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6
쉬익!
일행이 한창 적들을 쓰러뜨리다 영역의 경계까지 닿으니 사방에서 몰아치던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 행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름 끼치게 똑같아서 이제야 만들어진 녀석들처럼 보였다.
“인사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나중에 다시 보지.”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낸 아이반이 천둥걸음으로 나아가 길을 열었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번개와 맹렬한 속도를 충격파로 바꾸어 방패로 밀어내니 앞을 막아서는 녀석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를 따라 멀어지는 일행을 리자드맨들이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분노나 당황도 사라지고 그저 차갑기만 했다.
“분탕 치고 사라지는 것은 우리인데 오히려 기분이 찝찝하네요. 왜 이렇게 쉽게 보내주는 걸까요? 분명 힘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신성력을 내뿜어 일행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만들던 델피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추적을 포기한 듯 따라오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게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마지막에 그거, 보셨소?”
피와 살점이 가득한 방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면서 아이반이 묻자 테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자드맨 사이에서 몰아치는 정신파를 말한다면, 물론 보았네. 나보다는 이레인이 익숙하겠지만.”
바쁘게 화살을 쏘아 날리던 이레인이 자세를 풀면서 대답했다.
“그건 분명 정신 연결이야. 세계수 네트워크를 리자드맨을 통해 억지로 만든 것같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아.”
엘프의 정신 연결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들이 원래 정신체였다는 흔적이기도 했다. 정신체의 특성이 남아있는 엘프이기에 세계수 네트워크를 만들고도 멀쩡한 것이지 보통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몇 명의 정신을 잇는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의 정신을 연결한다면 보통은 자아를 잃어버리고 정신이 무너진다.
서로 페로몬과 미약한 정신감응으로 서로 동조할 수 있는 나가마저 그렇게 정신을 묶으니 광기가 스며들어 뱀신 모르나가 오래도록 고생하지 않았던가.
“리자드맨을 키메라로 만들면서 억지로 정신을 묶은 모양이군.”
“아마도 그렇겠지. 겉으로 보이는 특이점이 없기에 과한 정성이라 생각했더니 그쪽을 개조했네.”
전투에 사용되는 표면적인 부분은 내버려두고 정신을 밀어 버린 후 그것을 억지로 묶었다. 본래의 기억, 문화와 습관은 전부 지우니 일상적인 생활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결국, 모든 리자드맨 키메라는 단말에 불과하고 핵심이 되는 부분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러면 리자드맨이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 개조한다고 해서 그걸 감당할 수가 있나?”
십만에 달하는 리자드맨이 전부 이런 식이라면 수명이 길지 못할 거다. 뇌가 타버리거나 영혼이 갈려 버릴 테니까.
자아가 없는 영혼은 무척이나 연약한 존재였다. 타고나기를 정신체로 타고난 자가 아니라면 육신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그 모두가 영혼과 떨어져 완전할 수도 없었다.
즉, 저들은 전장에서 스러지지 않는다 해도 시한부 삶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소모품처럼 쓰이는 것이다.
“이상하군. 그저 도구로 쓰자면 적당히 세뇌하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굳이 개조를 거쳐서 정신을 묶는다고? 그게 불안한 것임을 알면서? 나는 영 이해할 수가 없구먼.”
테잔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할 수 없는 적의 행동이란 언제나 최악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불안감만 생길 수밖에 없었다.
“뱀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많아졌군.”
일행은 다시금 뱀신을 향해 움직였다. 어째 적진을 헤집을 때보다 발걸음이 더욱 무겁기만 했다.
* * *
출발할 때는 차가운 겨울비 속에서도 당당했으나 돌아올 때는 화창한 햇볕 속에서도 찝찝하기만 했다.
그동안 일행은 항상 적들의 계획 앞에 있거나, 적어도 아주 늦지 않게 반응하며 움직였다. 대악마가 소환되고 악신이 풀려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을지언정 바로 그 자리에서 지켜볼 수는 있었다.
힘이 부족해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는 있었으나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몰라 방황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이 딱 그러했다.
어딘가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다. 적들의 손아귀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적을 찢고 불태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표정이 영 좋지 못하구나. 당당한 영웅의 모습은 어디 가고 비루한 눈빛이냐?”
뱀신의 제단 가장 깊은 곳에서 뱀신 모르나가 요사스럽게 웃으며 일행을 반겼다. 나가와 리자드맨이 바친 황금과 보석을 몸에 두르고 사뿐하게 걸어왔다.
“여유로우시군. 사나운 이빨과 사브리나는 어디에 있소?”
“대전사는 스스로 가진 힘을 갈무리하는 중이다. 화염 드래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노라.”
그녀는 신발로 신지 않은 발로 부드럽게 땅을 딛고 빙글 돌았다. 오랜만에 가진 육신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동안 신도의 몸을 뺏어서 활동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적합도가 높다고 해도 필멸자의 육신은 신격을 담기에 부족하기만 했다. 항상 갑갑한 감옥처럼 느껴졌겠지.
“저들이 리자드맨을 개조해 정신을 묶었더군. 알고 있었소?”
“한때는 나를 따르던 녀석들이다. 내가 그걸 몰랐겠느냐?”
“알았는데 언질도 없다니, 괜한 고생을 했군.”
“잡스러운 수작이야 당연하지.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이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악신이니라.”
뱀신 모르나는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비틀린 악의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 세상을 부정하는 악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떠한 자인지는 모르겠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악신들은 예전보다 더욱 비틀린 존재가 되었으니 섣불리 짐작하기가 어렵구나.”
고대 요정에 의해 탄생한 뱀신 모르나는 신격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 오래된 존재가 아니었다. 반면에 악신은 창세를 논할 만큼 아득한 기원을 지닌 자들도 있었으니 뱀신 모르나라 한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일단 리자드맨들을 움직여 저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막아 주시오. 의도를 제대로 모르니 저들을 쉽게 풀어줘서는 안 되오.”
“그야 아랫것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악신이 나타나는 것을 막겠노라. 설령 해와 달보다 오래된 자라 한들 차원 너머에 있으면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뭐, 그럴 수만 있다면 절반은 성공이겠지. 알았소.”
뱀신 모르나와 알현을 마친 일행은 리자드맨이 준비한 숙소에서 피로를 풀었다. 그 어떤 곳보다 잘 갖춰진 욕실에서 몸을 씻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각자 휴식을 취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반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휴식하던 일행이 하나둘씩 주위에 모여 그를 바라보았다.
“흠…….”
아이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를 풀자 델피노가 물었다.
“무엇이 걸려 그리 고민하고 계십니까?”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웅-
아이반이 마력을 펼쳐 결계를 만들고는 뱀신 모르나가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뱀신 모르나는 리자드맨의 상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소. 이유를 아시오?”
“그야 초월자에게 필멸자는 하찮은 존재이니 세세하게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사실 뱀신 모르나는 원래부터 상냥한 신격이 아니고.”
테잔의 말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악신의 계획도 결국은 초월자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오.”
필멸자의 시선이 아니라 신격의 시선으로, 그것도 악신의 상황을 고려하여.
“악신들이 강력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들만으로 세상을 부술 수는 없소. 그들을 묶고 있던 제한이 풀린 만큼 다른 신격을 억누르던 것도 사라졌으니까.”
본디 초월자가 육신을 지니고 지상에 머무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뱀신 모르나는 당당히 지상에 있었고, 검신 카락취는 승천하지 않았다.
지금도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다는 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턱없이 수월해진 상태였다.
악신들이 차원 너머 유폐 상태를 벗어나 이 땅에 돌아온다면 천상에 있는 신들 역시 지상에 강림할 수가 있었다.
“악신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스가르드의 신이 아니고, 육신을 가진 채 지상에 있는 뱀신 모르나도 검신 카락취도 아니오. 성황청의 아홉 신격이지.”
뱀신 모르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신 카락취를 낮춰보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수나 달의 여신 셀룬은 물론이고 오크투신 타르칸과 그린스킨의 조상신들이 모여 있다는 녹색 만신전도 대단했다.
그러나 악신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성황청의 아홉 신격이었다. 신화시대를 끝낸 대전쟁의 승리자들,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신격, 지금 시대의 주인.
아홉 신격이 인간만의 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힘도, 체력도, 재주도 다른 종족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이 없는 인간이 세상을 이끄는 주 종족이 되었다.
세상을 부수든 지배하든 악신과 악마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면 결국 가장 큰 적은 성황청의 아홉 신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시선을 돌려 생각해 보지. 악신이 무엇을 해야 하겠소?”
신격들은 필멸자를 아주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차원 방벽이 무너져 언제든지 본신의 힘을 지상에 펼칠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니 악신의 음모도 결국은 대륙의 세력 상황이니, 종족 갈등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신격을 향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엘프가 왜 정신을 연결해 세계수 네트워크를 만들었소?”
그들이 스스로 만든 종족신, 세계수의 신격을 품기 위해서.
“뱀신 모르나가 왜 나가의 정신을 연결했소?”
자신을 지상에 고정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악신이 리자드맨의 정신을 연결한 이유가 무엇이겠소?”
신격을 품기 위해서.
하지만 이미 차원 장벽이 무너지고 신화시대가 돌아왔다. 유폐도 풀렸으니 악신 역시 어렵지 않게 이 땅에 넘어올 수가 있었다. 굳이 육신을 버려가며 리자드맨의 정신에 존재를 욱여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면 어째서?
딱딱딱-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아이반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