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1
꽤 괜찮은 활 솜씨였으나 거기까지였다. 아이반은 기초적인 궁술 이외의 스킬이 없어서 더 이상 활약할 여지가 없었다. 매번 화살을 사서 써야만 하는데, 화살의 값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라 궁술을 깊이 익힐 수가 없었다. 이제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스킬 포인트가 아까워서 배우지 않았고. 쿵! 콰광! 놈들이 끌고 온 공성무기가 성벽을 때린다. 마법사들이 그것을 불태웠으나 워낙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는 터라 썩 결과가 좋지 못했다. 일진일퇴, 밀고 밀리고.
오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놈들을 떨어트렸다.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고, 발로 후려차서 밀어내고. 많은 수가 채 성벽위에 발을 올려보지도 못하고 다시 떨어져 내렸으나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성벽 위로 녀석들이 하나 둘씩 올라온다.
“위험한데? 아직도 대기하고 있어야하오?”
“조금만 더.”
빌리의 말을 딱 잘라 끊은 지휘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를 움직였다. 펄펄 기름을 끓여서 아래로 쏟아 붓고 거기다 불을 붙여 진입을 막았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서 성벽 위에 올라온 녀석들을 처리했다.
아슬아슬하지만 꽤 짜임새가 있었다. 괜히 그동안 버틴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녀석이 나타나자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자! 강한 녀석은 없느냐! 하나같이 나약한 놈들이구나!”
부웅!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올라온 녀석이 커다란 도끼가 휘두르자 병사 몇 명이 단숨에 허리가 쪼개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벽조차도 일부분 부서져 내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 스피드. 발크룬이 사납게 웃자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그걸 굳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지휘관이 낮게 말했다.
“모두 준비하시오. 저 놈을 떨어뜨려 한쪽으로 밀어낼 테니. 다른 녀석들이 방해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겠소. 그 안에 처리해주시오.”
병사들이 한쪽으로 도망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녀석은 그들의 시체를 밟고 조금씩 움직였다. 그 모든 것이 의도된 희생, 계획된 죽음, 예상한 결과.
냉정하게 병사들을 미끼로 사용하면서 착실히 녀석을 한 곳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녀석을 따라붙으려던 놈들을 화살과 마법으로 견제하며 교묘히 고립시켰다.
” 희생이 심하군.”
아이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지휘관이 전장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저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될지 고귀한 희생이 될 지는 당신들에게 달렸소. 이제 된 것 같군. 전투를 시작하면 바로 끊어내겠소. 길게는 버틸 수가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를 하시오.”
지휘관의 신호를 받은 일행들이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피와 전투에 취한 발크룬이 본대와 거리를 벌려 한쪽 구석까지 다가오자 모두 무기를 굳게 쥐고 단번에 달려들었다. 쉬이익! 쿵! 기사들의 실드차지, 이어서 도발.
묵직한 녀석의 몸이 흔들렸다.
병사들을 노리던 녀석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바위도 단숨에 부서질 충격이었으나 녀석은 잠시 비틀거렸을 뿐 크게 타격을 입은 모습이 아니었다.
“흐하하! 이제야 조금 괜찮은 녀석들이 나타났구나!”
쾅! 녀석의 도끼질에 기사의 몸이 뒤로 밀려난다. 물소가 달려들어도 코웃음을 흘리며 흘려버렸을 기사의 얼굴이 굳었다. 쿵! 쿵! [천둥걸음!] [뇌룡참(雷龍斬)!] 단숨에 근처에 다가온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서로의 무기가 부딪히고 둘 다 표정이 변했다.
한쪽은 즐겁게, 한쪽은 심각하게.
‘무겁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검이 엉망이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의 축이 뒤틀리고 여기저기 금이 생겼다. 내구도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그대로 폐품으로 변했다.
아이반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리고 바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힘을 숨기고 나발이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듣보잡이라고 무시했는데 네임드는 네임드인 모양이다.
우웅-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손에 잡힌다. 봉인이 풀린 유니크 아이템, 성장형 무기의 힘이 아이반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힘이 강해진다.
속도가 빨라진다.
공격이 날카로워진다.
마력의 움직임이 경쾌해진다. 분명 동급에 비하면 성능이 좋지 않은 성장형 아이템이었지만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막대한 힘이 그의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신의 권능을 빌려서 강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무기를 바꿔들었을 뿐인데 그가 가진 육신의 성능자체가 크게 상승했다.
이게 아이템. 남들은 결코 느낄 수가 없는, 시스템을 통한 능력치의 강제적인 성장.
쉬이익! 캉!
“음?”
다시 부딪히고, 또 다시 발크룬의 표정이 변했다.
그저 재미있다는 것에서 조금 나아가 약간의 놀라움마저 담겼다.
“으윽!”
“젠장!”
마치 쓸데없는 것들을 치우듯 도끼를 휘둘렀다. 그것을 정면으로 막아낸 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렀고, 빌리는 가까스로 피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사이 녀석도 상처를 입었다. 옆에서 덮친 기사의 검이 녀석의 팔뚝을 베었고, 용병 하나가 등을 찔렀다. 그러나 놈의 팔뚝을 벤 기사는 팔이 날아갔고, 등을 찌른 용병은 걷어차여서 수십 미터나 날아가 정신을 잃었으니 이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윽
“흠.”
발크룬은 팔과 등에 생긴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볼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걸 만들어낸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인간 전사, 네놈의 이름은?”
씨부럴 놈. 싸우다가 갑자기 통성명이라니, 선보러 나온 것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가? 하여간 오크 새끼들은 마음에 들지가 않아.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이런 헛짓을 몹시 싫어했으나 천상의 신들은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이반, 아이반 에시르손.”
역시나 당당히 이름을 밝히자마자 몸속에서 짜릿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토르가 한껏 힘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무식하게 쌈박질밖에 모르는 천둥의 신이었다.
전사의 기개는 더럽게 좋아하네.
그런 당당함으로 오딘이 뒤통수 칠 때나 좀 말려보지.아이반이 사납게 표정을 찡그리자 그의 몸에서 강력한 힘이 터져 나왔다. 치직! 치지직! 한층 거센 기세로 뿜어지는 번개를 보며 발크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는 발크룬! 위대한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이며 너의 목숨을 앗아갈 남자다!”
그러시던가.
아이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 녀석은 오늘 죽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주룩주룩 크르릉!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고 하늘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천둥마저 울려 퍼졌다. 토르가 힘쓰기 딱 좋은 날이다.
“토르, 돼지새끼 한 마리 제물로 바치겠소.”
힐끗 하늘을 보며 낮게 중얼거린 아이반이 창을 들었다. 그리고 번개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솟구쳤다.
번쩍! 콰과광!
“으하하! 좋구나!”
아이반의 창을 도끼로 막아낸 발크룬이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 날카롭고 묵직한, 동시에 짜릿한 공격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렇게 밀려나서 자세가 흐트러진 순간 마법사가 외운 주문이 발동되고 마력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나타나 그의 팔다리를 붙잡아 묶었다. 그리고 그 사이 빌리가 끼어들어 발크룬의 허벅지를 베었다. 빌리의 검이 스치고 지나가자 피가 튀기고 상처가 쩍 벌어졌다.
“흐, 이러면 이제 제대로 움직이지 못 .”
“하찮은 것아. 네게는 관심이 없다.”
뚝! 뚜둑! 발크룬이 힘을 주기 시작하자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마력 사슬이 터져나갔다. 황소가 잡아당겨도 멀쩡할 텐데 녀석은 너무나 쉽게 끊어내고 있었다. 쾅! 단숨에 구속에서 벗어난 발크룬의 도끼가 빌리를 후려쳤다.
작은 방패를 부수고 갑옷마저 쪼개며 그를 멀리 날려버렸다. 다행히 빌리의 몸이 잘려나가지는 않았으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피를 뿜었다. 퍽!
“으윽!”
성벽에 부딪혀서 바닥을 구르는데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부상이었다.
그가 만만한 실력은 아닐 텐데 단 한방에 무력화가 되니 다들 긴장감에 표정이 굳었다.[실드차지!] [칼날바람!] [태산누르기!] [월광참!] 발크룬은 자신을 가격하는 공격은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했다.
등이 갈라지고, 다리가 베이고, 가슴이 찢어져도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렇게 발크룬이 방어를 포기한 채 달려들자 다른 이들은 버티지 못했다. 이미 셋이나 전투불능이 되어 나가떨어진 상태, 남은 이들 역시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앞을 든든히 버텨줘야 할 기사와 용병들이 그렇게 무너지니 하나 있던 마법사 역시 별달리 힘을 쓰지 못했다. 푸슉! 차르르! 그렇게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혼자 남은 아이반은 창을 회수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뭔 속셈이지?’ 손맛은 분명히 있었다. 녀석의 어깨를 꿰뚫고 피가 뿜어졌건만 어째 마음이 영 껄끄러웠다. 저렇게 큰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변을 정리한 이유가 뭐지? 저러고도 나를 이길 수가 있다는 뜻인가?
“흐, 이제야 싸울 맛이 나겠구나. 인간 전사.”
발크룬은 온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피를 잔뜩 흘리면서도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몸으로 싸울 수나 있을까? 금방 뒈질 것 같은데.”
그렇게 대꾸하면서 아이반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발크룬을 구하기 위해 적들이 밀려오고 병사와 기사들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틀림없이 이길 것 같은데, 주변 상황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더 이상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위험했다.
“어디를 보는가!”
그렇게 소리친 발크룬이 도끼를 휘둘렀다. 아이반은 그걸 걷어내면서 확신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힘이 약해져 있었다. 놈도 많이 지친 것이다.
“흐, 그 눈빛. 마음에 들지 않아.”
그때 발크룬의 눈이 붉게 변했다.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 여기저기 생겨났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아이반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광폭화? 광전사였군.”
단숨에 잃어버린 체력을 회복하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크게 상승하는 광전사의 대표적인 기술.
짧은 지속시간이 지나면 크게 약화되는 단점이 있지만 애초에 장기전으로 갈 수 없는 지금은 단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슈우욱! 쾅! 다시 한 번 둘이 맞부딪혔다. 욱신거리는 손목.
지쳐 쓰러지려던 녀석이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날뛰고 있었다. 치지직! 번개가 녀석의 몸을 때렸지만 이전과 달리 조금도 움찔하는 기색이 없었다. 광폭화 상태에서는 저항력이 크게 강해졌다.
쾅! 쩍! 녀석이 도끼를 내려치자 성벽의 일부가 부서졌다. 실로 파괴적인 힘. 정면에서 힘으로 맞상대해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순수하게 전사로서의 역량만 비교하면 아이반이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