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28
그들이 서쪽에서 싸우는 동안 천상의 아홉 신격이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 불의 신 쿤다라와 물의 신 뤼안이 직접 강림한 것과 동시에 다른 쪽에서도 바람의 신 테스와 강철의 신 델루가가 강림하여 악신들을 쫓아 보냈기 때문이다.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가 리자드맨 키메라를 통해 신격을 붙잡아 힘을 빼앗을 계획을 세운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급 신격들의 권능을 빼앗는 것을 막았다고 했다. 그쪽도 만만치 않게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무엇 하나 미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고, 저들은 마왕을 소환할 준비를 끝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너무나 강력하고 위험해서 차원방벽이 없더라도 세계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이제 세계 주권이 저들의 품에 들어갔으니 그 마지막 장벽마저도 무너진 셈이구나.”
달의 여신 셀룬은 그리 말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밤을 물들이는 사악하고 거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별빛은 이미 삼켜졌고, 가장 밝은 보름달마저도 그 어두운 기운에 제대로 빛나지 못하고 흐려질 것만 같았다.
필멸자이던 시절은 물론이고, 신격이 된 후에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거악이었다. 신들 사이에서도 공포로 불리는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아직 완전히 세계를 넘어오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승리의 대가로 세계 주권을 받겠노라 그리 강하게 주장하였기에 창조주의 권리를 나눠 주었건만, 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런 지경이 되다니. 저들의 오만함이 결국 파멸을 앞당겼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대전쟁 이후에 탄생하였으니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세계의 기록으로 지식과 기억을 전달받기에 어제의 일과 다르지도 않았다.
창조주의 화신인 드래곤으로서 세계 주권을 신격에게 나눠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한데,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빌미가 되었으니 오롯한 정신으로도 그 분노를 쉬이 감추지 못했다.
“대전쟁의 승리자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건만, 가진 것이 많으니 행동이 굼뜬 것인지 영 믿을 수가 없구나. 이것은 명백히 천상의 실책이다!”
사브리나가 그리 비난하자 뱀신 모르나가 소리 높여 웃었다.
“승리의 달콤함은 가장 용맹하던 자들마저 나태하게 만드는 법이지. 그러나 과연 천상의 아홉 신격이 그리도 한심한 자들인가? 그런 자들이 어떻게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날 수가 있겠나?”
사나운 이빨의 몸을 빌려 나타난 그녀는 마치 눕듯이 반쯤 기대어 앉은 상태로 와인을 홀짝였다. 리자드맨의 미각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라 과연 와인 맛이 제대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 또한 천상의 계획이리라. 나는 그리 생각한다.”
구멍 숭숭 뚫린 차원방벽으로는 어차피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아예 차원방벽을 없애고 신화시대로 만들자.
대악마가 날뛰고 악신이 유폐에서 벗어나니, 세상이 엉망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다가오는 멸망을 유예하며 오랫동안 위험 속에서 사느니, 이번에야말로 오랜 악연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자.
“천상은 오히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오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악마와 악신이 날뛰었다.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세상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결국 천상의 아홉 신격에게, 대전쟁에서 승리한 대신격들에게 지상이 불타고 필멸자가 죽어 가는 것이 아주 치명적인 손해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대악마와 악신의 계획은 점차 나아가고 있지. 그래서 더 많은 악마와 악신이 날뛰고, 마침내 파멸의 마왕마저 넘어오려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떻지? 과연 천상의 힘은 쇠하였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오기도 전에 대악마가 둘이나 죽었다. 가장 먼저 깨어난 악신 아발로크는 제대로 활약하지도 못하고 사라졌고,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도 결국은 별달리 한 것이 없었다.
악신과 손을 잡은 깊은 바다의 폭군은 갈기갈기 찢겼고, 미쳐 버린 생명의 신 뮤트는 불타서 재만 남았다.
비록 그때마다 세상이 엉망으로 변했지만, 천상의 아홉 신격이 희생한 것이 무엇이라도 있었나?
“물론 그 모든 것이 천상의 계획은 아니겠지. 그대가 없었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천상의 생각도 변하지 않았겠나?”
다소의 손해가 감수하더라도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불러오기만 하면 된다는 어둠의 세력, 적의 세력을 많이 잘랐으니 한판 붙어 볼 만하지 않느냐는 천상의 생각.
지금의 상황은 결국, 둘의 생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겠냐고 뱀신이 말했다.
“천상의 아홉 신격은 태생부터 고귀한 초월자다. 항상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으며, 그 지독한 대전쟁마저 승리한 위대한 자들이다. 다시 싸워도 패배하리라 생각지는 않겠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러면 물의 신 뤼안이 절반의 권능을 잃었던 것 역시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오? 스스로 미끼를 자청해서 권능을 집어 던졌다? 금방 다시 찾을 자신이 있어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의도했다고 하기에는 미끼가 너무 컸다.
아이반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니 뱀신 모르나는 김이 빠졌다는 것처럼 와인을 치웠다.
“그러면 그대는 정말로 그들이 무능하고 멍청하다 여기는 것인가?”
종말의 전쟁에서 맞서 싸워야할 자가 결혼에 눈이 멀어서 자기 검을 팔아먹는 바람에 불타는 검에 베여 죽고 세계는 멸망한 빡대가리 신도 있는데, 뭐.
자기 주량 자랑하다가 바다를 들이켜 마신 한심한 놈과 장난친다고 자는 여신의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린 미친놈도 있었다.
싸우다가 패해서 권능을 잃어버린 것 정도는 당당한 일이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싸우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뤼안이 일부러 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그가 아니더라도 아홉 신격 중의 누군가는 당했을 것이오. 악신이 몇 번이나 덫을 놓았을 테니까.”
마왕 크툴라스를 불러오려면 세계 주권이 꼭 필요했다. 어쩌면 예전 사브리나를 붙잡았던 것 역시 단순히 악신의 유폐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실패했으니 세계 주권을 가진 다른 자를 노렸을 뿐, 특별히 물의 신 뤼안을 노리고 꾸민 음모는 아니란 소리다.
“악신과 대악마는 모두 자기주장이 강한 자들이오. 결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지. 심지어 스스로 희생한다거나 할 리가 없소.”
그런데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러했다. 삐걱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하나의 결과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아직 넘어오지도 않았소. 그러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결론적으로 모두 적당히 승리했다고 여기며, 적당히 패배했다고 느꼈다. 치열하게 부딪쳤으나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이야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면 누가 이득을 보았나? 누가 과연 이 치열한 판을 설계했나? 누가 이것을 진행할 능력이 있나?
“우리가 혹한의 마신 헤르샤스를 쓰러뜨리는 동안 서쪽에서는 물의 신 뤼안이 절반의 권능을 잃었고, 남쪽에서는 또다시 대악마가 나타났다고 했소. 서쪽의 일은 마무리되었는데 남쪽의 일은 소식이 없군. 또 다른 사건이 종료되었다는 말만 들었소.”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따르는 대악마는 모두 다섯이었다. 그중 죽음의 인도자와 가장 깊은 절망은 퇴치되었고, 벌써 부활할 리가 없었다.
음습한 모략, 신성의 배신자, 악의의 증명.
그 셋 중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이처럼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남쪽에 나타난 대악마는 음습한 모략이오. 그 녀석이 다른 이들을 조정하며 판을 만든 것이 분명하오. 우리는 천상의 아홉 신격이 아니라 음습한 모략이 무엇을 할지 예상해야만 하오.”
아이반의 시선이 돌고 돌아서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처절하게 짓밟힌 후 끔찍한 사투를 이어가고 있는 그곳이었다.
237화 희망이 갈라진 땅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마리난 제국은 예전의 위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계의 문이 열리고 악마가 휩쓸고 지나갔기에 영토의 거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고, 남은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물론 제국이 둘로 쪼개지기는 했어도, 신뢰의 연합이 들어와 있을 때는 본격적으로 내전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피의 동맹과 싸우느라, 악마와 싸우느라 내부로 칼을 돌릴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합이 그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이 밀고 들어오는데 사적인 욕망을 위해 내전을 벌이는 것을 연합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남의 땅에 와서 피 흘리며 싸우는 중인데 집주인이라는 놈들이 갑자기 갈라져서 머리 쥐어뜯고 싸우면 얼마나 화가 나겠나.
그랬다가는 악마가 시체를 끌고 돌아다니든, 오크 도끼에 대가리가 쪼개지든 알아서 하라고 병력을 회수할 것이 뻔했다.
연합이 대놓고 칼을 갈면서 적당히 하라고 눈치를 주는데 그걸 무시하고 싸울 수는 없었다. 제국이 온전할 때는 그들이 신뢰의 연합을 이끌었으나, 둘로 쪼개진 후에는 끌려가는 처지였다.
그러다 남쪽에 가득하던 악마 잔당을 대충 정리하고, 북쪽에서 밀려오던 그린스킨과의 전쟁도 끝났다. 그리하여 신뢰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던 병력이 모두 돌아갔다. 자국에서도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데 전쟁이 끝난 남의 땅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고, 서로 싸우지 못하게 붙잡던 연합의 병력도 빠져나가니 둘로 나뉜 제국의 충돌이 점차 많아졌다. 중재할 자가 없으니 점차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런 사정을 전해 들은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판이군. 발할라 앞마당을 보는 것 같아.”
그래도 에인헤랴르는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행동했다. 그게 낮에는 서로 칼질하며 죽이다가 저녁에는 술 퍼마시고 고기를 뜯는 것이기는 해도.
싸우다가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서로 멱살을 붙잡는 것은 우리네 바이킹의 훈훈한 풍경이었다.
부서진 테이블과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술잔, 누군가의 입에 들어갔다가 탈출한 무언가가 뒤섞인 난장판을 정리하는 것은 발키리의 몫이었고.
하나같이 상남자 마초를 자부하는 노르드 전사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저분하면 대충 발로 쓱 밀어서 치운 후에 술이나 마실 뿐이다. 그들은 깔끔한 것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미친놈들이었다.
물론 발키리도 연약하거나 순종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칼로 쑤시고 옆으로 치워버리는 전사들이지.
그걸 보면서 에인헤랴르는 또 껄껄 웃으며 술을 마셨다. 해가 뜨면 칼 맞고 뒈진 자들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일어나고는 했다.
그런 곳이 발할라였다. 노르드인이 꿈꾸는 전사의 낙원이 그러했다.
저번 싸움에서 사망한 노르드의 전사가 천 명이 넘었다. 아이반은 직접 아스가르드의 문을 열고 그들을 발할라로 이끌었다. 전투 전에 선언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목숨이 끊어져 발할라로 떠나는 자들은 기뻐서 활짝 웃었고, 치열한 싸움 끝에 겨우 살아남은 전사들은 더 열심히 싸우다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뭐가 이상해도 한참이나 이상했다. 아이반은 노르드의 왕이 되었고, 에인헤랴르의 지도자, 또 아스가르드의 신격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대충 남부의 사정을 들은 아이반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솔직히 동서로 갈라진 제국의 정치 군사적 상황이야 신격이 된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었으나, 남쪽에 나타난 대악마의 단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 남쪽으로 움직이겠다고 말하자 테잔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쪽은 내가 움직이기 어렵겠군. 잠시 떨어져야겠네.”
그린스킨과 마리난 제국은 정말 치열하게 싸운 사이였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테잔이 움직이는 것을 그들이 용납할 리가 없었다.
불만을 씹고 강행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여긴 테잔은 잠시 떨어지기를 청했다.
“실상 내가 함께하는 것이 그대의 명성에 누가 될 수 있다네.”
“나는 헛된 명성을 좇지 않소.”
“신격의 명성이 헛되다면 세상 그 무엇이 참되단 말인가? 신의 이름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오욕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말한 테잔이 흘깃 동쪽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복수자들의 움직임이 제법 거세다네. 동맹이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서는 곤란하지.”
신뢰의 연합은 피의 동맹과 휴전을 맺었으나 그것을 거부한 자들이 있었다. 피의 동맹이 고향을 불태우고 가족과 친구를 죽였는데 어찌 손을 잡겠느냐며 소리쳤다.
세상은 대의를 위해 사소한 원한은 잊어야 한다고 했지만, 형제자매, 친구와 이웃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게 사소한 원한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신뢰의 연합을 탈퇴하고 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한 자들은 스스로 일컬어 피눈물의 복수자들이라 했다.