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13
“세상의 법칙이 흔들렸다. 누군가 질서를 뒤흔들고 있구나. 신격이 서로의 신성을 걸고 싸우는 중이다. 이 정도 흔들림이면 아홉 신격 중의 하나인 것 같은데······.”
아이반이 델피노를 바라보자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물의 주, 뤼안께서 절반의 권능을 잃으셨습니다.”
224화 바다의 민족
성황청이 모시는 아홉 신격은 현재 대륙에서 가장 숭배받는 대신격이었다. 신화시대를 끝낸 대전쟁의 승리자이자 신화시대 이후의 질서를 만든 위대한 이들이었다.
그중 하나의 축이 무너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홉 신격의 하나가 힘을 잃어버렸다니, 세상의 균형이 휘청거릴 일이었다.
“뤼안이 절반의 권능을 잃다니, 도대체 누가 그러했단 말이오?”
아홉 신격은 절대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해도 허무하게 밀릴 리가 없었다.
정보가 필요했다.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일행은 뱀신의 제단으로 돌아가 몸을 회복하면서 요동치는 대륙 정세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욱 좋지 못하구먼. 여기저기 난리가 났어.”
대륙 남부에서는 다시 한번 마계의 문이 열렸다고 했다. 온갖 고위 악마가 쏟아지고 새로운 대악마의 흔적마저 보인다고 했다.
동쪽은 오래된 괴물이 나타나 시끄러웠고, 서쪽은 바다가 분노하였다. 물의 신 뤼안이 권능을 잃어버린 것도 서쪽이었다.
“동시에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났어. 그중 몇몇은 눈을 가리기 위한 수작이었고, 몇몇은 너무나 치명적인 공격이구먼.”
악신 헤르샤스는 그저 함정으로 쓰고 버리기엔 너무나 거물이었으나, 결론적으로 일행이 이곳에 잡혀 있는 사이에 대륙의 균형이 무너졌다. 물의 신 뤼안이 절반의 권능을 잃어버렸으니 적들은 더욱 거칠게 날뛸 것이고, 아군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의 신 뤼안을 꺾은 것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물론 뤼안은 대신격이며 천상의 아홉 기둥 중 하나지만,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가 평범한 자는 아니잖아.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적이 약해진 셈 아닌가?”
악신 헤르샤스는 쓰러졌고, 물의 신 뤼안은 절반의 권능을 잃었을지언정 여전히 천상에 남아있었다. 뤼안의 권능을 빼앗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적들이 무조건 이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레인이 그리 말하자 테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초월자들의 계산은 필멸자의 시선과는 전혀 다르다네. 손익은 그리 따지는 것이 아니야.”
비록 악신 헤르샤스가 쓰러졌지만, 그는 불멸자이기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결국 부활할 터였다. 반면에 신성을 걸고 싸우다가 빼앗긴 권능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싸워서 되찾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아홉 신격은 이전 대전쟁의 승리자로서 세계 주권을 가지고 있지. 보통의 초월자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네.”
초월자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세계의 법칙에 닿으면 도달할 수 있었다. 신격은 자신의 존재를 세계의 법칙에 새겨 넣어야만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다루는 영역 내에서는 세계의 법칙조차 능가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았다.
이 세상을 만든 것은 태초의 드래곤이며, 그 위대한 창조주의 권능을 이어받은 것이 현대의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초월자의 권능은 세계를 움직일 수 있었으나, 그중 가장 높은 권한이 바로 드래곤의 용언이었다. 창조주가 세계에 내리는 정당한 명령.
“대전쟁 당시 세상을 파괴하는 악마와 악신과 싸우면서 드래곤은 보상으로 그 창조주의 권한을 내걸었지. 오로지 창조주의 화신인 드래곤만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동맹의 대가로 내놓았어.”
그게 세계 주권이었다. 말 한마디로 세계를 복종시키고 법칙을 뒤흔들 수 있는 창조주의 명령권.
그리고 대전쟁이 끝나고 승리자인 아홉 신격이 그걸 나눠 가졌다고 했다. 세계의 주인을 상징하는 위대한 징표를 얻은 것이다.
“아홉 신격은 이미 자신의 권능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대신격이고, 동시에 천상의 지배자이기에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지. 하지만 그게 적의 손에 넘어가면 더없이 튼튼한 방패가 되겠지.”
이미 일행은 사브리나의 용언으로 악신의 신격을 억누른 적이 있었다. 일시적으로 세계에 명령해 신성을 지우거나 격을 떨어뜨려 위대한 초월자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그러나 세계 주권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면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세계를 조율하는 드래곤의 가장 커다란 힘이 막히는 것이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이런 미래를 예견하였거늘, 끝까지 세계 주권을 달라 외치더니 결국 제대로 지키지도 못해 일을 그르치는구나!”
사브리나의 말을 들은 아이반은 드래곤이 세계 주권을 건네준 것이 드래곤의 의지가 아니라 아홉 신격의 요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악신이 다른 차원으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홉 신격이라고 섬뜩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단순히 힘만 보자면 아홉 신격이 밀릴 리가 없지만 드래곤은 창조주의 화신이었다. 이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싸운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한 보험이었으리라. 그게 돌고 돌아 이렇게 목을 조를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물의 신 뤼안의 권능을 가져간 것은 깊은 바다의 폭군이야. 옛 서쪽 바다의 신이 다시 자기 자리를 되찾은 셈이군.”
테잔은 그리 말했지만, 그 누구도 깊은 바다의 폭군 홀로 그랬으리라 믿지 않았다. 분명 또 다른 악신이 뒤에 있었다. 그것도 물의 신 뤼안을 제압해 권능을 강탈할 정도로 위험하고 강한 존재가.
“어찌 되었든 물의 권능을 빼앗긴 것은 치명적이오. 바다를 잃어버리면 너무나 불리하지.”
아이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 바로 출발하겠소. 제대로 쉴 시간이 없군.”
* * *
아이반은 자신의 방에서 눈을 감고 마력을 움직였다. 온몸을 할퀴고 간 악신 헤르샤스의 기운을 몰아내고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웅-
그의 등 뒤에 무성한 잎을 활짝 펼치고 있는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떠올랐다. 아이반이 쥐고 있던 사과가 황금으로 물들고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가 가득 번졌다.
아삭!
아이반이 황금 사과를 깨물자 천상의 과일다운 환상적인 맛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달면서도 질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큼하면서도 시리지 않았다.
스르륵-
사과의 과즙이 목구멍을 넘어서 온몸에 퍼졌다. 따끔따끔한 감각과 함께 피로가 풀리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청춘의 여신 이둔의 권능을 담은 사과였다. 노르드 신화에서 신격의 젊음을 유지할 정도의 생명력이 담긴 과일이 아이반의 육신을 치유했다.
아삭, 아삭!
무표정하게 사과를 씹어 먹던 아이반은 힐끔 앞을 보고는 물었다.
“위에서 지켜보기만 하니 답답하신가? 어쩐 일로 지상까지 왕림하셨소?”
그 말에 물푸레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대답했다.
– 어찌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느냐?
“그러면 등에 억지로 나무를 심었다고 내가 금방 넘어갈 거라 여겼소?”
– 시기의 차이일 뿐, 결국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은 잘하는군. 날름 받아들였으면 자격이 부족하다고 내쫓았을 거면서.”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지금도 그에게 속삭였다. 옛 세계의 비통함과 그의 의무에 대해 떠들었다.
아스가르드의 화신, 아홉 세계의 후계자.
어찌되었든 이 힘을 쓰고 있는 이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딘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사실 이쯤 왔으면 모른 척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라그나로크에서는 제림니르 고기가 많이 남았다던가. 상관없었다. 자신도, 자신의 동료들도 제법 대식가니까.
“자리나 잘 닦아 놓으시오. 조만간 내가 찾아갈 테니까.”
도발적인 아이반의 말에 오딘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억도 나지 않는 세월을 넘어서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 발할라의 문이 활짝 열릴 날이 머지않았구나.
오딘이 떠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이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장이 기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노르드 전사가 다 되었군.’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 * *
온갖 종족과 문화가 뒤섞여 살아가는 서부 연합 왕국은 그 어느 곳보다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수인이나 리자드맨, 가끔은 오크나 트롤도 볼 수 있었다.
세력권으로 따지자면 서부 연합 왕국 역시 신뢰의 연합에 속했으나, 다종족 국가이기에 피의 동맹과 전쟁을 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인간 중심적 나라인 마리난 제국과는 원래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대륙 남부를 침공한 악마 사태에도 물자 지원이나 조금 했을 뿐 몸을 사렸다.
덕분에 비교적 전력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던전이 터져나가고 몬스터들이 날뛰긴 해도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군. 이제는 이곳도 멀쩡하지는 못해.’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륙 서쪽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 도시라는 가스핀의 모습이 너무나 지독했다.
아름답던 해변은 온갖 쓰레기로 뒤덮였고,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던 상점가는 무너져서 돌무더기밖에 없었다. 드물지 않게 썩어가는 시체가 보였다.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같은 장소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번에 쓸려갔군. 바다가 분노했어.”
지금은 잠잠했으나 그때는 성벽보다 높은 해일이 밀려왔다고 했다. 방파제를 우습게 넘어서 해안을 휩쓸고 돌아갔다는데, 이곳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부 해안가가 무너졌다고 했다.
당연히 평범한 자연재해는 아니었다. 깊은 바다의 폭군과 물의 신 뤼안이 싸운 여파였다.
“수없이 많은 언데드 무리 속에서도 싸울 수 있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지만 넘치는 바다를 막을 수는 없었소. 수많은 자가 도망치지도 못하고 기도만 하다가 죽었지.”
안내를 맡은 서부 연합 왕국의 기사 하나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항거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란 그리도 컸다. 필멸자란 신격이 싸우는 여파에도 휩쓸려 나갈 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