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12
스스슥-
하지만 셀룬의 검은 조금씩 나아갔다. 너무나 두껍고 강인한 벽에 막혀 검 끝이 뭉개지고 부서져도, 온 힘을 다해 밀고 들어갔다.
칼날의 절반이 부서졌다. 남은 절반도 깨져나가 손잡이만 겨우 남았다. 그 상태가 되어서도 셀룬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만월이 반월이 되고, 또 보이지 않는 삭이 되어도 달은 사라지지 않으니 셀룬의 의지도 꺾이지 않았다.
스걱!
앞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벽이 갈라졌다. 모든 것이 멈춘 세계 너머로 셀룬의 의지가 전해졌다.
쾅!
악신 헤르샤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연한 표정이 일그러지고 얼어붙은 몸이 부서졌다.
– 나는 세계가 멈추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브리나가 용언을 내뱉었다. 창조주의 권능이 담긴 선언이 세계에 새겨지고, 세계는 기꺼이 자신의 창조주를 위해 움직였다.
우웅-
겨울의 대신격, 혹한의 마신이 가진 신성이 약해졌다. 세계가 스스로 거부하는 것으로 대신격의 위계가 낮아졌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나 홀로 이룰 수 있는 위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 달의 여신 셀룬이 힘을 모으자 악신 헤르샤스의 신성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끼릭, 끼리릭!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이 억지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이 흘러나왔다. 신체와 신성을 분리하여 얼어붙은 세계를 만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불완전성이 점차 커졌다. 악신 헤르샤스는 스스로 만든 불완전성에 먹혀서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묠니르!”
아이반이 소리쳐 부르자 파괴의 망치가 나타나 그의 손에 잡혔다.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으로부터 흘러나온 천둥신의 권능이 묠니르를 휘감고 격렬하게 요동쳤다.
폭풍처럼 날아간 아이반이 묠니르를 휘둘렀다. 무너지고 있는 얼어붙은 세계의 틈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치지직!
쾅!
툰드(Þundr), 천둥소리를 내는 자.
아이반은 번개에 둘러싸여 하얗게 달아오른 채 악신 헤르샤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천둥신이 수많은 서리 거인의 머리를 깨부순 것처럼, 그 역시 악신 헤르샤스의 머리를 깨부수기 위해 망치를 휘둘렀다.
지독한 냉기에 팔다리가 얼어붙다가 뜨거운 번개의 열기에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손끝과 발끝에 감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상태로 묠니르를 내리쳤다.
악신 헤르샤스의 머리가 뭉개졌다. 더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치지직!
쾅!
묠니르가 악신 헤르샤스의 육신을 깨부수고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몰아치는 번개가 혹한의 마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육신을 파괴했다.
부서진 육신 틈으로 삐죽 모습을 내미는 신성을 확인한 초월자들이 아껴 두었던 힘을 토해 냈다.
세계수가 마지막 힘으로 다른 이들을 축복했고,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의 용언이 세계와 신성의 연결을 끊었다.
뱀신 모르나가 불러낸 뱀이 날카로운 독니를 박아 넣고, 달의 여신 셀룬은 달빛을 검으로 삼아 휘두르니 헤르샤스의 신성이 그대로 조각났다.
초월자 넷이 공격하니 보호받지 못한 신성은 너무나 간단히 무너졌다. 악신 헤르샤스가 쌓아 올린 자잘한 파편으로 흩어졌다.
‘이겼다!’
아이반이 마침내 승리를 직감하고 미소를 지을 때, 누군가 그를 붙잡아 당겼다. 뒤로 밀쳐 내고 그 앞을 막아섰다. 방패를 들어 올리고 마력을 내뿜었다.
파아앗!
깨져버린 헤르샤스의 신성이 폭주를 시작했다. 신격의 위대한 정신조차 잃어버리고 무자비한 힘의 덩어리가 되어 그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화르륵!
불꽃의 날개가 한껏 펴졌다. 몰아치는 냉기에 꺾이고 흩날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으나 불꽃의 날개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앞을 지켰다.
“사나운 이빨!”
아이반이 소리치자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돌려 웃었다.
“어찌 한 번은 견뎠다.”
사나운 이빨의 몸 절반이 얼어 있었다. 그나마도 각성한 용의 심장과 델피노의 방어막이 아니었다면 더욱 끔찍한 모습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사나운 이빨은 혹한의 마신이 마지막에 뿜어낸 냉기를 막고도 살아남았다. 아이반을 지키고 당당히 서 있었다.
화르륵!
용의 심장이 더욱 강하게 불꽃을 토해냈다. 사나운 이빨의 전신이 불타오르는 듯 격렬한 마력에 휘감겼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지독한 상처가 아물었다. 얼어붙은 몸이 녹고, 죽어 버린 육신에 생기가 흘렀다.
극도로 강인한 생명력과 혹한의 마신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꽃.
완전히 용의 심장을 각성한 모양이었다. 드래곤의 권능만 없을 뿐, 그의 몸은 이미 용의 육신이나 다름없었다.
휘이잉-
육신과 정신이 무너져 방향성 없는 힘의 덩어리가 된 헤르샤스의 신성이 허공에서 마구 날뛰었다. 힘의 파동이 터져 나올 때마다 영혼까지 시린 냉기가 할퀴고 지나갔다.
이전보다 더욱 난폭했으나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기에 초월자들이 나서자 금방 진정되었다.
아이반은 악신 헤르샤스의 신성의 파편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파편은 그대로 녹아들 듯 세상에 흡수되어 무너지는 세계와 함께 사라졌다.
얼어붙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박제해 얼려 버린 신성이기에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악신 헤르샤스가 만든 세계가 무너지면서 헤르샤스의 신성도 그곳에 묻혔다.
탁!
얼어붙은 세계가 사라지고 일행은 모두 밖으로 튕겨 나왔다. 시리다는 감각조차 사라지는 지독한 세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니 그제야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음!”
다리에 힘이 풀린 아이반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한 척을 할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사지 멀쩡히 달려 있으니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부상이 심각했다. 근육과 핏줄이 얼어붙었다가 녹기를 반복해서 내부는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위그드라실의 문양에서 흘러나오는 신성과 끊임없이 솟구치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옛날 옛적에 쓰러졌으리라.
청춘의 여신 이둔의 신력이 흘러와 아이반의 몸을 회복했다. 그러나 몸속에 스며든 악신 헤르샤스의 신력 탓에 그가 다시 일어나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악신의 함정을 역이용하고 초월자가 넷이나 함께했어. 가호를 내린 신격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 그런데도 패배할 뻔했다니, 악신 헤르샤스는 정말 터무니없이 강한 적이었어.”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무척이나 지친 표정으로 걸어와 아이반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연의 화신이기에 끝이 없이 흘러나오던 막대한 주력이 바닥을 보이고 몇 번이나 피를 토한 흔적이 가득했다.
신을 봉인하는 술식을 비틀어 달의 여신 셀룬을 소환하고 초월자도 얼어붙는 지독한 세계에서 동료를 보호하는 것은 대주술사도 버거운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그런 노력 덕분에 동료들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독한 동상에 팔다리를 잘라 내고 죽은 살점을 도려내더라도 살아있기만 하면 신성력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일단 죽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적진에서 누워 있었지만, 그들에게 덤벼드는 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녀와 사역마는 봉인 술식을 빼앗으며 일찍이 모두 처리했고, 키메라 리자드맨은 모두 달의 여신 셀룬을 소환하기 위한 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격이 맞부딪히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적은 없었다. 흘러나오는 힘의 파편만으로 격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죄다 쓸려 나갔다.
“악신이 둘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진짜 하나 더 있었으면 전부 뒈질 뻔했군.”
아이반이 헛웃음을 흘리며 핏덩이를 뱉었다. 검은 피를 한 주먹 토해 내고 나니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느 때나 확신은 금물이로다. 언제나 상상하는 최악보다 더욱 지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니.”
초월적인 존재감을 지운 달의 여신 셀룬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용사였기에, 그렇기에 아이반이 경험하는 모든 일을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영웅이란 지독한 불행의 집합체였다. 언제나 최악의 사건을 찾아 움직이고, 그리하여 영광을 쟁취해도 결국 손에 쥐는 것 하나 없이 허무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행운을 기대한다면 최악을 피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고, 영광을 바란다면 오욕을 감수할 용기를 준비하라. 그것이 그대가 걷는 길이니라.”
“그건 당신의 경험담이오?”
아이반의 물음에 셀룬은 부인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러하겠지.”
영웅은 사라져야만 영웅이다. 살아남은 영웅이 대접받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달의 여신 셀룬은 그걸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나, 그렇게 잊혔거늘.
“그나저나 지상의 공기는 마실 만하오? 오랜만에 내려온 소감은 어떻소?”
“여전히 피비린내가 나는 곳이구나. 그래서 외면할 수가 없노라.”
그 말에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뱀신 모르나가 코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참으로 상냥한 여신이로군. 자신을 배신한 권속도 용서하고,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는 말에 대뜸 지상에 내려오다니.”
내용은 칭찬이었으나 말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둘은 성향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달의 여신 셀룬이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살아간다면 뱀신 모르나는 오로지 즐거움과 흥미를 위해 움직였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때 모두가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초월자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으며, 뒤이어 테잔과 아이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온몸이 욱신거렸으나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고 긴장감이 느껴졌다. 방금 세상이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그게 뭐였지? 무엇이오?”
그 말에 뱀신 모르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