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11
셀룬이 힘들게 획득한 신성의 상징을 굳이 달로 한 것은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리란 맹세였으니, 신격을 노예로 만드는 봉인 술식에도 그녀는 자신을 지킬 수가 있었다.
분명 힘은 깎여 나가고, 움직임은 느려졌지만 셀룬은 악신 헤르샤스의 앞에 당당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휘두르는 검에 한 점 미혹이 없으니 대신격이 붙잡은 사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셀룬이 아닌 그 어떤 초월자라도 이 봉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녀이기에 신격을 억누르는 지독한 봉인 술식 속에서도 싸울 수가 있었다.
쉬이익!
쏟아지는 얼음 창을 검으로 튕겨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어붙은 사슬이 그녀의 팔다리를 묶고 절그럭거렸지만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가장 위대한 고블린, 검신 카락취조차 신격을 획득한 것은 차원 방벽이 무너지고 난 뒤였다. 두꺼운 차원 방벽을 뚫고 스스로 신성을 쟁취한 옛 용사의 기백은 한때 세계의 순환에 관여했다는 대신격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쾅!
달빛이 창이 되어 악신 헤르샤스의 몸을 꿰뚫었다. 뱀신 모르나가 신조차 녹여 버릴 독기를 내뱉고, 세계수가 뿌리를 뻗어 휘감았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다시 한번 불꽃을 입에 물고 혹한의 마신에게 달려들었다.
초월자 셋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크게 밀리지 않던 악신 헤르샤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그라도 초월자 넷을 감당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설마, 신격을 봉인하는 술식이 제대로 먹히지 않으리라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화르륵!
악신 헤르샤스의 몸이 타오른다. 그 무엇도 얼려 버릴 냉기가 용의 숨결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혹한의 마신이 추위를 잃어버리고 한껏 쪼그라들었다.
“대신격의 끝도 초라하기 짝이 없구나!”
뱀신 모르나가 손을 휘저으니 거대한 뱀이 나타나 악신 헤르샤스를 깨물었다. 능히 세계에 구멍을 뚫을 만한 끔찍한 독이 흘러들어 갔다.
악신 헤르샤스가 몸부림을 쳤다. 신을 녹이는 독기에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초월자 넷의 합공으로 악신 헤르샤스가 패배하기 직전이었다. 모두가 승리를 떠올렸다.
그때 둘만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모두가 승리를 생각할 때 둘만이 패배를 걱정했다.
셀룬과 아이반. 과거와 현대의 용사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어. 이리 간단히 풀릴 리가 없어.’
그 누구라도 당연한 일이라 여길 것이다. 초월자가 넷이나 모여 공격하는데 악신이 어떻게 그걸 견디겠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적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함정을 역이용해 허를 찔렀으니 악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외칠 것이다.
그러나 셀룬과 아이반은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확신할 때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언제나 가장 최악보다 더욱 지독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스스슥-
악신의 영역이 꿈틀거렸다. 혹한의 마신이 공격받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힘을 뿌렸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바다와 강이 끓어오르고 산이 녹아내린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멈췄다. 고요하고 고요한 세상이었다.
영구동토, 얼어붙은 세계.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가 그토록 갈망하던 모든 것이 얼어서 멈춰 버린 세상.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불꽃을 머금은 그 상태로 하늘에 멈춰 섰다. 세계수가 휘날리던 잎마저 허공에 박제되고, 뱀신 모르나가 웃는 표정으로 굳었다. 달의 여신 셀룬은 검을 내밀던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
‘···역시 그냥 당할 리가 없지.’
온힘을 끌어올려 자신을 보호한 아이반은 겨우 눈동자만 돌려 위를 보았다. 초월자 넷을 압도하는 강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바람조차 얼어 버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세계 가장 높은 곳에서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의 대신격 헤르샤스. 세계의 사 분의 일을 얼린 혹한의 마신.
차갑게 굳어 버린 왕좌에 앉은 그는 끓어오르는 검은 연기의 형상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 시리고 차가운 얼음 거인의 모습이었다.
아이반은 그것이 악신 헤르샤스의 진체임을 알았다. 혹한의 마신은 자신의 신성을 이 고요하고 차가운 세계에 얼려두고 힘과 격을 담은 껍데기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초월자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초월자 셋과 동수를 이뤘다는 것에 경악했다.
‘과연 대신격이군. 이게 한때 세계의 사 분의 일을 얼렸다는 악신의 힘인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아이반은 점차 생각이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멈춰서 시간의 흐름마저 선명하지 못한 세계였으나, 그 지독한 추위가 육신을 얼리는 것으로 부족해 정신마저 얼리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다행히 악신 헤르샤스가 더 수를 쓰지는 않았다. 아마 이곳에서는 그 또한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 제약은 있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초월자 넷을 단번에 얼려 버렸는데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세계에서 정신마저 깜빡거렸다. 아이반이 이럴 정도니 초월자가 아닌 동료들은 이미 정신마저 굳어 버렸음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아이반의 정신도 얼어 버리겠지. 그렇게 영원히 이 세계에 남아 굳어 버린 상태로 있어야만 하겠지.
그때 아이반은 보았다. 사브리나가 머금은 불꽃이 아주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세계수의 잎이 커지고 있음을, 뱀신 모르나의 웃음이 짙어지고 있음을, 달의 여신 셀룬의 검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아이반도 힘을 끌어올렸다. 그를 얼어붙게 하는 지독한 추위와 고요한 세계에 맞서 반항했다.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하고 노력하니 한 줌도 되지 않는 기운이 반응했다. 멈춰 버린 손끝이 움찔했다.
‘오딘, 토르, 로키, 헤임달, 프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빌어먹을 아스가르드의 신들이여. 힘을 주시오! 얼어 버린 세계를 벗어날 힘을 주시오!’
한 방울의 기운이 메마른 몸을 적셨다. 뜨거운 불길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차갑게 굳어 버린 육신과 정신을 조금씩 녹였다.
모든 것이 차가운 서리 거인으로부터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이 뜨거운 화염 거인에게 세상이 불탔던 옛 세계의 신들이 아이반에게 힘을 전해 주었다.
우웅-
아무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던 몸에 따끔한 고통이 스며들었다. 아이반의 등에 빛의 문양이 조금씩 새겨졌다.
아주 느릿하게, 그러나 멈추거나 느려지지 않고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등에 새겨지는 문양뿐이라 아이반은 보지 않아도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굵고 깊은 뿌리와 튼튼한 줄기, 멀리 뻗어 나간 가지와 커다란 잎. 태초의 심연에서 자라나 아홉 세계를 지탱했던 위대한 나무, 위그드라실의 형상이었다.
아홉 세계의 후계자, 아스가르드의 화신.
아이반은 이 땅으로 건너온 아스가르드 신들이 품고 있던 힘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더없이 전능한 감각 속에서 세상을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휘이잉-
모든 것이 얼어붙어 고요한 세계에 바람이 불었다. 폭풍신의 권능이 얼어붙은 세계를 깨우고 변화를 알렸다.
스걱!
달의 여신 셀룬의 검이 세계를 갈랐다. 세계수의 기운이 차가운 겨울을 밀어내고 싱그러운 봄을 불렀다. 뱀신 모르나가 깔깔 웃으며 겨울잠에서 깨어나 움직였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머금었던 불꽃을 토해 내 얼어붙은 왕좌를 녹였다.
쾅!
자신의 신성을 대가로 얼어붙은 세계를 만들었던 악신 헤르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꿈꾸던 고요한 세계를 파괴한 적들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 너희의 모든 것은 얼어붙을 것이다!
폭력적인 냉기가 터져 나왔다. 초월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고 온갖 내성을 가진 아이반의 피부가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그 상태로 아이반은 창을 들어 올렸다. 서리 거인의 목을 베고 세계의 시작을 알렸던 폭풍신처럼 매섭게 덤벼들었다. 그의 등에 선명히 나타난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끝없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휘이잉-
주변에 가득한 냉기를 휘감은 폭풍이 솟구쳤다. 혹한의 마신을 노리고 폭풍이 쏟아졌다.
쾅!
악신 헤르샤스가 손을 내밀자 폭풍이 그대로 굳었다. 휘몰아치던 바람이 전진을 멈추고 오히려 아이반에게 밀려왔다.
그 앞에서 아이반은 침착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악신 헤르샤스를 노리고 마음으로 창을 찔렀다.
스걱!
궁니르의 권능으로 공간을 뛰어넘은 공격이 악신 헤르샤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륙만 겨우 긁은 공격에 이게 전부냐고 악신 헤르샤스가 비웃었으나, 아이반은 담담히 창을 움직일 뿐이었다.
원래 폭풍은 두 번 몰아치는 법이다.
쾅!
223화 세계가 기울다
등 뒤에서 폭풍이 몰아치자 악신 헤르샤스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네 초월자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뱀신이 석화의 마안으로 헤르샤스를 붙잡고, 사브리나의 초월적인 마법이 쏟아졌다. 달빛을 머금은 셀룬의 검이 혹한의 마신을 꿰뚫었다.
탕!
온몸이 얼음으로 이뤄진 거인의 육신에 금이 갔다.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몸이 초월자들의 공격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신 헤르샤스가 그냥 쓰러지지는 않았다. 영혼을 얼리고 세상을 박제하는 지독한 냉기가 스며들어 초월자들의 몸놀림이 점차 둔해졌다. 완전히 감각이 마비되어 손발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반응이 느려졌다.
사사삿-
세계수의 잎이 얼어붙어 깨져 나갔다. 가지 끝부터 비쩍 말라서 죽어 갔다. 뱀신 모르나를 붙잡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지독한 냉기로 얼음 속에 봉인했다. 태양처럼 뜨거운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의 마력을 얼리고 용의 피를 차갑게 식혔다.
셀룬은 둔해지는 몸을 이끌고 검을 들어 올렸다. 살갗을 베고 지나가는 냉혹한 바람에도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오로지 무력 하나로 필멸자를 벗어나 신격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 달의 여신이었다. 단순히 격만 따지자면 그녀보다 대단한 자들이 많았으나, 천상의 모든 신격을 통틀어도 그녀보다 싸움에 익숙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대신격 헤르샤스는 강했다. 세상의 멸망을 노래한 혹한의 마신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평생 강자와 싸워 온 그녀에게 강대한 적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쿵!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나 셀룬의 검을 막았다. 세계를 얼리고 멈출 정도의 권능이 달의 여신을 붙잡아 공격을 멈춰 세웠다.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냉기가 셀룬을 얼렸다. 피부 위에 서리가 내리고 머리카락이 얼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