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27
검을 든 아이반이 괴물을 쪼개고 나아가자 활을 든 아이반이 화살을 쏘아 뒤를 든든하게 지켰다. 길이 막히며 지팡이를 든 아이반이 불덩이를 쏘아 길을 열었고, 갑자기 괴물이 쓰러진다 싶으면 가슴에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모두가 아이반이었다. 때로는 검, 때로는 창,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도 했고, 놀라운 주술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놓치는 것이 없는 궁수였으며, 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암살자였다.
어쩌면 아이반이 닿았을 수많은 가능성이 현실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결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으나, 지금의 아이반은 그 모든 가능성을 현실에 불러올 수가 있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자, 자신의 부활로 세계의 재생을 알리는 자.
아스가르드의 화신이자 아홉 세계의 후계자라면 발드르 말고 달리 그 어떤 신명이 어울리겠나.
그리하여 아이반은 광명신 발드르였다. 홀로 찬란히 빛나서 세계의 희망을 상징하는 자였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품은 자였다.
쾅!
악신 뮤트가 묠니르를 얻어맞고 한참을 뒤로 튕겨 나갔다. 육신이 짓뭉개지고 시커멓게 타올랐다가 천천히 재생했다.
악신 뮤트는 원래 전투에 능한 신격이 아니었다. 필멸자가 상대라면 몰라도 초월자와 싸운다면 유리할 것이 하나 없었다.
그가 그리 밀리고 있으니 타오르는 잿불이 다급해졌다. 악신 뮤트가 힘을 공급하지 않으면 타오르는 잿불은 전성기의 힘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불의 신 쿤다라와 도저히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세 초월자의 합공으로 깊은 바다의 폭군이 권능을 잃고 신성이 쪼개지고 있었다. 건방진 필멸자 따위는 금방 짓눌러 버릴 줄 알았던 악신 뮤트는 필멸자가 갑자기 신격이 되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불리하다. 더는 반전의 기회가 없다.
그것을 깨달은 타오르는 잿불이 방향을 틀었다. 한껏 모으고 모은 힘을 부여 잡고 깊은 바다의 폭군에게 다가갔다.
깊은 바다의 폭군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던 세 초월자는 타오르는 잿불이 달려드는 것을 확인하고 힘을 끌어올렸다. 곧 쏟아질 불길에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타오르는 잿불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깊은 바다의 폭군을 꿰뚫었다. 타오르는 잿불의 화염 채찍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성을 찢고 불태웠다.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초월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신성이 꿰뚫린 깊은 바다의 폭군마저도 그러했다.
– 크아아아아!
깊은 바다의 폭군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신성이 조각나면서 구심점을 잃은 권능이 폭주하는 것이다.
타오르는 잿불이 깊은 바다의 폭군을 살해하고 신성에 불을 질렀다. 물의 신 뤼안의 권능을 절반이나 집어삼켜 대신격이나 다름없었던 해신의 그 위대한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쿤다라와 싸우다 등을 돌린 대가로 횃불에 얻어맞아 육신의 절반이 잘게 부서졌지만, 타오르는 잿불은 기어이 목적을 달성한 후 뒤로 물러났다.
한 번 무너졌던 육신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면서 아이반을 물리치고 악신 뮤트 옆에 섰다.
쿠구궁!
깊은 바다의 폭군이 가진 신성이 폭주하며 날뛰기 시작하자 세 초월자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잠깐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깊은 바다의 폭군은 사라질 터였다. 그러면 빼앗긴 권능을 되찾은 뤼안이 더욱 강한 모습으로 악신을 공격하겠지.
‘무슨 생각이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표정을 굳히고 묠니르를 집어 던졌다. 쿤다라 역시 횃불을 휘둘렀다. 천둥을 머금은 파괴의 망치와 신성한 불꽃이 동시에 날아갔다.
쾅!
타오르는 잿불은 한 손으로 묠니르를 후려치고 화염 채찍으로 신성한 불꽃을 휘감았다. 그는 육신이 무너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세상을 나눈 결계를 후려쳤다.
초월자가 몇이나 뒤엉켜 싸울 것을 예상하고 만든 결계였다. 성황청 아홉 신격 모두의 힘으로 고립된 세상을 만들었으니 꿈쩍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결계가 거세게 흔들리며 틈이 벌어졌다. 자그마한 구멍이 뚫리고 그 너머로 현실이 보였다.
‘생각보다 싸움의 영향이 컸나?’
아니, 그게 아니었다. 이 결계를 만든 아홉 신격의 힘이 약해진 것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미쳐 버린 생명의 신, 악신 뮤트가 힘을 불어넣으니 타오르는 잿불이 다시금 몸을 키웠다. 남은 힘을 쥐어짜듯 거세게 불타올랐다.
그는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멀어졌다.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용케 도망치고 있었다.
화르륵!
그걸 지켜보지 않겠다는 듯 불의 신 쿤다라가 쥐고 있던 횃불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세상을 불태우듯 태양이 솟아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타오르는 잿불은 그에 맞서 힘을 내뿜었다. 그러나 잿불은 태양을 이기지 못했다. 서서히 뒤로 밀리고 태양에 억눌려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때 타오르는 잿불은 악신 뮤트를 붙잡아 방패로 사용했다. 무한히 끓어오르는 생명력을 장작으로 삼아 더 크게 타오르고, 태양을 기어이 밀어냈다.
– 끄아아아악!
악신 뮤트의 비명이 잠시 들리다가 흩어졌다. 무한한 생명력도 모든 것을 불태우는 권능 앞에서 멀쩡할 수는 없는지 육신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타오르는 잿불은 깊은 바다의 폭군을 죽이고, 악신 뮤트마저 버린 채 홀로 도망쳤다.
한때 가장 영광스러운 화염이라 불렸던 자의 행동이라기엔 너무나 비열하고 한심한 짓이었다.
비록 이룰 수 없는 망념에 사로잡혀 미치고 타락했으나,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 순수한 불꽃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믿었던 쿤다라가 한탄하듯 외쳤다.
–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서 한때 자신이 추구했던 것조차 잃어버렸는가!
타오르는 잿불이 그리 멀어졌지만, 선뜻 추격하지 못했다. 그가 사라지는 공간 너머로 지독하게 사악한 기운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불의 대신격 쿤다라마저 멈칫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다. 신과 대악마는 물론이고 그보다 끔찍한 자의 존재마저 느껴졌다.
“와아아아!”
한편 결계가 무너지고, 현실로 튀어나온 악신이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승리를 외치며 기쁨에 몸을 떨었다.
깊은 바다의 폭군은 신성이 조각나 사라졌고, 미쳐 버린 생명의 신 뮤트도 타올라서 흩어졌다. 반면에 물의 신 뤼안은 잃어버린 권능을 되찾았으며, 아이반은 필멸자를 벗어나 신격이 되었다.
그리 본다면 승리가 확실했다. 적의 힘은 줄고 아군의 힘은 늘었으니 좋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셀룬은, 사브리나와 쿤다라, 뤼안은 알았다. 그들이 이곳에 힘을 집중하는 동안 악신과 악마들이 다른 곳에서 사악한 계획을 완성했다는 것을, 타오르는 잿불이 세계 주권을 기어이 가지고 도망갔다는 것을.
‘···졌군. 작전은 실패했어.’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
다섯 대악마의 주인이며 천상의 가장 오래된 적이 마침내 움직였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 결국은 일어났다.
세상의 균형은 무너졌고, 평화는 사라졌다. 이제 끔찍하고 끔찍한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236화 남쪽의 지옥
초월자들이 악신들과 격리된 차원에서 싸우는 동안 현실에 남아있던 자들도 마녀와 해적, 온갖 괴물과 싸웠다.
초월자가 모두 자리를 비웠음에도 아군에는 대주술사와 성자, 용의 심장을 가진 뱀신의 대전사, 세계수의 대행자가 함께하니 적을 처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오십여 척이 출발했던 대선단은 비록 스물밖에 남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삼 분의 일이 겨우 넘었지만, 사기는 오히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일반적인 전투에서 이 정도 손실이라면 전멸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민망한 일이었으나, 상대가 신격이었기에 이들은 모두 놀라운 승리라며 자축했다.
수많은 자가 목숨을 잃었으나 그 대가로 사악한 신을 둘이나 죽였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 치열한 싸움 끝에 멸망의 갈림길에 있던 나라를 구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나.
물론 죽음은 슬펐으나, 그들을 애도하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승리를 널리 알리는 것이 먼저 간 그들의 명예를 빛내는 길이라 여겼기에 억지로 더 목소리를 높여 위대한 승리를 부르짖었다.
“우리가 돌아왔다! 사악한 신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았다!”
병사들이 그리 소리치며 돌아오자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모두 손을 하늘로 뻗으며 환호했다.
“영웅이 돌아왔다!”
신을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그저 무모한 도전이고 의미 없는 발악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성공하고 돌아오니 서부 연합 왕국 모두가 기쁨에 몸을 떨었다.
평소에는 보기도 힘들던 고위 귀족이 앞다퉈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그사이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크게 쇠약해진 왕이 모처럼 활짝 웃으며 병사 하나하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정말이지 모두 고생하였다.”
그러던 왕이 발걸음을 멈췄다. 행복한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씁쓸한 눈빛으로 관을 쓸었다. 한참이고 그 앞에 서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직 이 땅은 그대를 필요로 하건만, 너무 빨리 가셨소.”
늙은 제독은 자신이 말한 대로 인생 최후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걸어서 돌아오지는 못하고 깃발을 덮고서 돌아왔다.
좁고 딱딱하니 분명 불편할 텐데, 평생을 배에서 지낸 제독은 아무렇지 않은 지 깊은 잠에 빠져서 다시는 깨지 않았다.
“제독의 끝은 어떠했는가?”
왕의 물음에 병사가 답했다.
“사방에 가득한 괴물들을 바라보고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용맹하였고, 현명했으며, 위대했습니다.”
“그래, 그런 인물이었지.”
제독은 죽어서나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실 대부분의 병사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자들, 육신과 유품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출발할 때는 광장을 빽빽하게 채웠던 병사들이 지금은 허전하기만 했다.
국왕은 그들을 바라보다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영웅을 맞이해라! 그들의 승리와 희생을 잊지 마라! 너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그들이 피와 죽음으로 마련한 것임을 명심해라!”
사흘간의 축제가 선포되었다. 공포에 떨던 백성들은 모처럼 든든히 배를 채우며 영웅들을 기렸다.
그러나 이번 싸움의 가장 큰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아이반은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의 피로가 미처 사라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들 사이에서 뻔뻔하게 승리를 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즐겁게 먹고 마시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이반이 있는 곳은 조용하기만 했다.
“전술적으로는 승리했고, 전략적으로는 패배했소. 깊은 바다의 폭군과 악신 뮤트를 처리했으니 크나큰 성과이나, 세계 주권은 되찾지 못했고, 저들이 마왕을 불러올 준비를 마쳤으니 내준 것이 너무 많소.”
아이반이 못마땅한 듯 하늘을 노려보다가 말을 꺼내자 달의 여신 셀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한쪽에서 불을 밝혔으나, 이미 어둠은 세상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