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18
서부 연합 왕국의 오래된 명장, 카시우스 시렌트 제독은 바짝 얼어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저리 굳어 있어서야 어찌 적과 싸우겠나? 병사들에게 브랜디 한 잔씩 돌려라.”
원래 브랜디는 와인을 증류해 만드는 것이기에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다. 병사들에게 함부로 뿌릴 물건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신을 상대하러 가는 중이기에 모든 것이 고급품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바다가 봉쇄된 이후로 본토의 식량 사정이 여의치 못하지만, 이들이 희망이었으니 보급품에서 최대한의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카시우스 제독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브랜디를 한 잔씩 들이켰다. 호화스럽게도 약간의 치즈와 싱싱한 과일도 제공되었다.
선원들은 대체로 술이 강해서 술독에 얼굴을 박고 마셔도 취하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겨우 한잔 술로는 아쉽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싸우러 가는 길이었다. 만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쓰읍, 딱 한 잔만 더 마셨으면 좋겠는데······.”
누가 그리 중얼거리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는 껄껄 웃었다. 어쨌든 술이 한잔 돌고 나니 잔뜩 얼어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너무 긴장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한편 노르드 전사들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서 빨리 싸우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 같기도 했다.
“신과 싸운다니, 벌써 몸이 저릿저릿하군.”
“살면서 이런 기회가 있다니, 꿈만 같아.”
원래부터 전투적인 자들이었으나 아이반이 직접 발할라 입성을 약속했고 심지어 그곳의 풍경마저 눈으로 확인했으니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생일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릴 뿐이다.
여기저기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신과 싸우는 게 사실 별거 아니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투철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성황청의 사제들마저 노르드 전사들의 태도에 감탄했다.
“실로 용맹한 자들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노르드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많지 않은데, 그 또한 모두 저의 좁은 식견 탓이었군요.”
어느 사제의 말에 델피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것이라도 보는 방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하나의 방향으로 평생 바라보고 있었다면 몰랐을 것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물의 신 뤼안의 축복 중에는 뱃멀미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있었다. 겨우 멀쩡한 모습이 된 델피노는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흘깃 뒤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반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달의 여신 셀룬과 아이반은 정신세계에서 끊임없이 단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셀룬은 아이반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그가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힘에 익숙해지고 정리되지 않은 격을 바로 세웠다. 아이반이 거대한 그릇이 되고자 했으니 셀룬은 이전보다 더욱 엄하게 지도했다.
여느 필멸자라면 벌써 정신부터 크게 지쳐서 무너졌겠지만 둘은 그런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달의 여신 셀룬은 아예 신격이었으며, 아이반 역시 반은 초월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강철과 같은 정신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졌다. 오히려 성장하는 환희에 피로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이반이 며칠 만에 정신세계를 빠져나와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달리 보였다.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가볍게 흘리던 것이 모두 선명하게 다가왔고, 의미 없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사실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마력이 더욱 정순해지거나 새로운 힘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들을 되돌아보고 차분히 정리하는 것만으로 아이반은 한층 강해졌다. 무엇이 변했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지만, 뭔가 중심이 생긴 느낌이었다.
“그대가 품고 있는 것이 실로 광활하다. 세계의 그릇이 되겠다는 말이 그저 오만한 말인 줄 알았으나 인제 보니 헛된 것이 아니었노라.”
셀룬이 감탄하며 뱉은 말에 아이반이 덤덤히 대꾸했다.
“나는 세상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소.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본디 그런 존재이니.”
시스템, 경험치, 스킬 포인트.
다른 이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사실 이제는 아이반도 깜빡깜빡할 정도니까.
그러나 아이반은 더 높은 격에 이를수록 그것이 아예 낯선 힘이 아니라 이 세계에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흐름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운명의 특이점. 신들조차 얽매이는 그 지독한 것에서 자유로운 이유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가 바라고 바란 것이었음을 느꼈다.
멸망을 직감한 세상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러온 것이 자신이 아닐까. 아이반은 어렴풋이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로 민폐였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납치해 던져 놓다니 이 무슨 행패인가.
그러나 한때 증오하고 원망하던 이 세계가 어느새 자신의 터전이 되었으니, 아이반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대의니 세계 평화니, 대륙의 질서니 하는 말들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외면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삶이었다.
“···어릴 때는 영웅이 대단해 보였고, 커서는 영웅이 한심해 보였소. 그런데 겪어 보니 대단할 것도 없고, 한심할 것도 없더군. 그저 살다 보니 그리되는 것이었소.”
아이반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같은 처지였기에 셀룬은 그 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일이나,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고,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
누군가는 해야 했다. 그걸 하는 사람이 영웅일 뿐이다. 남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둘은 그것을 알았다.
태어나기를 영웅으로 태어난 자는 없었다. 살아가기를 영웅으로 살아간 자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불릴 뿐이었다.
옛 영웅와 현재의 영웅이 서로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깊은 바다의 폭군이 지배하는 영역에 들어왔다. 그저 뤼안의 가호로 안전히 항해할 수 있는 순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아이반이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폭풍이 몰아칠 듯 꿈틀거리는 날씨와 거칠어진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항로는 없나? 확인해!”
모든 함선이 바빠졌다. 연락용 수정 구슬로 서로 통신을 주고받으며 어찌 움직여야 할지 결정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돌아가면 한참이고, 바다 괴수의 서식지를 몇이나 건너야 하오. 여기가 가장 안전한 항로였소.”
카시우스 제독에게서 그런 대답이 돌아오자 테잔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돌아갔어도 달라질 건 없다네. 이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해신의 권능이니 바다 위에서는 피할 수가 없지.”
그의 말에 아이반이 동의했다. 사브리나와 셀룬 역시 그런 생각이었다. 이걸 뚫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항로는 수정하지 않겠소. 폭풍을 뚫고 가지.”
“모두 전투 준비를 하라 하시오.”
아이반의 말에 잠깐 침묵하던 카시우스 제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인생 최고의 전투가 되겠군. 알겠소.”
방향은 바꾸지 않았다. 오십 척에 가까운 선단은 오히려 속도를 높여 폭풍으로 향했다. 거친 파도를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흐르는 물의 평온과 삶의 축복을,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생명력을 주소서.”
뤼안 교단의 사제들이 기도 소리를 높였다. 푸른 신성력이 배를 감싸고 거친 파도에서 그들을 지켰다.
그러나 몰아치는 바람과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물의 대신격 뤼안은 이미 절반의 권능을 잃었고, 지상에 강림하지 않은 상태로는 해신의 영역에서 온전히 축복을 내려줄 수가 없었다.
거친 바람에 배가 흔들린다. 높은 파도가 솟구쳐 갑판을 적셨다. 금방이라도 전복될 듯 위험하게만 보였다.
“바다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하나의 분노가 모두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엄숙한 표정으로 외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주력이 뤼안의 신성력과 뒤엉켜 주변 환경을 변화시켰다. 배를 뒤집어엎을 듯 몰아치던 파도가 낮아지고 마스트를 부술 듯 불어오던 바람도 약해졌다.
배가 넘어가지 않도록 다급히 움직이던 선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아이반이 창을 뽑아 들었다.
“적이 온다.”
폭풍우 너머에서 낯선 배가 보였다. 처음에는 하나였으나 곧 둘이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수십, 또 일백이 훌쩍 넘었다.
평균적인 크기는 아군에 비해 작았으나, 그 수가 아군의 두 배를 넘어 세 배에 가까웠다. 크고 작은 배가 전방에 가득해 바다를 가릴 정도였다.
망원경으로 그들을 확인한 카시우스 제독이 이를 갈았다.
“망할 해적 놈들이……!”
원래 해적 사이에서는 바다의 보주, 그러니까 해신의 심장에 대한 전설이 유명했다. 예전 칼리 호킨스의 보물섬에서 발견된 해신의 심장을 가져가는 것도 원래대로라면 해적이었을 것이고.
깊은 바다의 폭군이 부활하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이 해적이었다. 그러니 서쪽 바다에 우글거리는 해적들이 해신의 권속이 되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에 가라앉거나, 해신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거나. 선택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쾅!
폭음과 함께 해적의 포탄이 날아왔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닿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떨어져 물기둥이 치솟았다.
바람 때문이었다. 저들에게는 순풍이고 아군에겐 역풍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차이였다.
쾅!
아군의 대포도 불을 뿜었다. 원래 이곳의 대포란 것이 이리 먼 거리에서 쏠 만한 것이 아니었으나 서로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점차 둘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포탄도 정확해졌다. 선두에 있던 함선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명중탄이 많아졌다.
성황청 사제들이 만들어 낸 방어막을 포탄이 두드렸다. 쉴 새 없이 퍼지는 충격파가 마치 물결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방어막이 흔들리면서 뿌리는 빛 때문에 주변이 환할 정도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놈들이 가까이 다가와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녀석들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군과 달리 저들은 따로 포탄을 막아 줄 방어막이 없었기에 해적선이 몇이나 침몰하는 중이었지만 수의 우위를 믿고 있는 듯했다.
하긴, 바다에서 싸우는데 바다의 신이 함께하는 자신들이 설마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악신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공격하는 비극적인 표정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불쾌하군.”
깊은 바다의 폭군이 아니더라도 잘만 습격하던 놈들이었다. 애초에 해적질을 업으로 삼던 녀석들이 새삼스럽게 인류애를 깨달을 리가 없었다.
아이반은 으드득 목을 풀고는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단번에 거리를 좁혀 해적선 위에 올라섰다. 가장 재수 없는 미소를 하고 있던 녀석의 배였다.
설마 하늘을 날아 이 먼 거리를 넘어올 줄은 몰랐는지 해적들이 움찔 굳어 있을 때 아이반이 한껏 마력을 담아 창을 휘둘렀다.
쾅!
갑판을 부수는 것으로 모자라 마스트를 꺾고 용골을 꿰뚫었다. 단번에 반으로 조각난 해적선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침몰을 시작했다.
침몰하는 배를 밟고 뛰어오른 아이반은 또 다른 해적선을 향해 창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