽃을 휘감았다가 없애며 대답했다.
“로키의 권능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오. 겉으로는 커다란 산불처럼 보이지만 내가 힘을 거두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될 터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말하자면 지독하게 현실감이 가득한 환상이란 소리였다. 저걸 그대로 현실에 뒤집어씌우면 실제가 될 것이고, 농담처럼 웃어넘기면 거짓이 될 터였다.
“흠, 그 말을 듣고 보니 약간의 이질감이 있긴 하구먼.”
갑자기 불을 지른다는 황당한 행동에 깜짝 놀랐으나 자세히 살피니 아주 조그마한 위화감이 있었다. 대주술사와 무녀의 가능성을 깨운 엘프의 눈을 속일 정도니 웬만해서는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하긴 세상을 속여 넘기는 장난의 신 로키의 권능이었다. 초월자와 싸울 때도 일순간 적의 눈을 속이고 빈틈을 만들 정도였으니 쉽게 알아차린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타닥타닥!
어쨌든 신력을 듬뿍 머금은 로키의 불길이 숲을 잡아먹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산불이나 다름없으니 리자드맨들이 당황해서 뛰쳐나왔다.
몇몇은 양동이로 물을 퍼와 뿌렸지만, 산불이 그런 정도로 꺼질 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누군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휘이잉-
숲에 숨겨져 있던 술식이 떠오르고 마력이 솟아났다. 날씨를 뒤바꾸고 먹구름을 불러와 비를 뿌렸다.
쏴아아-
로키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불길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넘실거렸다. 결계의 주인은 이것이 평범한 불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경계하며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선을 끈 일행은 한껏 기척을 숨기고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몰아치는 열기와 불어오는 연기, 쏟아지는 빗물이 뒤섞여 리자드맨의 예민한 감각을 차단했다.
갑작스러운 산불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중이니 파고들 틈은 많았다. 결계를 펼친 술사도 설마 이런 순간에 그들을 정확히 잡아내지는 못하리라.
혼란을 이용해 영역 깊숙이 들어간 일행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리자드맨들이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혼이 빠진 것 같아. 감정이나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왜 그렇지? 세뇌라도 당한 건가?’
멀리서 마을의 풍경을 확인한 일행은 더욱 의문스러워졌다. 리자드맨들의 행동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다들 비늘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데 신경 쓰지 않군. 아주 이상해.”
리자드맨은 무척이나 청결한 종족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하루 대부분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거나 비늘을 다듬는 것으로 보내는 자들.
밖을 돌아다니는 전사들은 그렇다 치고 마을에 있는 자들의 몸이 지저분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뭐 저런 걸 이상하다고 여기느냐 하겠지만 사나운 이빨과 몇 년이나 같이 여행을 다닌 일행은 그 사소한 점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욕탕을 한번 확인해 봐야겠소.”
리자드맨 마을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쯤 되는 큰 건물이 바로 대욕탕이었다. 형태를 살펴보면 발견하기는 어렵지가 않았다.
쥐 한 마리를 강제로 제압해 임시 사역마로 만든 아이반이 녀석을 대욕탕으로 보냈다. 녀석이 찍찍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은밀하게 마력으로 조종하며 쥐의 시야를 공유하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욕탕 안의 모습이 무척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는 보라색 점막으로 뒤덮인 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을 깨고 새로운 리자드맨이 눈을 떴다.
“…이곳에 평범한 리자드맨은 없군. 죄다 새롭게 만든 키메라요. 악신의 권능을 잘 받아들이도록 개조라도 거친 모양이지.”
하긴, 예전부터 마녀들이 부리는 사역마 중에는 온갖 종족의 몸을 뒤섞어 만든 키메라가 많이 있었다. 심지어 악마를 실험체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원래 이런 일이 있었나?’
아이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옛 기억을 더듬을 때 테잔이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들켰어! 빠져야 하네!”
쿵!
테잔이 지팡이를 내리찍자 바닥이 솟구쳐 오르며 벽이 되었다. 충격파가 흙벽을 후려쳐 먼지가 흩날렸다.
“내가 길을 열겠소. 일단 빠져나갑시다.”
멀리서 몰려드는 리자드맨과 요동치는 마력을 바라보며 아이반이 창을 내밀었다.
쾅!
218화 불멸을 무너뜨리는 방법
드래곤의 뼈와 아다만트로 만들어진 어두운 용의 발톱이 리자드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질긴 가죽과 비늘을 꿰뚫고 들어가 심장을 조각내고 뜨거운 피를 바닥에 뿌렸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최소한 하나의 목숨이 끊어진다. 쓰러지는 시체를 넘어 빠르게 달렸다.
리자드맨의 머리를 자르고 폭풍을 불러 멀찍이 날리면서 아이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묘한 차이만 아니면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겠는데.’
반응이 느리거나 어색하지도 않았다. 특별히 강하거나 질기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리자드맨을 쓰러뜨리고 지나가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리자드맨 부족을 장악하고 키메라로 만든 노력을 생각하면 뭔가 다를 법도 한데 아마 다른 이의 눈에 특별하게 보이는 것을 경계한 모양이다.
하긴, 이들이 정말로 리자드맨을 이용해 세력 갈등을 조장하려면 튀는 점을 없애야만 하겠지.
쿵!
테잔이 지팡이를 내리치자 바닥에서 칼날이 솟구쳐 리자드맨을 꿰뚫었다. 그 위로 이레인의 화살이 떨어져 적의 숨을 확실히 끊어 놓았다.
피우웅-
이레인이 활시위를 당기자 바람이 모여들어 화살을 휘감고 날아갔다. 한껏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리자드맨을 짓눌러 버리니 한쪽이 깨끗하게 변했다.
우웅-
멀리서 마력이 밀려들었으나 델피노가 방어막을 만들자 그에 막혀 돌아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파크를 만들며 깜짝 놀랄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했다.
‘뭐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묠니르를 쥐고 천둥신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토르!”
치지직!
쾅!
산불을 끄느라 몰려든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내리쳤다. 아이반은 그것을 묠니르로 이끌어 천둥의 힘을 한껏 담고서 대욕탕을 향해 집어 던졌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간 묠니르가 대욕탕을 후려쳤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 무너지며 번개가 내부를 지졌다.
파삭!
옅게 피어오르던 결계가 묠니르의 힘에 그대로 깨져나갔다. 안쪽에서 부화를 기다리고 있던 리자드맨 키메라가 그대로 타버리고 점막에 뒤덮인 알이 깨져서 녹색 진액을 흘렸다.
탁-
아이반이 다시 손을 뻗자 묠니르가 돌아왔다. 아직도 모자란다는 것처럼 잘게 떨리는 녀석을 애써 달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별 반응하지 않는다고? 주변에 그리 마력을 흩뿌려 놓고?’
치지직!
쾅!
아이반이 묠니르를 휘둘러 허공을 때리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번개가 쏘아졌다. 주변에 가득한 리자드맨들이 덜덜 떨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고기 익는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