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09
휘이잉!
사브리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이 조그마하게 보였다.
전장으로 향하는 길치고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작아져 하찮게만 느껴졌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니 지상의 모든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델피노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늘을 나는 것은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물론 테잔의 주술이 없었다면 조금 다른 감상을 뱉었을 터였다. 폭풍은 우습다는 듯 몰아치는 바람과 희박한 산소, 차가운 온도 때문에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을 테니까.
아예 구름을 뚫고 위로 올라간 사브리나는 하얀 구름을 융단처럼 밟고 악신의 영역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있을 때는 그저 흐릿하던 존재감이 점차 선명하게 느껴졌다.
쉬이익!
구름을 뚫고 쏘아진 마력이 사브리나를 노렸다. 사브리나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피하고 그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반투명한 결계가 악신의 영역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 리자드맨 키메라가 바글바글 기다리고 있었고, 마녀들 역시 사악한 술법을 준비 중이었다.
스으읍-
한껏 숨을 들이켠 사브리나가 불꽃을 내뱉었다. 용의 숨결. 가장 순수한 형태로 토해 내는 드래곤의 권능이 결계를 뒤흔들고 술법을 깨트렸다.
단 한 방에 악신의 결계를 부술 수 있는 것은 사브리나밖에 없었다. 용의 숨결이 아니라면 단번에 처리하기는 어려웠겠지.
탁!
여전히 웬만한 산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이반은 일어섰다. 그리고 사브리나의 등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던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며 창을 쏘아 날렸다.
쉬이익!
아이반의 손을 떠난 창이 마력을 연료로 삼아 폭격이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창이 열두 개나 땅을 헤집고 적을 공격했다. 그를 노린 술법을 역으로 파괴하고 술사의 몸을 터트렸다.
그러다 땅이 가까워지자 아이반은 폭풍을 불러와 속도를 줄였다. 폭풍신의 권능을 마치 날개처럼 펼치고 부드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그 위에 델피노가 불러낸 빛의 천사들이 날아다녔다. 마녀가 다급히 불러낸 비행 마물들이 빛의 천사에게 꿰뚫려 바닥에 처박혔다.
“우리의 세계가 조화롭기를.”
이레인이 팔라시온의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수많은 엘프가 전해 주는 막대한 마력이 그녀의 화살을 타고 뿜어졌다.
피우웅!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듯 날아간 화살이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그 조그만 화살이 뿌리를 내리고 순식간에 자라났다.
마치 하늘을 가릴 듯이 거대한 나무가 원래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세계수가 요정의 숲에서 이 땅에 투영된 것이다.
길게 찢어진 결계와 구멍 난 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 아이반은 하늘을 바라보다 소리쳤다.
“에인헤랴르! 나를 따르라!”
뿌우, 뿌우우-
긴 뿔피리 소리가 들리고 발할라의 문이 열렸다.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따라 신들의 전사가 달려왔다.
하늘에서 나타난 에인헤랴르가 적들의 몸을 찢고 불태우며 떨어져 내렸다. 아홉은 아흔아홉이 되었고, 그것이 또 천에 하나가 모자란 숫자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 아이반을 위해! 우리의 신을 위해!
221화 달의 맹세
에인헤랴르가 리자드맨 키메라를 쓰러뜨리고 길을 열었다. 아이반은 그들을 거느리고 적의 피로 바닥을 적시며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보다 쉽게 들어왔군.’
하긴, 악신도 설마 드래곤을 타고 단번에 침투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보자마자 바로 용의 숨결을 뱉어 결계를 뚫은 후 에인헤랴르와 빛의 천사를 소환해 습격하고, 세계수마저 이 땅에 불러왔으니 당황스럽겠지.
일행은 시작하자마자 필살기를 사용한 셈이었다. 아무리 악신이 음흉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단번에 반응할 수는 없었다.
슈우욱!
어두운 용의 발톱이 몇 배나 길어져 앞을 가로막은 적들의 가슴을 꿰뚫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에인헤랴르가 각자 신에게 받은 축복을 사용해 강하게 밀어붙였다.
키메라 리자드맨은 개조되었다고 특별히 전투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법 실력이 좋은 전사라고 해도 아이반이나 에인헤랴르의 앞을 막을 정도는 될 수 없었다.
‘어디지?’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빛나며 주변 공간을 훑었다. 키메라 리자드맨의 정신을 조정하는 핵이 분명 있을 텐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볼베르크(Bǫlverkr: 사악한 일을 하는 자).”
주변에 있는 키메라 리자드맨을 하나 붙잡아 마법을 사용했다. 마치 고문하듯 정신을 쥐어짜서 억지로 반응을 끌어냈다. 그리고 정신파의 흐름을 관찰했다.
키에에엑!
고통에 울부짖는 키메라 리자드맨의 목을 쥐어뜯은 아이반은 녀석을 집어 던지고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또 한 놈을 붙잡아 정신을 비틀었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키메라 리자드맨의 정신을 파괴한 아이반은 그때마다 흘러나오는 미묘한 정신파의 차이로 방향을 가늠했다.
아주 약간의 차이지만 핵에 가까울수록 반응이 빠르고 격렬했다. 완전히 감각에 의존하는 데다가 무척이나 정확성이 떨어지는 무식한 방법이지만 아이반은 핵이 있는 곳을 확신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화르륵!
웬만한 열기는 사우나처럼 즐길 수 있는 아이반의 숨이 답답해질 정도의 열기가 하늘을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날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불꽃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상쾌한 힘이 솟구쳐 올랐다. 세계수가 아군에게 축복을 내리고 적의 기운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초월자가 날뛰고 있으니 마침내 악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악신은 다른 차원의 어둠을 불러와 육신으로 삼았다. 마치 끓어오르는 검은 연기 같은 몸이었다.
사아아-
넘쳐흘러 바닥에 낮게 깔리는 검은 연기 때문인지 지독한 추위가 몰려왔다. 뼈를 얼리고 정신을 멈추는 차가운 냉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파사삭!
봄을 맞이하고 다시 생명을 꽃피우려던 초목들이 얼어붙어 깨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키메라 리자드맨마저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서 바닥에 쓰러졌다.
– 악신 헤르샤스, 혹한의 마신이 이곳에 있었구나!
한참이나 대지를 불태우던 사브리나가 악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정신파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지금 이 땅에 남은 드래곤은 거의 모두가 신화시대를 끝낸 대전쟁 이후에 태어난 존재였다. 그러나 드래곤은 날 때부터 오롯한 창조주의 화신이기에 종족의 옛 기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악신쯤 되는 존재라면 처음 본다 하여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악신 헤르샤스가 어떤 패악을 부렸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 화염 드래곤이라, 참으로 나약한 불길이로다.
악신 헤르샤스는 사브리나와 세계수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웠다. 그건 본인에 대한 지독한 확신이었다. 그 옛날 세계의 사 분의 일을 얼린 장본인이었으니까.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는 겨울의 주인이었다. 사계절 중 하나를 상징하는 대신격이자 창세 이후 최초의 질서를 만들었던 한 축이었다. 자연의 순환과 세상의 흐름을 조율하던 위대한 신격이었다.
태초의 겨울은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휴식의 계절이었다. 세상이 과열하지 않도록 식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세상을 조율하던 겨울의 권능은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그 자신의 마음마저 차갑게 얼렸고, 이내 모든 것이 얼어붙어 멈춰 버린 세상을 갈망하는 비틀린 악신으로 변했다.
겨울의 대신격 헤르샤스가 혹한의 마신이 되면서 겨울 또한 온갖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계절이 되었다.
휘이잉-
악신 헤르샤스가 손을 휘저으니 초인조차 새파랗게 질릴 추위가 몰아쳤다. 사브리나가 마력을 움직여 화염을 비처럼 뿌렸으나, 땅에 닿을 때는 차가운 바람이 되어 있었다.
파르르-
하늘을 가릴 듯이 솟아오른 세계수가 가지를 떨어 푸른 신력을 뿜어냈다. 상쾌한 숲의 기운이 추위를 몰아내고 파릇파릇한 새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막에서도 숲을 만들 수 있는 세계수의 권능마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땅을 뚫고 슬쩍 머리를 내밀던 새싹들이 이내 냉해에 휩쓸려 푸석하게 쓰러졌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와 세계수, 초월자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악신 헤르샤스가 밀어붙이는 꼴이었다.
차원 너머에 유폐되었던 악신들은 모두가 대단한 존재였으나 그중에서도 악신 헤르샤스는 거물이었다. 단순한 숫자 놀음으로 견주어 볼 상대가 아니었다.
완전하지 못한 드래곤과 요정의 숲 밖에서는 제힘을 낼 수가 없는 세계수로 쓰러뜨리기에는 악신 헤르샤스가 너무 강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군의 전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니, 또 다른 초월자가 박살이 난 결계를 뚫고 나타났다.
또각, 또각!
허공이 쩍 갈라지며 나타난 공간 너머에서 도도한 표정으로 뱀신 모르나가 걸어왔다. 짐짓 우아한 자태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집어 던지니, 웬 비쩍 마른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감히 썩어 문드러진 자들이 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으리라 여기느냐?”
전방에 파견된 마녀였다.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은밀하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임무였으나, 뱀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감히 맞설 수도 없었다.
아무리 마녀가 오래된 악신의 제사장이라고는 해도 신격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온전히 육신을 가지고 부활한 신격을 마주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으니, 전방에 파견된 마녀는 이미 뱀신 모르나의 손에 모두 정리되었다.
“난 겨울이 예전부터 싫었다. 이제야 내 손으로 쓰러뜨릴 수가 있겠구나.”
뱀신 모르나가 그리 말하며 권능을 사용했다. 그녀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뱀들이 악신 헤르샤스의 발을 타고 기어올랐다.
– 옛 요정도 내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거늘, 그 찌꺼기가 나를 우습게 보는군.
사사삿-
악신 헤르샤스의 몸을 휘감던 거대한 뱀들이 얼음 조각이 되어 갈라졌다. 그리고 몸을 한껏 부풀리자 하늘 위에 흐르던 구름이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