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23
요르문간드의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았기에 아군이 모두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나고, 테잔과 델피노가 더욱 기운을 내뿜으며 방어막을 튼튼히 만들었다.
쉬이이이-
보랏빛 숨결이 낮게 깔리며 섬을 뒤덮었다. 요르문간드를 경계하며 바짝 솟아오르던 촉수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땅에서 수천, 수만 개의 돌기가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옛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신조차 아홉 걸음을 걷지 못하게 만든 지독한 독기가 섬을 뒤덮은 점막을 죽이고 다시 돌아왔다.
끈적하게 녹아내린 점막에선 더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서 섬에 내리지 못했다.
– …독기는 다 거둬들였다. 별 문제는 없을 거다.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은 요르문간드가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지자 아이반이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고 짐짓 당당하게 배에서 뛰어 내렸다.
촉수 가득하던 점막과 뒤섞여 녹아내린 땅이 철벅거려 발에 닿는 느낌이 무척이나 불쾌했으나 어쨌든 위험하지는 않았다. 피부가 따끔하지도 않고 내장이 녹아내리거나 눈이 멀어 버리지도 않았으니 독기도 제대로 사라진 모양이다.
“어서 내려오시오! 적이 몰려오기 전에!”
아이반이 소리치자 사나운 이빨이 훌쩍 날아올라 그의 옆에 도착했다. 그 뒤로 이레인이 정령을 이용해 사뿐히 내려오고, 테잔이 땅을 일으켜 비스듬히 만든 길을 통해 델피노가 걸어왔다.
다른 배에서도 하나둘씩 상륙하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반이 대뜸 허리를 비틀어 창을 집어 던졌다.
쉬이익!
쾅!
아이반의 투창은 웬만한 포탄 세례보다 강력했기에 저 멀리 있던 숲 일부가 싹 밀려나고 부러진 나뭇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그 파편 너머로 잘게 찢겨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였다. 해신의 권속, 역겨운 바다 괴물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전투 준비!”
누군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무기를 들었다. 방패 너머로 적을 노려보며 싸움을 기다렸다.
다행히 이곳은 시도 때도 없이 기울어지는 배가 아니었다. 언제 부서져서 바다에 빠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전투력이 절반은 높아진 셈이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결국은 땅이 편했다. 두 발이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주었다.
화르륵!
서둘러 주문을 완성한 마법사들이 불꽃을 쏘아 날렸다. 숲을 뚫고 달려오던 괴물들이 화염에 휩싸여 바닥을 뒹굴었다.
“발할라가 기다린다! 창을 찔러라!”
노르드 전사들이 소리치며 가장 먼저 적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을 뚫고 가까이 다가온 괴물들이 썰려 나갔다.
“정의를 위하여!”
성기사들도 질 수 없다는 듯 달려가 괴물의 머리를 깨부수고 팔인지 촉수인지 모를 기다란 것들을 잘게 잘라서 흩어놓았다. 갑각류의 껍질 같은, 때로 물고기의 비늘을 닮은 피부를 꿰뚫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터트렸다.
그러나 몇몇은 그것으로 죽지 않고 몸을 재생하며 달려들었다. 결국, 신성한 불꽃으로 완전히 불태우고 나서야 숨이 끊어졌다.
사제들이 다시금 기도 올려 천상의 문을 열고 아홉 신격의 천사들을 불러오려 했으나, 델피노가 그것을 막았다.
“신성력을 아끼십시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은 다른 신의 영역이라 아홉 신격의 신성력이 빠르게 차오르지 않았다. 이미 성지 선포로 신성력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천상의 문을 열고 천사를 불러오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퍼질 가능성이 컸다.
일단은 신성력을 아끼고, 그것으로 천사를 불러오기보다 아군을 치유하는 데 집중한다. 사제들의 신성력이 귀히 쓰일 때가 있을 거다.
섬에 상륙한 이후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반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적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웅-
깊은 바다의 폭군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밀리지 않는 거대한 존재감이 둘이나 더 있었다. 요르문간드의 독기가 스치고 지나가니 숨어 있던 것도 포기한 모양이다.
“대신격에 가까운 자들이 셋이라. 어째 가능하겠소?”
아이반이 물으니 셀룬이 검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영웅이란 때로 승산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하노라.”
해석하자면 승산이 낮으나 피할 수 없으니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암담하나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유리한 전장에서 싸운 것보다 지극히 불리한 전장에서 싸운 적이 훨씬 많았다.
“전장을 분리해야 하오. 초월자가 몇이나 이곳에서 부딪히면 그 파장을 감당할 수 없소.”
“이곳은 해신의 영역이다. 그 누가 그를 몰아내겠나? 그리할 방법이 있겠나?”
“그건 아홉 신격이 고민해야지. 세계 주권을 빼앗기고 절반의 권능을 잃었는데 설마 지켜보고만 있겠소?”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으니 아홉 신격은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
짧은 한숨을 내뱉은 셀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저들을 붙잡는다.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탁!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셀룬이 검을 휘둘렀다. 달빛을 한 손에 쥐고 흔들자 공간이 쩍 갈라지며 그 너머에 있던 사악한 자들이 보였다.
깊은 바다의 폭군, 어두운 불꽃을 휘감은 거인, 그리고 미쳐 버린 생명의 신.
은밀하게 손을 내뻗던 그들을 가로막고 달빛이 내리쬐었다. 오로지 투철한 신념과 꺾이지 않는 의지, 쌓아 올린 무력으로 신격이 된 옛 용사가 다시금 세상을 위해 헌신하기를 선언했다.
“가장 어두운 밤하늘에도 달은 떠오르리라.”
스스로 새기듯 말을 내뱉고 셀룬이 달려들었다. 그 뒤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브리나가 한껏 불꽃을 머금고 따라갔다.
쏴아아아-
바다에서 해일이 밀려오다가 요르문간드의 거대한 몸에 가로막혔다. 깊은 바다의 폭군이 다시금 바다를 자신의 육신으로 삼고 솟아올라 세계 뱀을 내려치자 요르문간드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씹었다.
“델피노! 신을 부르시오! 아홉 신격이 있어야만 하오!”
아이반은 브리카를 타고 날아오르며 소리쳤다. 그 옆에 용의 불꽃으로 날개를 만든 사나운 이빨이 함께하고 있었다.
델피노는 그 말을 듣고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그때가 지금임을 알아차리고는 신성한 깃발을 한껏 휘둘렀다.
펄럭!
신성의 증명이 흔들리며 막대한 신성력을 흩뿌렸다. 각자 바쁘게 싸우고 있던 사제들이 그를 바라보자 델피노가 소리쳤다.
“비로소 이 땅에 신성이 강림하리라!”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황청의 성자, 신성의 지상 대리인이 그리 외치자 모든 사제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교단과 종파를 가리지 않고 진심으로 감격하여 대답했다.
“이 땅에 영광이 있으라!”
가까이 괴물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초월자들이 싸우기 시작해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도 지금은 상관이 없었다.
모든 사제가 기꺼이 발판이 되기를 자청했다. 비루한 몸뚱이를 밟고 위대한 분이 내려오신다면 그저 영광이었다. 나약한 영혼을 바쳐 문을 열 수만 있다면 더없는 축복이었다.
각자의 신을 부르짖으며 진심으로 원하자 그들의 신성력이 한곳에 모여 하늘로 치솟았다. 그 가장 앞에서 성자 델피노가 깃발을 흔들며 문을 열었다.
화아아-
아홉 빛깔 광영이 흩날리고, 세상 모든 것의 경배를 받으며 위대한 자가 둘 나타났다.
불의 신, 쿤다라.
물의 신, 뤼안.
오랜 세월 천상에서 아래를 바라보던 자들이 친히 지상에 내려와 무기를 꺼내 들었다.
– 너희의 기도는 이루어지리라.
233화 셋과 다섯, 하나
쿤다라와 뤼안이 나타나자 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싸우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아홉 신격의 힘이 깊은 바다의 폭군이 만든 영역을 찢고 지상에 스며들었다.
화르륵!
한 손에 횃불을 든 거인, 쿤다라가 손을 내뻗으니 바닥에서부터 신성한 불길이 치솟으며 벽을 만들었다. 신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이 초월자들을 집어삼켰다.
깊은 바다의 폭군, 두 명의 악신은 그에 반항하며 벗어나고자 했으나, 이건 쿤다라만의 힘이 아니었다. 아홉 신격 모두의 의지이니 감히 도망칠 수 없었다.
우웅-
새로운 세계가 초월자들을 붙잡고 현실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승패가 갈리기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 콜로세움이었다.
아이반 역시 그 영역에서 밀려나 현실에 남아 있을 뻔했지만, 위그드라실 문양에서 온갖 신력을 끌어내면서 억지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사나운 이빨에게 소리쳤다.
“다른 이들을 보호하시오! 결계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보시오!”
용의 심장에서 마력을 한껏 내뿜으며 같이 넘어가려던 사나운 이빨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버티던 것을 풀어 버리고 그대로 현실에 남았다.
델피노는 물론이고 성황청의 사제들 모두 신격을 소환한 후유증을 겪고 있을 거다. 다른 신격의 영역에서 아홉 신격을 둘이나 불러왔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들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였다.
“기다리겠다!”
그리 외친 사나운 이빨은 등을 돌리고 날아갔다. 테잔과 이레인의 곁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탁!
현실과 연결된 문이 닫혔다. 이전과 똑같은 풍경이었으나 미친 듯이 몰려오던 바다 괴물의 모습도, 소리치며 싸우는 병사와 기도하던 사제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초월자들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쪽 바다의 신, 깊은 바다의 폭군.
어두운 불꽃을 휘감은 거인, 악신 타오르는 잿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